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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Sep 09. 2021

인상주의의 기원 (2)

1855년의 산업궁


 1859년 4월 5일, 벽에 빼곡하게 걸린 작품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람객 한가운데에 24살의 에드가 드가가 있었다. 그는 2년 6개월간 파리를 떠나 각지를 돌아다녔었고 파리에 오자마자 살롱 전시를 보기 위해 산업궁을 찾았다. 산업궁은 1855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위해 건설된 구조물로 당시에는 최첨단 건축공학과 과학, 산업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철제 골격으로 짜맞춰진 이 신식 건물에 1857년부터 살롱 전시가 개최되면서 논란의 불씨가 점화되기 시작했다. 많은 비평가들과 관람객들은 한결같이 이곳에서의 살롱 전시를 부적절한 것으로 여겼다. 애초에 산업궁은 산업 제품들을 소개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어진 건물이었기에 그 성격이나 기능에 있어서 미술품을 전시하기에는 적절한 건물이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실제 이러한 원성은 해가 지날수록 심해져 급기야는 산업궁 내의 살롱 전시 장소에 대한 구조 변경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기존에 균일하게 설계되었던 여러 방들을 합쳐 거대한 4개의 갤러리로 바꿨고 인테리어에 있어서도 기존의 미술관과 비슷한 형태로 변경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후 10년 동안 전시공간의 부적절성, 관람 동선의 불편함, 밝기 조절이 되지 않아 관람을 방해하는 조명 등 전시에 대한 불만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관람객들에게 있어 산업궁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거대한 유리로 둘러싸인 새장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처럼 산업궁에서 개최된 살롱 전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평불만들은 이곳이 단지 미술품 전시 장소로서 성격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살롱을 관람하러 오는 많은 관람객들은 비단 용도의 적합성뿐만 아니라 과거의 미술과 동시대의 미술을 한눈에 비교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루브르에서 열렸었던 살롱 전시를 그리워했었다. 관객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을 포함하여 푸생, 르 브룅 등 과거의 미술을 지표 삼아 동시대의 미술들을 관람하길 원했다. 하지만 그러한 연결고리가 끊어진 산업궁 속의 미술 작품들은 동일한 장소에서 전시되고 있는 상품들과 동일한 것으로 느껴졌다. 일부 비평가들은 산업궁이 "상품들의 신전"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이러한 장소에 전시되어 있는 미술 작품들 또한 "대량생산의 대명사쯤으로 여겨지는 다양한 산업 제품들과 마찬가지의 신세로 전락했다"고 한탄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1857년 이후 전시 공간의 변화는 예술가들이 미적 규범에서 자유로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루브르에서 전시하던 시절 살롱에 찾아오는 관람객들과 비평가들은 으레 과거 거장들의 미술과 동시대의 미술을 비교하며 작품을 평가했고 그것은 미술가들의 입장에서도 큰 부담이었다. 결국 예술가들은 살롱에 출품할 작품을 낼 때 과거 거장들의 미술 작품과의 비교를 고려해 비교적 온건한 작품, 즉 전통에 충실한 작품들을 내게 되었다. 이것은 또한 신고전주의로 대표되는 전통적인 역사화를 선호했던 보수적인 심사위원들의 취향을 맞추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산업궁에서의 전시는 화가들이 굳이 과거의 작품들을 의식하지 않고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대중들이 그렇게 싫어하던 산업궁의 전시는 역설적이게도 변화를 잉태한 산모였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았던 공간의 변화는 제도권 중심의 보수적 미술에 반발하던 혁신적인 미술가들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이다.


 공간의 변화가 화가들의 생각에 변화를 이끌어냈지만 1859년 전시의 소란스러움은 이런 변화를 감지하기 어렵게 했다. 그 해 살롱 전시를 두고 벌어진 각 언론사들과 비평가들 그리고 대중들의 논쟁거리는 크게 두 가지였는데 첫 번째로 출품된 작품의 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점에 있었다. 1859년 당시 심사위원단이 입선시킨 작품은 무려 3894점이었다. 총 1700명의 예술가들이 이 살롱에 이름을 올렸는데 그중에서 1278명이 화가였고 225명이 조각가였으며 에칭화와 석판화를 출품한 사람이 143명 그리고 건축가가 54명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작품 수는 자연스럽게 문제를 야기했다. 살롱 전시는 전통적으로 벽면에 작품들을 가득 채우는 방식으로 전시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 작품의 수가 늘어날수록 주목받지 못하고 잊히는 작품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당대의 어떤 언론은 "살롱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데 하나는 까다롭고 보수적인 심사위원단이고 그것을 통과하면 거의 보이지도 않는 위치에 작품을 거는 나쁜 전시 방법을 극복해야한다"고 서술했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서 낙선된 작품들이 하등의 논란도 없을 정도로 졸작이 아니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때 낙선된 작품들은 (보통의 경우 소재에서 기인하는)부도덕함 혹은 구성의 부적절함 등을 이유로 살롱에 떨어졌는데 그중에는 현대에 와서 걸작이라 평가받는 밀레의  <사신과 나무꾼들>이나 라투르의 <자화상>, 마네의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휘슬러의 <피아노 앞에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화가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심사를 한 위원단에 항의했다. 비단 화가들뿐만 아니라 몇몇 비평가들도 심사위원단의 안목에 의문을 표했다. 이 시기 심사위원단은 꽤나 억울하게도 한쪽에서는 "지나친 관대함"이 불러온 참사의 책임을 물어 비난받고 있었고 반대편에서는 "지나친 엄격함"으로 비난받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10년간 벌어진 심사위원단에 대한 반발과 공격에 비교할 때 이러한 저항은 비교적 가벼운 것이었다. 그것은 거부당한 화가들의 작품이 살롱 출품의 실패로 영원히 작업실 한 켠에 묻힌게 아닌 여타 다른 공간들에서 전시 기회를 얻었다는 점도 한몫했다. 가령 마네는 살롱전에 떨어진 자신의 작품을 다른 갤러리에 전시했고 휘슬러와 라투르 또한 파리의 다른 곳에서 전시 공간을 찾을 수 있었다. 살롱에 출품하지 못한 작품들은 사실상 미술 작품으로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었던 과거의 모습과 비교하면 이때 낙선된 작품들은 다양한 활로를 통해서 그 생명력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정도는 이전 세대 혁신적 화가의 행보에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했는데 가령 쿠르베가 살롱에 반대해 독립전을 개최한 것이 그것이었다. 공식적인 제도권 내에서 배제된 미술 작품들이 독립전이라는 형태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은 이후 인상주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후일 대부분의 인상주의자들 또한 살롱전에 출품했지만 퇴짜를 맞았고 그것이 곧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시라는 기념비적인 독립전의 탄생을 낳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1859년 살롱은 대중, 화가, 평론가들의 심사위원단에 대한 불신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해이기도 했다. 산발적으로 제기되어 오던 심사위원단의 자질 혹은 평가 기준에 대한 문제가 이 해에 들어서 급증했고 앞서 얘기했듯 이런 경향은 1860년대 나폴레옹 3세의 통치 하에서 벌어진 제 2제정의 살롱 전시 내내 이어졌다. 


장 프랑수아 밀레, <사신과 나무꾼>, 1858-1859, 코펜하겐 글립토테크 미술관.
제임스 맥닐 휘슬러, <피아노 앞에서>, 1858-1859, 테프트 박물관.
에두와르 마네, <압생트를 마시는 남자>, 1858-1859, 코펜하겐 글립토테크 미술관.
앙리 팡탱-라투르, <자화상>, 1859, 그르노블 미술관.


한편 전시 자체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도 관람객들의 반응은 이전의 그것과 사뭇 달랐는데 바로 이 점이 1859년 살롱 전시에서 논쟁의 초점이 된 두 번째 장면이었다. 당시의 평문들이나 관람객들의 짤막한 감상평은 공통적으로 59년 전시에서 몇 가지 변화의 기류를 감지하고 있었다. 그 변화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과거는 쇠퇴했으나 새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좀 더 용어를 덧붙이면 당대의 관람객들은 살롱 전시 경향에서 주류 장르이자 장르 위계에서 최상단에 위치했던 역사화의 쇠퇴와 더불어 비교적 낮은 위계를 점하고 있었던 풍경화의 성장을 목격했다. 따라서 1859년 산업궁을 찾은 관람객들은 출품작들에게서 최소한 두 가지 정도의 선택지 중 한 가지의 방향성을 찾고 싶어 했다. 그 두 가지는 바로 과거의 재창안 다시 말해 역사화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해석하거나 혹은 새로운 혁신, 다시 말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전 세대의 몰락의 징후는 너무나도 뚜렷이 드러난 반면 새로운 혁신이나 과거의 재창안은 보이지 않았다. 당대에 살롱을 찾았던 관람객들의 반응은 이러한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조각가이자 비평가였던 자카리 아스트뤽(Zacharie Astruc 1833-1907)은 "예술이 그 자신을 반복하기만 할뿐"이라고 선언했고 사진가였던 막심 뒤 캉(Maxime du Camp 1822-1894)은 1857년 이후 예술적 혁신은 1830년대 낭만주의자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그나마 1859년의 실망스러운 전시 와중에도 외젠 프로망탱, 옥타브 라리동의 작품 등에서 변화의 씨앗을 보았던 샤를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조차도 "폭발적이지도 않았고 무명의 천재도 없었다"는 다소 냉소적인 말투로 전시를 총평하고 있었다. 살롱 전시에 대한 실망은 세대교체를 앞둔 프랑스 화단의 초조함을 반영하고 있기도 했다. 이 무렵 노년의 앵그르는 1834년 살롱전에서 출품이 거부된 이후 살롱전에 출품하지 않고 있었고 그의 라이벌 격으로 불리던 들라크루아 또한 이제 생의 말년을 보내고 있는 노년의 미술가였다. 하지만 이에 반해 프랑스 전통 화단을 이끌어갈 신선한 얼굴들은 부재했다. 그나마 살롱전에서 작품을 출품한 비교적 젊은 축에 속했던 미술가들도 평단의 혹평을 들어야 했다. 후일 보수적인 미술씬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부그로나 제롬 같은 인물들도 이때의 전시에서 혹평을 면할 수는 없었다. 1850년 아카데미에서 수여할 수 있는 최고상인 로마상을 타고 프랑스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던 폴 보드리(Paul Baudry 1828-1886)의 출품작 <참회하는 막달레나>에 대한 평론가이자 라르티스트(L'Artiste)지의 편집인이었던 아르센 우세의 평은 이 시기 전도유망했던 젊은 작가들을 향한 실망감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역사화를 기대했건만 발견한 것은 갈피를 못 잡고 어리둥절해있는 탐구자였다" 


폴 보드리, <참회하는 막달레나>, 1858, 낭트 미술관.
 폴 보드리는 당대에 알렉상드르 카바넬이나 아돌프 부그로에 비해서 신화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은 부족하지만 색채나 묘사력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화가다. 신고전주의 화가이자 초상화가였던 미셸 드뢸링(Michel Drolling 1789-1851)에게서 수학했고 로마상을 수상한 이후에는 나폴레옹 3세의 궁전 벽화를 담당하기도 했다. 이 공로로 그는 에콜 드 보자르의 교수와 아카데미의 회원을 역임하였고 후일 프랑스 미술에 발전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받았다.



이때 아르센 우세가 그의 평론에서 역사화를 기대했으나 실망했다는 점은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저 짧은 문장 속에는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최소한 두 가지의 함축적 의미, 즉 프랑스 화단 내에서 장르의 위계가 붕괴되고 있거나 혹은 각각의 장르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침범당하고 있다는 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평자들은 화가들의 테크닉과 기교가 해가 갈수록 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아쉬워한 점은 그렇게 훌륭한 테크닉을 가지고서도 평범한 범작 정도의 작품밖에 만들지 못한다는 점에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범작이라고 함은 기교의 문제라기보다는 많은 부분 장르의 위계적 문제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자카리 아스트뤽이 장 제롬(Jeon Gerome 1824-1904)의 <칸다울레스 왕>을 보고 한 짧은 평은 이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단지 소형의 장르화를 거대한 프레임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비평가 폴 만츠 또한 비슷한 전시 총평 내놓았는데 이는 장르의 혼합 혹은 특정 장르의 실종 현상이 비단 제롬의 문제뿐만이 아니라 59년 전시 전체의 경향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늘날, 과거처럼 위대한 프레임은 있지만 위대한 회화는 없다"


장 레옹 제롬, <칸다울레스 왕>, 1859, 푸에르토리코 폰세 미술관.
금세공사의 아들이었던 장 제롬은 샤를 글레르(Charles Gleyre 1806-1874)의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고 이후 에콜 드 보자르에서 수학했다. 뛰어난 소묘 실력을 바탕으로 하는 관능적인 여체의 묘사와 깔끔한 마무리가 제롬 회화의 특징이었다. 또한 그는 이후 인상주의에 대척점에 서 있는 미술계 보수주의의 대표적 화가로서 자리매김한다. 이후 에콜 드 보자르 교수와 아카데미 회원을 역임했으며 프랑스 미술에 대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지리멸렬을 면치 못했던 역사화 장르와 다르게 풍경화는 상대적으로 약진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 약진이 얼마나 인상적이었으면 자카리 아스트뤽은 "풍경화가들이 지나치게 많다"라고 평했을 정도였다. 풍경화가가 1278명의 화가들 중에서 250명에 불과했음에도 말이다! 물론 아스트뤽의 이런 걱정이 결코 엄살은 아니었다. 절대적으로 그 수는 적었지만 그 면면은 도비니, 코로, 트루아용, 루소 등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풍경화의 약진이 이 시기 보수적인 비평가들과 관람객들에게 불편함을 준 것은 분명했다. 아스트뤽이 풍경화를 논하며 "그것들은 이쁘고 매력적이며 품위 있고 색으로 가득 차 있으며 훌륭하지만 끔찍하기도 하다"라고 평한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이외에도 많은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풍경화의 약진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부정적 평과 다르게 풍경화에 대한 긍정적 평을 내린 사람들도 있었다. 가령 후일 인상주의자들의 든든한 비평적 후원자가 되는 쥘 카스타냐리(Jule Castagnary 1830-1888)는 풍경화의 약진을 새로운 혁명의 징후로 바라보았다. 59년 전시 당시 고작 29살이었던 젊은 카스타냐리는 대담하게도 이렇게 썼다. "이제 (장르의) 역할은 뒤바뀌었다. 한 때 가장 낮은 위계에 속했던 풍경화는 첫 번째 자리에 들어갔고 한 때 최고의 위계에 속했던 역사화는 단지 이름만 존재하게 되었다." 이제 프랑스 미술은 그 이전에는 겪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시대로의 진입을 앞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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