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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 Jul 13. 2018

인권을 위한 광장의 단두대

단두대의 참극은 종국에는 희극이다

단두대는 프랑스혁명 당시 그곳에서 발명된 사형 기구이다. 사형수의 인권과 평등을 고려해 사형수의 직위나 계급에 상관없이 고통을 최대한 줄이자는 취지로 도입이 되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당시 도입을 주장한 해부학 교수 조제프-이냐스 기요탱(Joseph-Ignace Guillotin) 박사의 주장일 뿐 고통의 강도 경감 여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망자에게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사형제도 자체가 반인륜적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아이러니할 수밖에 없다.

2016년 10월 29일 광화문 사거리에 설치된 단두대 (출처:YTN)

오늘날 구시대의 산물인 단두대를 보기는 쉽지 않다. 사형제 폐지가 주류 흐름인 만큼, 사형제를 대표하는 단두대 역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이리라. 세계인권선언은 사형제를 생명권을 침해하는 비인간 형벌로 규정하고 있으며 유엔인권위원회도 모든 국가가 사형제는 국제법에 위배된다고 천명할 것을 촉구한 바 있다. 인권이라는 이름하에 폐지된 사형제는 과연 인류에게 있어서 득인지 실인지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형벌의 존재 이유와 사형

형벌은 자유주의라는 이념 하에 개인 혹은 단체가 타인의 자유권을 침해하였을 때, 그에 대한 처벌로서 대가를 치르게 하고 그를 억제하기 위한 위하력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형은 타인의 생명권을 박탈해 간 자에 대해 치러져야 할 당연한 처사다. 간혹 한 명의 범죄자가 여러 명의 사람을 살해한 경우 그 범죄자가 살해한 사람 대비 범죄자한 명의 생명권과 치환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질문받는다. 적어도 그것은 문제의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 극악무도한 범죄자는 죽어 마땅하며, 생명권을 수치화시키는 것에 포커스를 둘 것이 아니라 범죄율 감소에 그 의의가 있는 것이다. 자유주의에서의 자유는 미친 자의 칼부림을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칼부림이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선까지의 자유를 의미한다.

2016 범죄 관련 사회적 불안감 조사 (출처: 트렌드모니터)


대한민국은 '실질적 사형폐지국'

국제사면위원회는 사형 제도는 존재하지만 10년 이상 집행이 이루이지지 않는 경우 '실질적 사형폐지국'으로 지정한다. 우리나라는 1997년 12월 30일 이후로 집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속한다. 연쇄살인범 유영철과 강호순 등 61명의 사형수들이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지만 여전히 살아있다. 우리나라는 왜 이때부터 사형을 집행하지 않게 되었을까? 크게 두 분류로 나누자면 내치적 이유와 외치적인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우선 내치적인 이유로는 실제 사형을 집행하는데 들어가는 돈이 사형수가 감옥에서 삶을 마감하는데 드는 비용보다 훨씬 더 많이 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판사가 사형 선고를 내릴 때와 사형 집행인이 받는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인력, 경제적 손실 역시 포함될 것이다. 외치적인 이유로는 유럽연합과의 문화적, 경제적 교류 단절에 대한 우려이다. 유럽연합은 사형제를 야만적인 제도로 보고 있다. 사형제는 국제법에 반한다는 이유로 사형 집행 국가를 굉장히 비판한다. 국제사회에서의 국격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사형제 집행을 보류하는 것이다.

사형제국가 현황 (출처: 헌법재판소 블로그)

사형폐지에 대한 내치적 이유에 항변을 하자면 사형제 시행은 집행으로 생기는 위하력에 의해 국민이 안전한 사회분위기 조성을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위하력 유무에 대한 부분은 뒤에 서술하겠다). 안전한 사회 조성을 위해 경제적인 손익을 따지는 것이 이익보다 공익을 추구해야 하는 행정부가 취해야 할 자세인가? 국제사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주(州)마다 다르지만 연방법상으론 사형은 합헌이다. 현재 대한민국 사형제는 유럽연합의 눈치를 보느라 국가의 치안을 포기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본다.


사형제와 위하력의 관계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1976년에 사형제 합헌이라는 입장을 내놓았으나 아직까지도 51개 주(州) 중 16개 주는 사형제를 폐지하였다. 2003년과 2006년에 콜로라도대학교에서 나온 연구결과는 범죄의 억제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고, 에모리대학교에서 사형 집행이 평균 18건의 살인 억제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그 외의 다른 논문 역시 살인 억제 효과의 숫자의 차이만 있을 뿐 같은 주장을 했다. 학계에서는 연구 방법과 자료 미약 등을 이유로 그 결과에 대해 매우 비판했다. 실제 통계치를 보면 그 비판에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게 미국 내 사형 집행 주들과 사형 폐지 주들의 살인범죄율을 보면, 사형 집행 주들의 살인범죄 발생이 더 높다.

사형 집행 주(州)와 폐지 주의 살인범죄율 비교 (출처: www.deathpenaltyinfo.org)

그러나 사형제를 실시함으로써 영향을 미치는 전체 범죄율을 보아야지 그 위하력을 살인범죄에만 국한해서 보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실제로 미국의 전체적인 범죄율은 감소 추세다. 위하력이 있고 없고는 사형제 도입이라는 독립적인 형벌 자체가 좌지우지한다고 보기 어렵다. 위하력의 유무는 사실 소모적인 논쟁일 뿐, 사형제를 도입함으로써 범죄율이 단 1% 줄어든다면 국가는 그것을 시행해야 한다. 국민의 기본권 중 가장 존엄하고 회생 불가능한 생명권의 위험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국가의 존재 이유이다. 그것을 방치하고 국가가 제 기능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국가가 직무유기를 하는 것과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미연방수사국(FBI)는 2010년 전체적인 범죄율이 작년대비 감소했음을 발표했다.


오판의 가능성

판사도 사람이다 보니 오판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사법체계도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이기에 우려를 표함에 있어서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러나 적어도 사형선고를 내릴 정도의 중대한 사안의 경우 1심, 2심, 그리고 3심까지 재판을 진행하고 그로 인해 오판의 가능성은 충분히 줄어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충분히 진범을 가려낼 수 있을 정도로 정보기술이 발달했다. 오판이 우려가 되어 사법절차가 진행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격이다. 제2의 인혁당 사건과 같은 비극을 막기 위해서 정치가 사법부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삼권분립을 굳건히 하도록 견제를 하는 수밖에 없다.


가해자 인권 우선주의

가해자가 범죄를 저지르고 판결을 받고 난 뒤에 이미 피해자는 죽고 없다. 고통은 유족들이 고스란히 안고 책임을 져야 할 자는 국가의 세금으로 '인권'이라는 가치 하에 감옥에서 숨을 쉬고 살아간다. 가해자의 인권은 철저히 지켜지는데 반해 피해자와 그 유족들에 대한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역전된 것이다. 그야말로 인권의 오남용이라 할 수 있다. 유족이 직접 복수를 하게 되면 이는 또 다른 범죄가 된다. 그렇다고 법원은 유족의 법감정을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참담한 일인가.

영화 <밀양>의 한 장면 (출처: 갓잼카드뉴스)

1700년대 활동한 영국의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Alexander Pope)가 쓴 시의 구절을 인용하겠다, "실수는 인간의, 용서는 신의 영역에 속한다 (To err is human' to forgive, divine)”.저 장면을 보고 정말 소름이 돋았다. 죄의 속죄 여부는 죄인 스스로가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라는 말을 죄인 스스로가 할 수 없다. 인간이 타인을 용서한다 스스로 다짐하여도 그 다짐조차 완전한 용서라 그 누가 정의할 수 있을까. 용서라는 이름으로 포장을 했을 뿐 그것은 결국 위선이다. 사람은 사람에게 용서받을 수 없다.


사형제 폐지를 반대한다고 해서 경범죄자도  죽여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 다만 엄벌주의를 통해 사회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음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나라는 법치주의 국가다. 법이 있기에 우리는 질서를 지킨다. 법이 인간의 생활패턴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만약 살해가 경범죄였다면, 길거리는 피로 물들고 말 그대로 무법천지가 되어 지금 우리가 아는 인류애의 가치는 전혀 다른 개념이 되어 있을 것이다. 직전에 인용했던 알렉산더 포프의 말을 조금 변형해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영국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
용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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