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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Sep 09. 2021

인상주의의 기원 (1)


 1958년 10월 15일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 한껏 옷을 빼입은 일련의 남녀들이 경매장으로 들어갔다. 경매장의 바깥에도 이 경매를 멀리서나마 지켜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한 달 전 영국 언론에서 세기의 경매라는 이름으로 대서특필을 했기에 가능한 풍경이었다. 중개인이 마치 미사를 집전하는 주교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들어오고 곧 경매가 시작되었다. 그 날의 경매는 신문의 광고처럼 시작부터 역사에 남을 전설적 사건이 되었다. 첫 작품인 마네의 <자화상>이 역대 최고가인 6만 5천 파운드에 팔린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연이어 나온 마네의 작품들은 최고가를 경신하며 팔려나갔고 뒤이어 나온 다른 인상주의 작품들도 최고가를 갱신했다. 세잔의 <붉은 조끼를 입은 소년>이 22만 파운드라는 경이적인 가격에 팔려나가자 열기는 절정에 달했다. 그 날 경매가 모두 종료되고 마치 약속이라도 한듯 기립박수를 친 것은 그날의 성공이 얼마나 흥분되고 놀라운 일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징표였다.


 그날 있었던 인상주의 작품에 대한 열광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반세기가 넘게 흐른 오늘날 인상주의 작품은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에서 주요 취급 상품이 되었고 가격도 58년의 그것과는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다. 비단 미술품 거래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인상주의는 대중들의 미술에 대한 인식 속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장 한국만 하더라도 인상주의를 주제로 하는 기획전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아트샵에 진열된 관련 상품들도 만들기가 무섭게 팔리고 있다. 인상주의는 이 미술의 출발지였던 프랑스에서부터 대서양 건너 미국, 동아시아에 이르기까지 가히 전세계적인 애호가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혁신적 사조로 출발했던 인상주의는 어느덧 보편적 국제 양식의 하나로 널리 소비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많은 학자들, 평론가들이 그 원인을 추적하기 위해 애썼다. 혹자는 인상주의의 화려한 색채가 현대인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보았다. 또 다른 평자는 산업사회라는 사회적 상황을 통해 인상주의 성공을 분석하기도 한다. 이 모든 설명들이 결코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인상주의는 그것이 담고 있는 역사적 궤적으로 인해 더욱 사랑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상주의 미술에 열광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유럽의 양식이 출발부터 승승장구하지는 않았음을 알고 있다. 인상주의를 추구했던 화가들은 당대에 대중, 평단의 비난 속에 시달려야 했고 작품이 팔리지 않아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예술운동의 관점에서도 인상주의는 결코 성공했다고 볼 수 없다. 공통의 목표를 향해 결집했던 젊은 화가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감정적인 논쟁과 신경전 와중에 갈라서게 되었고 일부는 끝내 각자의 길을 걸어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인상주의의 성공은 마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영웅 이야기의 결말을 보는 듯하다. 재능있고 뛰어난 영웅들이 고난에 시달리다 결국에는 인정받고 성공하는 이야기가 인상주의라는 사조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이다. 이런 신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고난을 받는 예술가라는 전형적 인물상을 자연스럽게 떠올리도록 했다. 대중의 멸시와 가난 속에서도 자신의 예술적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모네, 시슬레와 같은 초기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야기는 비단 미술뿐만 아니라 20세기 영화, 소설, 만화 등으로 각색된 예술가 이야기들의 원천이었다. 아트 딜러, 경매회사, 기획전의 큐레이터들은 작품에 가슴 뭉클한 서사를 부여하고 구매 욕구를 작용하는 촉매제로서 이 이야기를 활용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도 이런 궤적은 흥미롭기 그지 없다. 대중이 느끼는 작품의 가치가 그 자체의 기교나 내용으로 평가 받는게 아니라 이면에 들어있는 이야기에 좌우된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공의 이면에는 어두운 면 또한 도사리고 있다. 8-9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일본의 기업가들은 인상주의 작품을 본래의 목적과 다른 방법으로 빈번히 이용했다. 이 시기 인상주의 작품은 위조 우려가 없는 확실한 출처와 작품의 명성으로 인해 안정적인 재테크 수단으로 변모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투기열로 이어진 것이다. 역사 서술의 측면에서도 인상주의 미술은 알게 모르게 현대인들의 열광에 왜곡되고 있었다. 현대미술사를 다루는 대중적인 저서들은 으레 현대 미술의 시작을 인상주의로 잡는데 그로 인해 인상주의 미술 혹은 미술가들이 창조 신화의 창조자마냥 다뤄지고 묘사된다. 또한 TV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도 이 시기의 미술가들 특히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을 강박적이지만 매력 넘치는 인물로 묘사한다. 이 과정에서 작품들 속에서 묘사되는 화가들은 역사학자의 텍스트에 녹아들어간 건조한 인물이 아닌 작가들의 상상이 다소 반영된 낭만적인 인물로 그려짐은 물론이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날 인상주의 화가들은 정말로 신화나 동화속에 등장하는 영웅들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인상주의의 초기 역사 혹은 전사(前史)를 알아보는 것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특정 목적을 위해 다소간에 윤색된 현대 미술의 탄생 이야기를 서구 유럽의 미술사 속으로 끌어들여 이해하는 과정이다. 물론 이러한 해석은 자연스럽게 인상주의에 대한 전통적 해석에 반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다. 다시 말해, 인상주의를 아카데미로 대표되는 보수적인 공식 미술에 반발한 일군의 집단이 탄생시킨 미술사조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실제 초기 인상주의를 연구했던 많은 학자들은 빈번히 인상주의자들과 그 이전 미술가들과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그들이 공식 미술에 대해 가졌던 태도가 어떠했든지 간에 결국 화가로서의 교육은 국가 주도의 미술 제도 하에서 받았고 그들의 화풍에 있어서도 다소간 전통적인 미술의 영향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접근법이 결코 인상주의 그 자체의 매력을 떨어트린다거나 그 의의를 희석시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되려 이런 접근법은 단편적인 인식 틀 속에 갇혀있는 인상주의라는 사조를 더욱 풍부한 관점에서 바라보게 해줄 것이다.  


앙리 팡탱-라투르, <바티뇰 구의 화실>, 1870, 오르세 미술관.


 일반적으로 인상주의의 탄생을 서술할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해는 마네의 문제적 작품 <풀밭 위의 점심>이 낙선전에 게재된 1863년이다. 당대의 관람객들뿐만 아니라 평단에도 충격을 주었던 이 작품은 마네를 인상주의 그룹의 선도자 내지는 정신적 스승으로 각인 시킨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마네의 작품들은 기존의 관전의 기준에 부합한 미술들에 반감을 가졌던 젊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바티뇰 구의 마네 화실에 모였던 일군의 작가들을 그린 1870년 집단 초상화는 젋은 작가 그룹 사이에서 마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보여준다. 그림 속에는 후일 운동의 중요 인물로 떠오르는 르느와르, 모네, 바지유등이 그려져 있다. 비단 화가들뿐만 아니라 인상주의 운동을 비평적으로 뒷받침했던 인물들도 그림 속에 그려져 있는데 에밀 졸라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화가의 정체성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붓을 잡은 유일한 인물은 이젤 앞에 앉아 있는 마네 단 한 명뿐이다. 인상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젊은 작가 그룹에 속했던 앙리 팡탱 라투르의 이 작품은 집단의 정체성을 공고히하기 위한 일종의 기념사진이자 그들에게 영향을 준 마네에 대한 일종의 헌사였던 것이다. 후일 인상주의 운동의 주요 인물로 떠오르는 시슬레, 바지유 등이 마네의 화실 근처로 이사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처럼 인상주의 미술에서 마네의 영향력은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든지 간에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글의 시작이 미술사의 관점에서 역사적 한 해라고도 할 수 있는 1863년 산업궁(Palais d'Industrie)인근의 낙선전 전시장인 것은 아니다. 마네의 낙선전 전시로 시작하는 인상주의 서사는 그 이전에 인상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많은 역사적 사건들과 인물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고 심지어는 배제시켜 버린다. 따라서 인상주의의 기원과 초기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시계를 좀 더 과거로 돌려야 한다.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아직 인상주의자들이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집단을 형성하지 않았고 심지어는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던 1859년의 어느 날부터다. 이 날은 프랑스 미술계에서 아주 뜻 깊은 날이었는데 바로 미술계 최대 행사라 할 수 있는 살롱전이 열린 날이기 때문이다. 그 날 살롱전이 열린 산업궁에도 1958년의 런던의 소더비 경매장처럼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하지만 이들은 1958년 경매를 보기 위해 몰려든 군중들처럼 인상주의 작품을 보러온게 아니었다. 그들은 당시에 주류였던 전통적이고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 한 가운데 어딘가 불안해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감 넘쳐보이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에드가 드가. 이제 막 파리로 돌아온 신참내기 예술가 지망생이였다.


에드가 드가, <자화상>, 1855, 오르세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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