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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Oct 18. 2021

인상주의의 기원 (4)

역사화는 죽었다 풍경화 만세! 1859년 살롱 전시의 변화를 보고 들은 많은 사람들은 머리 속에서 이 말을 떠올렸을 것이다. 이제 대세가 바뀌었음이 아니 적어도 기존의 질서가 무위로 돌아가고 있음이 확실해졌다.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아직도 부활한 역사화나 차세대 보수주의자들을 애타고 찾고 있었지만 권위와 위계에 얼어붙은 회화의 장벽은 이제 해빙의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훗날 1867년 앵그르가 어처구니 없는 원인으로 사망하자 이런 분위기는 마치 역사의 당연한 방향으로 보일 정도였다. 보수적인 미술을 옹호했던 사람들과 기관들은 일제히 그의 부고 기사를 쓰며 위대한 화가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지만 이 추모 열기가 변화의 물결을 막지 못했음은 이미 여러 해 전에 증명된 바가 있었다. 또한 앵그르가 죽기 불과 2년 전 진보적인 평론가들에게조차 논란거리가 되었던 작품 <올랭피아>가 발표되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죽음은 어쩌면 개인의 죽음이라기 보단 한 시대의 죽음에 가까워 보였다. 1859년의 전시는 17세기 이후 공고하게 유지되던 전통적 서열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러한 변화가 놀라웠던 것은 고전주의가 가지는 특유의 생명력과도 관련이 있었다. 르네상스 이후 고전주의는 몇 번의 도전을 겪어왔다. 당장 가까운 18세기만 해도 19세기 중반의 미술상황과 비슷한 예술적 도전이 고전주의를 위협했는데 평론의 영역에서는 디드로와 같은 인물들이, 양식의 영역에서는 로코코 미술이 제기한 위협이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위협의 근원을 파고 들어가면 결국 고전주의 그 자체에 대한 위협이라기보다는 그것이 다루고 있는 소재나 주제에 대한 위협으로 한정된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19세기를 맞이한 고전주의는 이제 그 존재 자체가 부정당할 위기에 놓기에 되었다. 후일 미술사학자인 마이어 샤피로는 19세기 고전주의가 쇠퇴하다 끝내 주류에서 밀려난 것은 이 시기의 변화된 정치, 경제적 상황(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표현을 빌려 쓰면 이중 혁명 이후의 상황)에 기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의견의 타당성을 떠나 그가 전제하고 있는 것, 즉 19세기의 고전주의와 그 이전의 고전주의가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 속에서 각기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는 것은 역사적 흐름으로만 따져보면 사실이었다.  "놀랍게도 스튜디오에서의 작업 활동은 비평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주의자였던 테오필 토레의 짧은 문장은 보수적 비평가, 심사위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급진적' 화가들에 대한 당혹감을 보여주는 듯 하다. 기존에 미술계에서 주류로 인정 받던 인물들은 이제 그들의 통제력이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 개인 혹은 기관이 어찌 해볼 수 없는 거대한 사회적 변화의 물결 속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앙드레 질, <에드몽 아부>, 1867, 트리아농 궁.


 이제 풍경화는 이전 세기에 받던 찬밥 신세에서 벗어나 전례 없는 영광을 누릴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광을 향한 길이 깔끔하게 열린 것은 아니었다. 사실 풍경화가 미술계에서 주목 받기 시작한 이후 이 장르에 대한 논쟁은 59년 전시 다음해인 1860년부터 10년 넘게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시기는 다소 이르지만 1855년에 작성한 에드몽 아부(Edmond About, 1828-1885)의 글은 풍경화에 대한 논쟁의 초점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 누구도 그들의 독창성을 희생하지도 않았다 그 누구도 타인을 모방하지 않았다. 하지만 50에서 60명 정도의 동일한 재능을 가진 예술가들이 그들의 장비를 가지고 야외에서 그림을 그려온 후 파리에서 그것을 모아보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기 전 아무것도 서로 합의한것이 없고 서로 대화를 나누어본 적이 없음에도 말이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는 문자 그대로 모든 대상을 그대로 옮겨 그렸다. 우리는 모든 구성적인 욕구를 자제했고 인위적으로 나무와 산을 옮겨 그리지도 않았다.'"


 에드몽 아부의 글은 앞으로의 풍경화 논쟁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몇 가지 핵심 주제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의 풍경을 그릴 것인가 혹은 자연으로부터 받은 감정을 표현할 것인가, 선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회화적으로 표현할 것인가, 화실에서 작품을 마무리 할 것인가 아니면 현장에서 모든 것을 끝낼 것인가, 그리고 이 모든 질문들을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하나의 질문, 풍경 그림에서 인간의 주관성은 어느 정도 들어가야 하는 것인가라는 문제를 내포한다.


샤를 보들레르(Charles Pierre Baudelaire, 1821-1867)


 풍경화가들이 단일 대오가 아닌 각기 다른 경향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사실 풍경화가들은 이미 자신 나름의 생각에 따라서 일찌감치 특정 경향의 스타일로 작업을 지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에 나름의 분류표를 달아주고 그것을 디딤돌 삼아 풍경화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을 벌어진 것은 평론가 내지 언론의 글에서 힘입은 바가 컸다. 그들은 크게 고전적 풍경화, 자연주의, 사실주의 등으로 풍경화파를 구분했다. 다만 오늘날 많은 대중이 그렇듯이 당대의 대중들, 심지어 비평가들도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마치 동의어처럼 쓰는 경우가 많았고 설사 구분하더라도 소재, 즉 숲을 그렸는가 바다를 그렸는가 따위의 단순한 방식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당대에 풍경화는 크게 고전적 풍경화와 혁신적 풍경화로 구분될 수 있을 것이다. 양식에 따른 구분 이외에도 어떤 이들은 매체를 통한 구분을 시도 하기도 했는데 새로운 발명품이었던 사진 풍경화와 전통적 매체인 회화 작품이 그것이었다. 이 구분에서 평론가들은 사진 풍경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사진이 의미나 정서를 퇴색시키고 단지 "껍데기"만을 다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이러한 분류 하에서 평론가들은 대체적으로 고전적 풍경화라 불리는 것들이 쇠퇴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고전적 풍경화는 도도새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자연주의나 사실주의 풍경화에 대해서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천차만별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현대 생활의 화가>라는 글로 널리 알려진 보들레르는 사실주의, 자연주의 화풍의 옹호자였다. 그는 평론가로 데뷔한 45년 살롱 전시평부터 마지막 살롱전 평론이 된 59년 전시평까지 면면만 바뀌었을뿐 동일하게 자연주의, 사실주의 풍경화가들을 옹호했다. 하지만 보수적 예술가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풍경화가 장르 위계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점을 꾸준히 상기시키려 애썼다. 샤를 블랑(Charles Blanc, 1813-1882) 같은 유명한 보수주의 비평가는 자연주의, 사실주의 풍경화를 "형편없는 기교의 가치 없는 작품"으로 몰아세웠다. 풍경화에 대한 양 극단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두 사람과 달리 대다수의 비평가들의 입장은 거의 중립에 가까웠다. 많은 비평가들은 새로 등장한 풍경화가들이 프랑스 화단에 불어넣은 성취와 활력에 대해서는 인정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부적절한 테크닉과 조악한 구성이 작품의 질을 떨어트린다고 생각했다.


요한 베르톨트 용킨트, <옹플뢰르 항>, 1865, 메트로플리탄 미술관.


 이러한 논쟁 와중에 평론가들은 1859년의 살롱전 이후 크게 세 명의 화가를 주목했는데 카미유 코로, 테오도르 루소, 샤를 도비니가 그들이었다. 이중에서 카미유 코로와 테오도르 루소는 이미 1845년부터 나름 인정을 받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세 명은 공교롭게도 오늘날 바르비종 화파로 분류되는 화가들인데 그것은 이 화파가 인상주의에 미친 영향력을 말해주고 있는듯 하다. 여담이지만 1859년 모네가 인상깊게 보았다고 기록한 트루아용 또한 바르비종 화파로 분류되는 풍경화가였다. 바르비종 풍경화파는 퐁텐블로 숲 인근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사생에 몰두했던 자연주의 유파 중 하나로 공통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상을 정확히 표현하는데 몰두했다. 물론 그것이 보수적인 비평가들의 지적했 듯 회화를 박제된 미라처럼 만들겠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정확한 묘사에 더해 바르비종 유파의 화가들은 평범한 숲, 초원의 이미지에 역사화에서나 느낄 수 있을 법한 서정성을 부여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이러한 서정성을 어느정도까지 부여할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각 화가들은 스타일의 차이를 보이게 된다. 막 화가의 길을 걸으려고 했던 인상주의 화가들은 이즈음 자신의 길을 선택해야 했다. 즉, 59년이후 주류로 발돋움하는 풍경화가 중 누구의 화풍을 보며 자신의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각자 자신에게 맞는 길을 택했다. 바지유, 시슬레, 르느와르, 모리조는 카미유 코로의 양식을 기본으로 하여 테오도르 루소의 양식을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피사로의 경우 코로와 도비니의 영향을 결합한 일련의 풍경화들을 제작한다. 독특한 것은 모네였는데 그는 처음에는 직접적으로 바르비종 화파를 따르지 않고 그의 스승이었던 부댕과 또 다른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Johan Barthold Jongkind, 1819-1891)의 양식을 학습했다. 용킨트는 네덜란드 출신의 풍경화가였는데 오늘날 그의 이름이 생소하게 들리는 것처럼 당대 프랑스 화단에도 무명의 인물이었던것 같다. 이는 모네가 그의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을 때 평론가들이 그의 작품을 용킨트의 영향이 아닌 쿠르베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모네는 그의 초기 커리어를 다지는 과정에서 평론가들에게 <인상: 해돋이>로 대표되는 반항적이고 혁신적 이미지의 화가라기 보다는 해양화가로 많이 알려졌었다. 그런 연유로 평론가들이 모네의 작품을 보고 숲을 소재로한 바르비종 화파의 영향력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평론가들이 사실주의자인 쿠르베에게서 모네 작품의 뿌리를 찾고자 시도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이유였다. 실제 그의 작품들에서 바르비종 화파의 영향이 나타나는 것은 샤를 글레르의 화실로 들어가 젊은 작가들을 만나게된 이후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바지유, 시슬레, 르느와르 등을 만나는데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서양미술사 전체의 궤적에 있어서도 이들의 만남은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앞서 말했듯 젊은 작가들은 1860년대 본인의 화풍을 찾기 위해 선대 화가들의 업적을 탐구했는데 글레르의 화실에 들어간 이후 모네 또한 동료들의 영향을 받아 바르비종 화파의 방법들을 탐구했기 때문이다. 


 글레르의 화실에서 만난 동료들은 얼마 안있어 바르비종 화파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퐁텐블로 숲 인근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그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이 지역은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었다. 유럽, 미국의 많은 화가들과 관광객들이 코로, 밀레, 루소가 묘사했던 경관을 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고 지역은 관광업으로 활황을 맞았다. 살롱에 걸렸던 풍경화가들의 작품은 관광 가이드북에 값싸게 인쇄되어 관광객들의 순례 코스의 참고 자료쯤으로 활용되고 있었고 그림 속에서 묘사된 숲, 강, 마을은 잘 닦여진 포장도로와 표지판으로 채워져 있었다. 당연하게도 이곳의 원주민이라고 할 수 있는 바르비종 화파의 화가들은 변화가 반갑지 않았다. 그들이 평범해보이는 자연에서 역사화의 서정성을 부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지역이 가지는 특유의 때 묻지 않은 원시성 때문이었다. 개발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순수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그들에게 작품 활동의 영감을 주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추구했던 그림이 유명세를 타자 자신들의 미적 기반이었던 퐁텐블로 지역은 근대 관광지로 개조되기 시작했다. 사회 변화로 인해 고전주의가 그 특유의 생명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미술사학자 마이어 샤피로의 말은 사실 혁신적인 풍경화가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국가 단위의 도로망 건설과 기술 발전으로 인한 교통 수단의 진보, 중산층의 성장과 그들의 문화적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레저, 관광의 발달은 자연주의 풍경화를 발전시킴과 동시에 그들의 뿌리를 더럽히고 있었다.   


 따라서 1860년대 퐁텐블로 숲을 찾은 젊은 화가들은 그 이전 세대 화가들이 느꼈던 것과 매우 다른 방식으로 숲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실제 그들은 이곳에서의 사생을 통해 바르비종 인근 지역이 자연주의 풍경 그림에서 보았던 그곳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바르비종은 때묻지 않은 자연이 아닌 관광지의 대명사로 변했다. 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와 관리가 안되는 허름한 마을은 이제 옛말이 되어버렸다. 미래의 인상주의자들은 관광지가 되어버린 퐁텐블로 숲에서 바르비종 화파가 담고자 했던 "서정성"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때 그들이 갈 수 있는 방향은 하나뿐이었다. 서정성을 포기하고 대상의 객관적인 묘사로 선회하는 것이다. 이 점이 인상주의가 자연주의 풍경화의 울타리를 넘어 새로운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또 다른 분기점 중 하나였다. 이제 그들은 "무엇을" 그릴 것이냐를 두고 씨름하지 않았다. 이제 그들은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인상주의자들이 현대예술의 시작으로 평가받는 것은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를 신화, 성경, 역사의 전거를 빌리지 않고 고민했던 최초의 집단이기 때문이었다.


클로드 모네, <느티나무, 퐁텐블로 숲>, 1865,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모네의 작품 <느티나무, 퐁텐블로 숲>은 그런 변화의 일면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평범한 소재를 역사화마냥 거대한 캔버스(96.2 x 126.2cm)에 담았다는 점에서 이전 화가들의 유산을 물려받았다. 현장 사생을 통해 결과물을 얻었다는 점에서도 선배 화가들의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바르비종 화가들이 그랬듯 더 이상 대상에게서 서정성을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바르비종 화파의 화가들은 평범한 나무나 숲의 모습을 통해 일종의 숭고함을 찾으려고 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대상"을 근간으로 하여 감정을 이끌어내려고 했다는 점이다. 즉, 그들은 나무, 강, 숲, 꽃 등 특정 소재를 통해 감정을 도출해내려고 하였다. 하지만 모네의 이 작품에서 얼룩이 진것마냥 묘사된 나무는 빛, 색깔, 질감 등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이지 서정성을 부여하기 위한 소재가 아니다. 즉, 모네의 작품은 보다 형식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는 빛이 대상을 투영한 이후 반사되어 나와 망막에 맺히는 바로 그 순간을 포착하고자 노력했다는 것이다.


귀스타브 르 그레이, <퐁텐블로 숲>, 1851, 개인소장.


 주관이 배제된 순수한 눈으로 대상을 그리려 했다는 것은 자연스럽게 이를 기계적으로 구현한 사진이라는 매체를 떠올리게 한다. 실제 인상주의자들이 사진에 대해 깊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화폭에 담아내려고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이 시기도 마찬가지였다. 모네의 그림은 동시기 퐁텐블로 숲에서 사진 작업을 진행했던 칼로타입 사진가들, 귀스타브 르 그레이(Gustave Le Gray, 1820-1884)나 앙리 르 섹(Henry Le Secq, 1818-1882)과 유사한 점이 많다. 특히 이중에서 귀스타브 르 그레이는 사진가이지만 화가 교육을 받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할만 하다. 그는 예술가로서 발을 들이기 전 폴 들라로슈의 스튜디오에서 배웠고 나중에는 모네가 다녔던 샤를 글레르의 화실에서도 수학했다. 그는 또한 코로, 루소 등의 자연주의 풍경화가들의 작품을 알고 있었고 심지어 모네의 작품도 알고 있었다. 물론 이것이 모네 또한 르 그레이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모네 자신이 객관적인 시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진과 같은 방법을 시도했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1840년대 이후 사진을 예술적 방법으로 탐구하려는 화가들이 속속 등장했기 때문에 모네가 르 그레이의 작품은 아니더라도 칼로타입의 사진 몇 장 정도는 보았을 가능성이 있다. 모네의 회화 작품과 르 그레이의 사진 작품의 유사성은 비슷한 소재를 사용한 각각의 작품을 1:1로 비교하면 더욱 뚜렷히 드러난다. 특히 주목할 것은 빛의 사용인데 나뭇잎을 통과한 이후 바닥에 투영된 빛의 표현은 이전 화가들에게선 보기 드문 것이었다. 


샤를 도비니, <보니에흐 인근 마을>, 1861, 개인소장. // 카미유 피사로, <마른 강둑의 셰브니에흐>, 1864-1865, 에딘버러 국립 미술관.
카미유 피사로, <겨울의 마른 강둑>, 1866, 시카오 아트 인스티튜트.


 서정성을 배제하고 보다 더 사실적인 묘사로 나아가는 것은 공교롭게도 모네뿐만이 아니라 시기 젊은 인상주의 작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안이었다. 그와 같이 수학했던 바지유, 시슬레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감지된다. 1860년대 샤를 도비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카미유 피사로 또한 이런 변화가 보인다. 그는 이미 1859년 살롱전에 출품한 적이 있을 정도로 인상주의 동료들 중에서는 커리어가 빠른 편에 속했다. 물론 그의 작품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자카리 아스트뤽이 그가 그린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을 묘사하며 "훌륭하다"라는 한 줄 평을 남긴게 그가 받았던 평가의 전부였다.(당연하게도 아스트뤽은 피사로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1860년대 피사로가 샤를 도비니의 회화를 보고 자신의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는 점은 이후 젊은 인상주의자들이 경험하게 되는 짧은 승리를 예고하는듯 하다. 샤를 도비니는 이미 보들레르로부터 위대한 사실주의 풍경화가라는 칭호를 받은 바 있다. 그 뒤 인상주의의 옹호자가 되는 에밀 졸라로부터는 "자연 그대로를 떼어내어 액자에 박아 넣은 작품"이라는 찬사를 들은 바가 있었다. 그러니 자연의 객관적 묘사를 추구하려 했던 피사로에게 샤를 도비니의 양식을 학습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해 보였다. 1860년대 초반 그들 화풍의 유사성은 강가의 마을이라는 동일한 소재를 그린 두 작품에서 드러난다. 샤를 도비니는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상대적으로 어두운 색조를 선호했는데 이것은 그가 바르비종 화가들이 부여하고자 했던 "서정성"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피사로가 1865년에 그린 작품은 구도가 비슷할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가 두드러진다. 하지만 피사로는 결코 선배 화가를 맹목적으로 따라가지 않았다. 다음 해 그린 <겨울의 마른강>에서 그런 의지가 나타난다. 이 그림은 이전에 피사로가 그린 그림들보다 훨씬 밝다. 모네와 그의 친구들처럼 피사로도 이제 바르비종 화파가 추구했던 서정성을 버리고 눈에 보이는 회화 그 자체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1866년경부터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한 것은 이 변화를 반영하는 예이다. 당대의 많은 평론가들은 팔레트 나이프의 사용을 으레 쿠르베의 유산으로 여겼다. 쿠르베가 매끈한 표면을 중시하는 아카데미 중심의 보수적 화가들에 반발해 팔레트 나이프로 거친 질감을 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사로와 쿠르베는 도구의 사용 방법에 있어서 차이를 보였다. 쿠르베의 경우 팔레트 나이프를 두 색을 혼합한 비교적 어두운 색을 칠할 때 사용했다. 하지만 피사로의 경우 어떠한 색의 혼합 과정도 거치지 않고 원색 그 자체를 팔레트 나이프로 칠했다. 피사로에게 팔레트 나이프는 빠르게 그리기 위한 과정으로서 사용되는 도구였다. 그리고 이것은 모네와 마찬가지로 형상이 망막에 맺히는 바로 그 순간을 재빠르게 포착하여 화폭에 그려내겠다는 의지의 반영이었다.  


카미유 피사로, <잘레 언덕>, 186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잘레 언덕> 세부(좌상단).


 1860년대 젊은 화가들의 화풍 변화는 다가올 1870년대 그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미술계의 파열을 예고한다. 이제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포착할 것인가의 문제가 화가들 사이에서 중요 문제로 떠올랐고 그것을 빛과 대기의 표현이라는 급진적 방향으로 구현한 인물들을 인상주의자라고 부르게 될 터였다. 보수적인 평론가들은 1859년 몇몇 작품들을 보며 마무리가 형편없다고 불만을 토로했지만 그러한 것이 1870년대 등장할 충격적인 스케치풍 그림에 비교할 때 완성도 있는 작품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날이 머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파열 이전에 잠깐의 승리가 있었다는 점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쥘 카스타냐리가 "젊은 화가들의 승리"라는 한 마디로 요약했던 1868년 살롱전이 그것으로 이 전시에서 후일 인상주의 그룹으로 분류되는 많은 화가들이 입선에 성공했다. 물론 이것은 샤를 도비니 같은 화가가 심사위원으로 선정된 파격적인 변화에 힘입은 바도 컸다. 실제 인상주의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이 잠깐의 승리를 언급하는 것은 운동을 다각도로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왜냐하면 후일 제 1회 인상주의 전시에서 몇몇 평론가들이 보였던 태도는 일정부분 이 시기 젊은 화가들의 약진에 대한 기억이 반영된 것이기 때문이다.


기억에 의거한 평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제 1회 인상주의를 관람했던 평론가, 관객들은 작품을 보며 1868년과 1874년 사이에 있었던 프랑스의 비극적인 정치사를 떠올렸다.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은 1874년 인상주의자들의 전시를 보며 지난날 짧은 승리를 경험한 젊은이들처럼 제정 시대의 영광을 떠올렸을 것이다. 또 어떤 이는 그들의 파격적 작품을 보면서 과거의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고자 하는 어떤 열기를 발견했을 수도 있다. 아쉽게도 당시 관람객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작품을 보았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글이 다루고자 하는 시기를 넘어선다. 다만 보불전쟁, 파리 코뮌, 공화정으로의 교체 같은 정치, 사회적 사건이 결코 인상주의의 평가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기억하자. 실제 많은 학자들은 1870년을 전후로 하는 정치적 변화와 인상주의에 대한 당대의 평가 사이에 매우 긴밀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밝혀냈다. 하지만 이 글은 일단 1870-1871년의 정치적 변화 이전에 이미 풍경화가 역사화를 제치고 일정부분 승리를 거두었고 그것을 발판으로 인상주의가 등장했다는 점을 설명하는것으로 만족하려고 한다. 더군다나 보불전쟁을 언급하기 이전에 아직 이 사조의 기원에 관해 언급해야 할 두 가지 요소가 더 존재한다. 이 둘은 사실 자연주의, 사실주의 풍경화의 약진이라는 현상에 비해서는 아주 부차적인 요소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빼먹고 갈 수는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그것은 일본 우키요에의 영향과 소멸되어가고 있던 역사화의 영향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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