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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Oct 20. 2021

인상주의의 기원 (5)

안도 히로시게, <나루토의 소용돌이>, 1855, 로닌 갤러리.


회화 분야에서 1828년에는 그리스인들과 터키인들의 물결이 있었다. 1840년에는 브르타뉴인들이 넘쳐흘렀고 그와 동시에 1850년까지 알제리의 군대와 싸워야 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일본인들의 침공을 받고 있다.


 

사실주의 운동 이론가이자 언론인이었던 샹플뢰리(Champfleury, 1821-1889)는 1868년 11월 프랑스 화단의 전체적인 작품 경향을 비유적으로 평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평은 정확했다. 항로가 전지구적 단위로 열린 이후 유럽 사회에 주기적으로 찾아왔던 미지의 세계에 대한 문화적 유행이 19세기 중반 프랑스 미술계에는 일본 미술의 유행이라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1870년, 프랑스가 새로운 맞이하기 전까지 마네, 모네, 시슬레, 바지유, 피사로 등은 다른 여러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자포니즘이라는 일본 문화에 대한 열기에 들떠있었다. 그들은 파리에 위치한 동양미술 수입품점에서 각종 작품들을 모았고 그 종류는 호쿠사이나 히로시게의 채색목판화부터  도자기, 금속공예품, 칠기제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일본 회화에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찌보면 모순으로 들릴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대상의 정확한 표현을 강조하는 사실주의 풍경화의 전통에 기댄 인상주의자들이 반자연주의적이고 표현적인 측면을 강조한 일본 채색 목판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상극인 두 회화 경향을 융합했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동시대 유럽에 등장했던 회화 사조들 중에서 일본 회화의 영향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인상주의 회화들이다. 이는 인상주의자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객관적인 대상의 묘사가 결국에는 개인의 주관적인 표현 문제로 귀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후일 1880년대에 이르러 인상주의 회화를 "지나치게 감상적이다"라고 비난했던 평론가가 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또한 그들이 7번에 걸친 독립전 끝에 뿔뿔히 흩어져 자신의 화풍을 개척해 나갔던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풍경화가 논쟁의 대상이 되었을 때 에드몽 아부가 "서로 합의하지 않고 말도 안했음에도 똑같은 회화를 그려온다"고 말했던 것은 인상주의 작가들에게 해당되는 사안은 아니었던 것이다. 인상주의가 추구하고자 했던 대상이 망막에 맺히는 순간을 포착한 회화는 이론적으로는 그럴듯할지 몰라도 과학적으로는 불가능했다.(심지어 오늘날 사진도 이러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결국 인상주의 회화에서 남은 것은 절대적인 객관성이 아닌 그것을 구현해내려는 노력이 만들어낸 주관적 "효과"들이었다. 


에두와르 마네, <키어사지 호와 앨라배마 호의 해전>, 1864, 필라델피아미술관. // 에두와르 마네, <볼로뉴의 키어사지 호>, 1864, 개인소장.


 혁신적 화가들이 전적으로 효과를 구현하려 했던 화가들이라는 점에서 일본 회화의 영향은 다른 어떤 사조들보다 훨씬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인상주의자들은 그 이전의 낭만주의자들이나 신고전주의자들처럼 동양 미술을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품으로 사용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이 일본 미술에서 발견했던 것은 소재의 생경함뿐만 아니라 대상을 표현할 때 사용했던 형식적인 측면에 있었다. 이 점은 특히 마네와 휘슬러의 1860년대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864년과 1865년 마네는 일련의 해양 풍경화 작품을 완성한다. 남북 전쟁 와중에 셸부르 항 인근에서 벌어진 해전을 소재로 한 마네의 작품에는 분명히 일본 미술의 영향이 짙게 베어있다. 높은 수평선, 비대칭 구성과 채도가 높은 색채의 사용은 <올랭피아>, <풀밭 위의 점심> 등에서 보여주었던 다소 어둡고 유럽 전통 미술의 도상적 근거에 기댄 작품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그가 해전을 직접 목격하고 그린게 아닌 신문 기사를 통해 접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일본화가들이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해 자연을 단순화한 것처럼 마네는 남군과 북군의 격렬한 해전을 대부분 상상에 의존해 그렸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인상주의와 직간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는 화가들이 소재보다는 효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점이 나타난다.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현대성은 분명 인상주의를 관통하는 중요한 화두였다. 하지만 몇번이고 강조해도 모자라지 않는 것은 그들이 소재만큼이나 회화 고유의 특성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각적 효과를 화폭에 드러내는데 관심이 많았다는 것이다. 회화가 자기 자신을 탐구하려 할 때만이 모더니즘이 된다는 20세기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말은 이미 회화에서 19세기에 그 씨앗을 틔우고 있었다.


 일련의 해양화를 그렸던 마네와 마찬가지로 휘슬러 또한 트루빌에 머물면서 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해양화들을 제작했다. 특히 그는 일본 문물을 수집하는데 열심이었던 것 같다. 샹플뢰리가 쓴 또 다른 글에 이 점이 잘 드러난다. 


"이 미국인의 스튜디오는 런던에 있지만 일본 수입품점에서 더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영국으로 각종 가구들을 실어 나르는 현지 수입상과 같았다....(중략)...  작품들에서 나타나는 색채가 두드러질 정도로 새로웠기 때문에 살롱전 심사위원들은 그의 작품을 통과시킬 수 없었다. 낙선전에서 그의  작품을 본다면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휘슬러, <하얀 옷을 입은 소녀>, 1862, 워싱턴 내셔널 갤러리. // 제임스 휘슬러, <보라와 금색의 광상곡>, 1864, 프리어 미술관.
제임스 휘슬러, <은빛 바다>, 1865, 시카고 아트 인스튜티트.


 샹플뢰리의 평은 1864년 낙선전에 전시된 휘슬러의 작품 <하얀 옷을 입은 소녀>를 보고 쓴 평이었다. 샹플뢰리는 이 인물화를 통해서 일본 미술의 영향을 읽어낸듯 하지만 사실 휘슬러의 인물화에서 일본화의 영향은 모모야마 시대 장벽화를 오마주한 <보라와 금색의 광상곡>이라는 독특한 예외를 제외하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는 않는다.(물론 이것은 휘슬러의 일본 미술 수집 욕구에 비해 두드러지지 않다는 말이다.) 일본 미술이 휘슬러에게 미친 영향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마네와 마찬가지로 그가 그렸던 해양화를 주목해서 봐야한다. 휘슬러의 1865년 작품 <은빛 바다>는 얼핏보면 마네의 해양화와 유사해 보인다. 영국 해협 어딘가를 그린 이 작품은 비교적 낮은 채도를 사용했다는 점을 인지하지 못하면 마네의 영향을 받은 작품으로 보일 정도다. 하지만 높은 수평선은 <은빛 바다>가 일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암시한다. 더군다나 화면의 2/3를 채우고 있는 바다는 단일한 색조로 채워져 있어 원근법에 기인한 공간감을 연출한다기 보다는 평면에 가까워 보인다. 이것은 마네의 해양화와 휘슬러의 해양화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당연하게도 일본 목판화의 영향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당대의 많은 비평가들 심지어 그 이후에 인상주의를 미술사의 맥락에서 연구하는 사람들까지도 이 시기 두 사람의 해양화를 일본화의 맥락에서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가령 1867년 개인전에서 마네의 작품들이 공개되었을 때 많은 비평가들은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일본 미술의 "형식적" 특징을 발견하지 못했다. 물론 테오필 뒤레 같은 소수의 비평가들이 마네의 해양화에서 일본 채색목판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높은 채도를 읽어낸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렇게 형식적 변화를 감지한 비평가들도 이를 단지 유럽 전통 미술의 영향, 가령 네덜란드 풍경화 전통의 영향이라 보았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60년대 그렸던 회화 작품을 온전히 독해하는데 실패했던 것이다. 이후 20세기 중반 영미권에서 인상주의 연구가 본격적 궤도에 오른 직후에도 학자들은 이 시기 해양화의 연원을 일본화가 아닌 팔레트 나이프를 활용한 쿠르베의 해양화에서 찾았다. 비록 몇몇 선구적 연구에서 인상주의 회화와 일본 미술의 연관관계가 탐구되기도 하였으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 것은 그로부터 십수년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클로드 모네, <바다풍경 : 폭풍>, 1866-1867, 클라크 미술관. // 클로드 모네, <녹색 파도>, 1866-1867,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클로드 모네, <달빛 아래 선박>, 1866-1867, 에딘버러 국립 미술관.


 같은 시기 모네 또한 일본화의 영향이 드러나는 일련의 해양화들을 제작한다. 모네는 1899년 진행한 언론 인터뷰에서 "16살부터 일본 목판화를 모았다"고 말한적이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모네의 착각이 빚어낸 혼동일 가능성이 높다. 프랑스에 일본 미술이 수입되기 시작한 것은 1854년이고 이때만 해도 일본 미술에 대한 수집 열풍이 불지 않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의 인터뷰는 이어진다. "나는 일본 판화들을 르아브르의 어느 가게에서 처음으로 보았다. 그곳은 쾌속 범선이 실어날랐던 온갖 신비한 잡동사니들을 판매하는 곳이었다." 이어지는 인터뷰에서 그는 60년대 그렸던 일련의 해양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작품들은 르 아브르에서 보냈던 나의 어린 시절과의 대화 과정의 일부로서 그려졌다." 60년대 작품들에 대해 그는 다소 감상적으로 자신의 제작 동기를 밝히고 있다. 후일 미술사학자 존 하우스는 이 인터뷰를 상세히 분석한 후 그가 말한 "어린 시절과의 대화"가 작품 제작 동기의 전부가 아님을 지적한 바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모네의 그림은 1866년 그가 돈을 빌리기 위해 쿠르베가 머물던 오르낭에 찾아간 시기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곳에서 그는 쿠르베에게서 여러 조언들을 들었고 실제 그것이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가 팔레트 나이프를 사용한 유일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는 점 또한 이런 영향을 반영한다. 비단 학자들뿐만 아니라 당대인들도 마네와 휘슬러의 그림에서 그러하였듯 팔레트 나이프의 사용을 쿠르베의 유산이라 보았다. 그러나 피사로의 사례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단지 동일한 도구를 사용한다는 근거만으로 쿠르베의 영향을 짐작하는 것은 젊은 작가들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들이 쿠르베를 존경했음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이 작품을 제작하는데 있어 쿠르베의 영향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모네의 인터뷰가 간접적으로 암시하듯 그들은 일본 회화와 같은 다양한 장르의 회화들을 작품에 녹여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인상주의는 이런 복잡한 기원을 가지고 있기에 더 매력적인 것 같다.


안도 히로시게, <불꽃놀이>, 185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글을 마무리 하기전에, 인상주의의 역사뿐만 아니라 모네의 작품 세계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작품 하나를 언급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앞서 언급한 해양화 시리즈 중에서 밤 시간대 바다를 배경으로 한 <달빛 아래 선박>이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모네의 작품 중에서 보기 드문 밤 풍경을 묘사한 그림이다. 이에 관해 모네는 1899년 인터뷰에서 밤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한적이 있다. 


"이따금씩 나는 달빛풍경을 감탄하며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들을 (화폭에 담기 위해) 연구한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연구를 끝까지 밀어부치지 못했는데 자연 속의 밤 풍경을 표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가 밤풍경을 연구하려 했던 이유는 그 시간대가 충분히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안도 히로시게와 같이 밤풍경을 묘사한 일본 목판화가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일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을 고려해볼 때 모네는 안도 히로시게의 <불꽃놀이>를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아마 모네는 히로시게의 작품을 보고 자신의 회화에 밤 풍경을 적용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일본 회화는 젊은 화가들에게 새로운 시도를 매개하는 촉매제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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