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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Oct 23. 2021

인상주의의 기원 (6)

1867년 1월 14일. 장 도미니크 앵그르가 87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는 초상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죽기 전 친구들과 모여 식사를 하고 모차르트, 하이든, 베토벤의 음악을 들었었다. 하지만 그날 밤 불의의 사고로 몸져 눕게 되었고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그의 죽음 이후 보수적인 평론가, 언론들이 일제히 부고기사를 쓰고 그를 추모했음은 이전 글에서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이런 추모 열기가 변화의 물결을 막지 못했다는 점도 말이다. 실제로 앵그르가 죽은지 1년 뒤 언론인이었던 마리우스 샤멜링(1833-1889)은 지난 20년간의 예술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예술은 죽었다. 그리고 순수 예술은 죽어가고 있다 ." 다소 비관적이고 종말론적인 회고와 다르게 이런 변화가 반가운 사람들도 분명 존재했다. 쥘 카스타냐리가 바로 그런사람일텐데 그가 1872년에 쓴 글에는 과거 예술이 쇠퇴하는 것에 대한 일종의 통쾌함마저 느껴진다. "역사화는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라는 아직 분해되지 않은 쓰레기들로부터 나온 작품일뿐이다. 이제 우리 앞에는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현대생활의 풍경화만 남아있을뿐이다." 비단 카스타냐리가 아니더라도 당대의 많은 비평가들은 18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희미해지는 역사화의 존재감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었다. 여기서 역사화의 존재감이 희미해진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역사화가 정말로 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것이 첫 번째고 다른 의미는 역사화가 다른 장르와의 혼합 현상으로 더 이상 경계짓기가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두 번째 요소가 인상주의와 역사화를 연결해주는 중요한매개가 된다. 


마네, <죽은 예수와 천사>, 1864,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에드가 드가, <중세시대 전쟁>, 1865, 오르세 미술관.


인상주의와 역사화의 관계를 이야기하기 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이 문제는 비단 인상주의의 기원을 서술하는 문제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사조를 누군가에게 설명해야하는 미술사학자들의 고민과도 맞닿아있다. 새로운 사조를 설명하고자 할 때 학자들은 으레 그 사조가 이전 사조와 무엇이 달랐는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몰두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기존의 사조가 쇠퇴하고 있음을, 그것도 아니라면 적어도 그러한 조짐이 보이고 있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설명을 읽다보면 미술사의 전체 궤적을 알 수 없는 일반 독자들은 이렇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아! 이제 옛사조는 몰락하고 새로운 사조가 유행했구나!"


이런 이해가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먼 훗날 모든 사건이 벌어진 이후 그 궤적을 역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모든 쇠퇴의 시작은 결국 그를 대체할 새로운 사조의 등장으로 인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인상주의에 대한 설명이 이것에 딱 들어맞는다. 인상주의가 1860년대 중반 형성되기 시작할 때즘 옛 사조라 할 수 있는 신고전주의 미술의 커튼콜은 이미 내려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당대에 기록된 보수주의적 비평가들의 푸념 또한 이것을 뒷받침해준다. 하지만 그런 흐름을 머리 속에 가질 경우 앙리 팡탱 라투르의 <비너스부르크의 탄호이저>나 에드가 드가의 <중세시대 전쟁>, 마네의 <죽은 예수와 천사>같은 역사화들은 화가들의 일시적인 일탈 혹은 지나간 과거를 어렴풋이 알게해주는 흔적기관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하지만 진실은 그보다 더 복잡하다. 몇몇 인상주의 화가들은 정말로 역사화를 인상주의의 일부로 편입시키고 싶어 했다. 


인상주의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역사화에 몰두한 유파는 아니었다. 모네, 시슬레, 피사로, 르느와르, 모리조 등 초기에 인상주의 운동의 주축 인물들은 모두가 풍경화나 초상화를 기반으로 작품 세계를 확장시켰다. 학자들이 인상주의를 논하는데 있어 영국의 낭만주의 풍경화, 네덜란드의 풍경화 그리고 프랑스의 자연주의 풍경화를 언급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다. 하지만 이런 일반적인 관념과는 조금 다르게 역사화를 진지한 눈으로 바라본 인상주의 작가들도 있었는데 에두와르 마네, 에드가 드가, 폴 세잔, 오귀스트 르느와르가 바로 그들이다. 네 사람은 공교롭게도 이후의 역사에서 인상주의 운동의 이탈자(여기에는 일시적인 이탈도 포함한다) 혹은 방관자가 된다. 마네의 경우 인상주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모네의 영향으로 외광파 기법을 배우기도 하지만 막상 인상주의 양식이 꽃피었을 때는 역사화를 더 많이 그렸었다. 에드가 드가는 처음부터 인상주의 동료들과 노선이 많이 달랐는데 그런 경향은 특히 4차 인상주의 전시 이후로 격화되어 결국에는 갈라진다. 폴 세잔은 초기 인상주의에 깊이 공감했지만 프로방스 지방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개척할 즈음에는 이미 인상주의의 범주를 훨씬 벗어나는 회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오귀스트 르느와르는 1860년대 당시에는 몇 번의 시도 끝에 역사화 장르를 포기했지만 이후 이탈리아 여행이 계기가 되어 다시 역사화풍의 그림을 시도하게 된다. 이들이 이렇게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간 것이 물론 역사화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인상주의 회화에 박물관에 있는 것과 같은 견고함을 부여하고 싶다"는 세잔의 말을 창조적으로 해석해보면 역사화를 대하는 그들의 자세가 이후 행보에 일정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구스타브 도레, <지옥에서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1861, 브후 미술관. // 테오듈 리보, <순교자 성 세바스티아누스>, 1865, 오르세 미술관.
샤를 셀리에, <잃어버린 영혼>, 1868, 소장처 미상.


몇몇 작가가 역사화를 인상주의 운동의 틀 속으로 집어넣고 싶어했다는 것은 당대의 예술적 움직임과도 연관이 있다. 1859년의 실망스런 전시 이후 비평가들이 말한 것처럼 일부 화가들은 역사화를 쇄신하고자 양식의 변화를 시도한다. 1861년부터 1870년까지 그러한 시도는 화가의 이름만 달랐을뿐 끊임없이 시도되었다. 1861년 귀스타브 도레가 단테의 작품 <신곡>을 주제로 한 회화에서 어둠을 강조하는 역사화를 제작한 것을 시작으로 1865년에는 테오듈 리보가 <순교자 성 세바스티아누스>에서 17세기 스페인 회화의 양식을 도입했으며 1868년에는 샤를 셀리에가 <잃어버린 영혼>에서 빛의 효과를 역사화에 도입했다. 그리고 1870년 앙리 르뇨가 성경적 내러티브에 오리엔탈리즘을 결합한 회화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60년대 내내 많은 화가들이 역사화 부흥을 위해 다양한 방법의 회화 양식과 테크닉들을 도입했다. 하지만 평론가들은 냉정했다. 그들은 이러한 혁신적 방법의 도입이 되려 역사화의 정체성을 흐리게 할뿐이라고 보았다. 역사화의 정체성에 평론가들이 그렇게 민감했던 것은 이 회화가 기본적으로 다른 의미에서의 사실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해 이 시기 역사화는 고증의 여부가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받아들여졌다. 시기는 약간 이르지만 폴 보드리가 1860년에 그리고 1861년 살롱에 출품한 역사화 <샤를로트 코르데>를 둘러싼 해프닝들이 당대인들의 역사화에 대한 생각을 말해준다. 이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세간에 엄청난 논쟁이 되었는데 역사화를 지향하면서도 지나치게 '비역사적'이라는게 그 이유였다. 이 그림을 평가절하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그림을 비판했다. 즉, 암살자의 복장이 암살자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정갈하고 빛은 공간에 비해 지나치게 밝으며(마라의 암살을 다룬 자크 루이 다비드의 유명한 작품과 비교하면 이 평가가 이해가 될것이다) 피부는 보통사람과 다를 바 없이 묘사되었을뿐만 아니라(그는 피부병을 앓고 있었다) 코르데의 표정과 행동이 도저히 위대한 혁명가를 암살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고 얼이 빠진 것 같다고 비판했다. 폴 보드리의 작품을 둘러싼 논쟁에서 중요한 것은 관람객들이 이 작품을 예술작품이 아니라 마치 프랑스 혁명 시기를 증언하는 사료를 대하듯이 관람했다는 것이다. 이런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가 사실 역사화를 뒤안길로 사라지게 한 또 다른 요인이었다. 


폴 보드리, <샤를로트 코르데>, 1860, 낭트 미술관. //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 1793, 벨기에 왕립 미술관.
피에르 퓌비 드 샤반느, <전쟁>, 1867(1861년 원작을 축소한 버젼), 필라델피아 미술관.


엄격함 속에 역사화를 개혁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무위로 돌아갔던 1860년대 마네와 드가 같은 화가들도 이러한 개혁의 대열에 동참했다. 그들은 살롱에 출품했던 여러 화가들이 그랬듯 기존의 역사화에 새로운 스타일을 부여하려고 했다. 마네의 경우 이런 시도는 스페인 회화를 접목하는 시도로 나타났다. <죽은 예수와 천사>는 그런 시도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작품이 엘 그레코(El Greco 1541-1614)의 종교화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라 추측하고 있다. 물론 이는 단지 학자들의 추측일뿐이다. 마네가 벨라스케스, 고야 등 스페인의 여러 화가들을 참고해 자신의 스타일을 완성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엘 그레코의 회화에까지 미쳤는지는 문헌상으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대담하게도 양식이나 스타일이 아닌 아예 두 장르를 섞어서 한 화폭에 표현하려는 노력도 했는데 <키어사지호와 앨리배마호의 해전>(이전 글 참고)이 바로 그러한 예다. 여기서 그는 위계상 낮은 지위에 있던 바다 풍경화에 남북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입혀 둘 사이의 간극을 좁히려 하고 있다. 두 장르를 섞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마네 회화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풀밭 위의 점심>이나 <올랭피아>도 엄밀한 의미에서는 이러한 특징 하에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마네의 대표적 회화 작품들이 왜 논란거리였는지 알 수 있다. 즉, 그의 회화는 단순히 대담했기 때문에 문제적이었던 것이 아니라 전통의 대명사로 여겨지던 역사화의 전거를 빌리면서 도발적이었기 때문에 문제적이었다. 한편 에드가 드가는 1859년부터 1865년까지 역사화 제작에 전념한다. 그는 역사화를 자신이 감명깊게 만난 화가의 화풍과 접목시키는데 구스타브 모로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이외에도 그는 1859년 인상깊게 보았던 프로망탱의 작품도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밌게도 이 두명은 70년대 들어서 진보적 평론가들에게 옛 방식을 고수하는 화가라는 비판을 듣는다. 분명 평론가들은 드가가 이 둘의 영향을 받은 회화를 제작했다는 점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전략적 이유에서인지 그러한 점은 언급되지 않는다. 두 명의 화가 이외에도 그는 1861년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퓌비 드 샤반느의 작품도 참고했는데 이 화가가 여러 진보적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다는 점도 참고에 한 몫 했을 것이다. <중세시대 전쟁>에서 드가가 얼마나 많이 그의 작품을 참고했는지 알 수 있다.


1860년대 역사화를 연구했던 일부 인상주의자들은 어느 순간부터 역사화를 그리지 않고 다른 장르로 넘어간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들이 살롱전에서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추측컨대 그들이 역사화를 버린 것은 아주 현실적인 동기가 작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그들은 굳이 역사화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예술적 가능성을 시험해볼 곳이 많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이런 판단은 옳았다. 하지만 아쉬움이 없는건 아니었다. 드가는 훗날 자신이 선정하는 작품의 주제들에 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내가 만약에 다른 세기에 살았다면 욕조에 있는 보통 여인이 아니라 수잔나를 그렸을 것이다." 드가의 역사화에 대한 미련은 그가 3년에 걸쳐 그린 <젊은 스파르타인들>이라는 작품을 통해서 알 수 있다. 1862년 작품을 완성한 이후 드가는 1880년 다시 이 작품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몇몇 부분을 다시 수정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제거했다. 하지만 그는 이 작품을 전시장에 내놓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전시하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이제 역사화가 그 임무를 마치고 퇴장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는 끝까지 이 작품을 재작업한 이유를 말하지 않았기에 진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굳이 이유를 듣지 않더라도 변경된 드가의 그림이 진실을 말해주는듯하다. 수정된 <젊은 스파르타인들>에는 이제 고대 그리스 건물의 흔적이 없다. 또한 인물은 고대 그리스 조각상에서 나올법한 인물이 아닌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프랑스인들의 얼굴로 다시 그려 넣었다. 1880년대면 이미 시대는 드가가 어찌해볼 수 없는 수준까지 흘러 있었다. 이제 마리아의 자리에는 모성에 가득찬 어머니가, 신들의 자리에는 멋들어진 옷을 입은 부르주아가 들어섰다. 예수의 자리는 정치가와 군인이 차지했고 천사와 악마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났다.


에드가 드가, <젊은 스파르타인들>, 1860-1862, 런던 내셔널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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