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델 Oct 18. 2021

인상주의의 기원 (3)

1859년 살롱전 전시 당시 만평


다시 1859년 4월 5일 드가가 산업궁에 살롱전을 보기 위해 파리에 나타났을 때로 돌아가보자. 파리에 도착한 드가는 이전의 그와 달라져 있었다.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그의 초기 커리어에 큰 영향을 미친 한 사람을 만난 이후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드가보다 8년이나 일찍 자신의 예술적인 커리어를 시작한 구스타프 모로(Gustave Moreau 1826-1898)를 만난다. 후일 야수주의의 거두 앙리 마티스를 가르치기도 하는 모로는 프랑스의 케케묵은 예술 분류를 적용시켜보면 신고전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1830년대 화단에 낭만주의라는 혁신을 일으킨 인물들 중 하나인 테오도르 샤세리오(Théodore Chassériau, 1819-1856)의 제자였으며 그 유명한 외젠 들라크루아와도 교류가 있었던 상징주의 화가였다. 또한 그는 보들레르가 1859년의 전시에서 보았던 희망들 중 하나인 외젠 프로망탱과도 교유했었다. 드가는 구스타브 모로를 알게되며 자연스럽게 그의 주변 사람들의 작품들을 접했다. 보수적인 귀족가문(드가가 진짜 귀족 가문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이견이 있다) 태생으로 신고전주의에 익숙했던 예술가 지망생 드가에게 낭만주의 미술은 하나의 혁신이었다. 심지어 그는 신고전주의의 대표라 할만한 앵그르의 영향 하에서 예술적 꿈을 키워나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에게 모로는 베네치아 화가들이나 루벤스 뿐만 아니라 들라크루아, 샤세리오의 작품들을 소개했고 드가 또한 모로의 열정과 재능에 감탄해 그가 소개해준 작품들을 빠르게 흡수해갔다. 이 시기 드가가 쓴 글을 보면 그는 모로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이 분명했다. 


구스타브 모로, <자화상>, 1850, 구스타브 모로 국립 미술관.


 그렇기에 1859년 드가가 파리의 산업궁 도착했을 때 그는 2년 6개월 전과는 전혀 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편지에서도 이점은 잘 드러난다. 4월 5일 드가는 다른 2명의 지인과 함께 살롱전에 방문하는 데 드가와는 두 달 전 투스카니에서 만난 앙투안 쾨니스바르터와 후일 드가와도 친분이 깊어지는 외젠 라쉐리가 바로 그들이다. 전시를 다녀온 다음 날 드가는 모로에게 편지를 보낸다. 


"제 생각에 외젠 프로망탱은 이 전시의 영광을 차지할만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가 구성을 조금씩 강화하려고 할 때 마다 작품이 조금씩 무거워지는 느낌이 있습니다. 프로망탱의 작품 중에서 두 개가 걸작으로 보였습니다. 하나는 <부족민들 사이에서 저글링 하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오아시스 주변>이라는 작품입니다. 이 두 작품들과 비교해볼 때 다른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집니다." 


외젠 프로망탱, <부족민들 사이에서 저글링하는 사람>,1859, 개인소장.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드가와 함께 방문했던 지인들도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부유한 은행가의 아들이었던 쾨니스바르터는 마찬가지로 모로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번 전시는 측은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많은 화가들 중 단지 프로망탱만이 성공한 것 같습니다. 그의 다섯 작품은 꽤나 매력적이었고 그의 작품들이 분명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작곡가이자 풍경화가였던 라쉐리 또한 유사한 의견을 표출했다. 그는 누구보다 모로의 취향을 더 잘알고 있었기에 살롱전을 보기 위해 파리로 오고 싶어했던 모로에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는 편지를 작성했다.


"그(프로망탱)는 살롱에 멋진 모래폭풍(프로망탱의 작품 중에는 북아프리카, 중동을 배경으로 한 오리엔탈리즘을 소재로 한 것이 많았다)을 날렸습니다. 이 장르에서 그는 그 자신의 성취를 뛰어넘어 발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2-3작품 정도가 정말로 뛰어났습니다. ...(중략)... 만약 20개 남짓의 작품들을 보기 위해 이곳에 오신다면 저속한 예술가 무리들로 인해 로마를 떠나 파리로 온 것을 후회하게 되실겁니다."


구스타브 모로, <외젠 샤세리의 초상>, 1852, 시카고 아트 인스튜티트.


특히 라쉐리의 편지는 초기 드가가 누구의 영향을 받았는지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뿐만 아니라 인상주의의 초기 경향이 누구의 영향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비록 드가가 인상주의 그룹의 대표적인 기법이라 여겨지는 플렝-에르 화법과는 거리가 있었던 화가였지만 그룹 내에서 핵심 인물인 것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라쉐리는 다른 두 명의 편지와 비교했을 때 살롱에 관한 꽤 광범위한 평을 남겼는데 그 중에서 드가와 벌였다는 가벼운 논쟁이 인상적이다.


"살롱 전시에 전시된 작품들의 인상들 대해서 우리는 항상 의견을 같이 했지만 오직 하나만은 꽤나 차이를 보였는데 바로 들라크루아의 몇몇 작품들에서 그러하였습니다. 고백컨데 저는 드가가 <스키티아인들과 함께 있는 오비디우스>를 인상적으로 평가한 것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 올해 들라크루아는 단지 평범한 작품들만을 보여줬을 뿐입니다."


외젠 들라크루아, <스키타이인과 함께 있는 오비디우스>, 1859, 런던 내셔널 갤러리.


당대에 유명했던 들라크루아에 대한 라쉐리의 혹평은 사실 이례적인 것은아니었다. 모로와 교류했던 사람들 중 한 명인 에일리 레비 또한 비슷한 의견을 피력한 바 있기 때문이다. 1859년 5월 27일 모로에게 작성된 편지에서 레비는 다른 세 명과 마찬가지로 "프로망탱이 살롱에서 성공을 거두었음"을 알리는과 동시에 들라크루아를 언급하며 그의 작품들이 "끔찍하게 못생겼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는 평을 남긴다. 


이상의 편지들은 드가가 초기에 영향을 받았던 모로 중심의 인물들이 1859년의 전시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보여준다. 즉, 그들은 프로망탱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들라크루아에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을 냈다며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였지만 독특하게도 드가만큼은 그를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이점은 이후 드가가 인상주의자들 내에서도 역사화에 대한 미련을 놓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비록 인상주의 운동은 역사화를 사장시켰지만 드가 개인으로만 한정하면 그는 역사화를 말년까지도 중요한 장르 중 하나로서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상주의 그룹의 초기 역사에서 역사화를 이렇게까지 진지한 장르로 꾸준히 연구했던 사람은 마네(비록 그는 역사화가라는 표현을 모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인상주의와 관련된 인물들 중 누구보다 역사화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 드가, 세잔뿐이었다. 특히 세 명의 인물 중 세잔이 역사화 장르를 진지하게 연구했다는 점은 역사화 장르가 현대 예술에 기여한 바를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한편 인상주의의 또 다른 축으로서 아직까지는 지방화가에 머무르고 있었던 모네 또한 1859년의 전시를 관람하고 간단한 평을 남겼다. 6월 3일 그는 자신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부댕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 전시를 "몇 번에 걸쳐 관람했다"는 것을 알린 뒤 출품 작가들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다. 드가를 제외하면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들라크루아에 대해서는 "미완성의 작품이지만 여전히 활기가 넘쳤다"고 평했고 장 하몽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색과 소묘가 없는 끔찍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상징적이게도 모네는 이 두 명의 인물을 제외하면 모두 풍경화가들이나 정물화가들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논한 풍경화가나 정물화가는 모로가 프로망탱의 지인이었던 것처럼 스승 부댕의 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가 언급한 많은 인물들 중 모네는 특히 콩스탕 트루아용의 작품에 깊은 감명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출품작 <농장으로의 귀환>을 평하면서 "웅장한 하늘과 소와 개의 묘사가 매우 아름다운 멋진 작품"이라고 평했고 <시장가는 길>에 대해서는 최고의 작품이며 무엇보다 빛으로 가득 차 있다고 극찬했다. 이외에도 모네는 트루아용의 몇몇 작품들에 대해서도 일관되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콩스탕 트루아용만큼이나 그에게 감명을 준 또 다른 화가는 동일한 경향의 풍경,동물화가였던 샤를 도비니였다. 특히 <칼바도스>는 그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던 모양이다. 5월 19일 그는 이 작품을 언급하며 "정말로 훌륭하고 (그가 묘사한) 옹플뢰르 풍경은 숭고하기까지 하다"라고 썼을 정도였다. 그리고 약 2주 뒤 그는 스승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도 마찬가지로 샤를 도비니를 언급한다. "스승님께서 샤를 도비니의 작품을 보지 못한 것은 큰 불행입니다." 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샤를 도비니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특히 각별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1860년대 그가 그렸던 바다 풍경화의 일부는 샤를 도비니의 <칼바도스>에서 그 형식적 모티프를 찾을 수 있을 정도다. 


콩스탕 트루아용, <시장 가는 길>, 1859, 에르미타주 미술관.
 도자기 화공의 아들로 태어난 콩스탕 트루아용은 드니스 리오크르(Denis Riocreux 1791-1872)에게서 유화 기법을 사사받고 이후 살롱에서 최고상을 수상한다. 네덜란드 여행 와중에 렘브란트와 네덜란드 풍경화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이 영향으로 이후에는 동물풍경화를 주로 그리게 된다. 1848년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샤를 도비니, <칼바도스>, 1859, 마르세유 국립 미술관.
 화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낭만주의 역사화가인 폴 들라로슈(Paul Delaroche 1797-1856)에게 사사받았다. 스승의 영향으로 초기에는 역사화가로 활동했으나 이후 외광파 기법을 중심으로 한 풍경화가로 전향하게된다. 그의 작품들은 클로드 모네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프랑스 미술에 대한 공로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는다.


후일 인상주의를 이끌게 되는 화가들의 살롱 전시평에서도 알 수 있듯. 1859년의 변화는 그 성격으로 보았을 때 인상주의 등장의 전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당시 살롱에서 주목을 받았던 작품들은 이전에 그려졌던 고전적 풍경화가 아닌 지금 이 시대의 자연을 그린 풍경화였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반영하는 풍경화의 등장은 자연스럽게 동시대의 생활, 동시대의 문화를 반영하는 작품의 다리 역할을 했다. 더군다나 1859년의 살롱전은 대다수의 젊은 화가들이 경험했던 첫 번째 살롱 전시이기도 했다. 마네, 모네, 드가, 피사로, 라투르 그리고 휘슬러까지 23세에서 29세 사이에 막 화가의 커리어를 시작하려고 하는 다양한 젊은 화가들이 이 전시를 관람했거나 작품을 출품했다. 그리고 이들은 그곳에서 기존 예술 체계의 붕괴, 심사위원의 이해할 수 없는 심사 기준과 그에 따른 화가들의 반발, 최고의 취급을 받았던 역사화의 몰락과 가장 낮은 취급을 받았던 풍경화의 약진을 목격했다. 요컨대 그들은 흔히 이야기하듯 "첫 번째 반항자"는 아니었다. 그들은 선대 화가들이 잘 닦아놓은 토대 위에 자신의 혁신을 얹어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혁신은 다름 아닌 그들의 20대, 막 커리어를 시작할 때 벌어진 프랑스 예술계의 소동과 반항이 마치 나비효과마냥 소용돌이 치며 돌아온 것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인상주의의 기원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