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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Dec 15. 2021

데이비드 호크니와 카메라 옵스큐라

<명화의 비밀>(2019)에 대한 감상

카메라 루시다를 사용하는 데이비드 호크니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는 흥미로운 장치다. 르네상스 이후로 사실적 묘사를 위한 보조기구로 사용된 카메라 옵스큐라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책 『명화의 비밀』(2019)을 통해 널리 알려졌으며 이를 통해 서구의 사실적 화풍이 단지 눈을 이용한 전사가 아니었다는 점을 널리 알렸다.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논의는 비단 서양 미술에 대한 연구에 국한되지 않았다. 조선후기 몇몇 그림들에 대한 논의에 있어 이기양을 위시한 몇몇 인물들이 칠실파려안(漆室玻瓈眼), 즉 카메라 옵스큐라란 장치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는 기록은 동서문명의 교류의 측면에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논지에 따르면 세밀한 묘사를 보이는 조선 후기의 몇몇 작품들은 정밀한 묘사를 보조하는 광학기구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처럼 한국미술사 연구에서 칠실파려안에 대한 연구는 서양화법의 유입이라는 측면에서 오랫동안 연구되던 주제 중 하나였다. 가령 이성미는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2000)에서 아래와 같이 서술한 바 있다. 


그의[정약용] 서양화에 대한 관심은 이기지나 박지원과 같이 시각적인 면에 치우치지 않고 좀더 과학적인 면을 보였다. 이러한 점은 그보다 좀 더 후의 인물인 이규경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동, 서양화의 시각적 차이점에 경이로움을 표현한 이기지, 홍대용, 박지원 등 북학파보다 한 세대 정도 늦은 실학자들의 서양화관은 그러한 감각적 차원을 벗어나 그 방법이나 재료의 물리적 차이점에 관심을 표현하였다는 점에서 좀더 근본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을 잘 보여주는 글이 자주 인용되어 온 정약용의 「칠실관화설」이다.
[중략]
 이 글에서 우리는 정약용이 서양의 이른바 '바늘구멍 암실 투시법(the camera obscura)'의 원리를 적용하여 '산과 호수 사이에 위치하는 집'의 아름다운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한 폭의 그림으로 담아 보는 실험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한 시점(벽의 구멍)을 통과한 광선이 렌즈 하나를 거쳐 반대편 벽면에 투사되어 도치 형성된 형상을 설명하고 있다. 이 실험은 19세기 후반기에 발명된 카메라의 원리와 같은 것이다.
이성미, 『조선시대 그림 속의 서양화법』(2000) pp. 109-111.  


카메라 옵스큐라


정약용 등 소위 '북학파'로 묶이는 인물들이 묘사한 칠실파려안이라는 장치가 과연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카메라 옵스큐라일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잠시 접어둔다면 당대의 지식인들에게 이 새로운 광학기구가 흥미로운 장치로 다가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성미의 연구 시기에서도 알 수 있겠지만 이런 연구들은 주로 90-00년대즈음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으로 추측하기에 00년을 전후로 이런 논의가 등장하는 것은 아마 서구의 관련 연구경향이 그즈음 수입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1980-90년대 『옥토버』라는 미술 학회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일군의 서구 학자들은 16-19세기 시각 체제에 대한 여러 논의들을 전개했고 그 결과 뒤에 인용하게 될 의미 있는 성과들이 도출되었는데 그것의 영향이 00년대 한국에까지 흘러들어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소 신기하게 보일지라도 이러한 연구 자체는 한국에서 이미 20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탐구되어온 주제다. 이처럼 조선미술에서 서양화법의 영향이라는 것은 학계, 일반인, 역사 동호인들 사이에서 낯설거나 새로운 영역은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여러 글들이 언론이나 학회지에서도 꾸준히 나오고 있다. 그렇기에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카메라 옵스큐라가 동양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한 부분이 아닌 카메라 옵스큐라 그 자체가 서구 사회의 회화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부분으로 한정할까 한다. 그리고 보다 더 논의를 좁히자면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학자들의 관점과 그것이 미술사 연구에 있어서 어떠한 함의를 갖는지에 대한 짤막한 요약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호크니의 논의가 가진 의미를 찾아볼까 한다.


우선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가장 널리 알려진 데이비드 호크니의 글(본래 공저이지만 편의상 호크니의 글로 명명하겠다)이 카메라 옵스큐라 연구사에 있어서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2001년 호크니의 책 『Secret Knowledge: Rediscovering the Lost Techniques of the Old Masters』이 출판이 되었을 때 그의 주장은 세간의 화제를 불러 모았다. 앞서 언급했듯 이 책은 그 유명세에 힘입어 한국에서도 2003년 『명화의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나왔고 오늘날에도 많이 읽히고 있는지 2019년에 재출간되었다. 하지만 그 유명새와 별개로 이 책이 미술사학 내에서 과연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조금은 회의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호크니의 주장 자체가 학계 내에서 아주 새로운 주장을 한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고 새로운 지점이 있더라도 그것이 연구사적 맥락에서 어떤 함의가 있는가 생각해보았을 때 획기적인 전환을 마련했다고 보기에는 어렵기 때문이다.


명화의비밀


그럼에도 호크니의 책이 화제가 되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인 듯하다. 첫째, 호크니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명성. 책이 출간되었을 당시 호크니는 이미 동시대 미술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 중 한 명이었으며 평단, 학계, 대중의 인지도 측면에서 최고라고 할만한 위치에 올라온 사람이었다. 그것은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장 2019년에 있었던 호크니의 전시가 첫날 네이버 실시간 검색 순위에까지 올라갔을 정도로 인기는 대단했다. 더구나 호크니는 자신의 작품을 아이패드로 그렸을 정도로 새로운 재현 매체 활용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호크니 본인이 가지고 있었던 광학 장치의 활용과 작가의 창조성의 관계라는 문제의식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주목을 받을 수 있다. 물론 학자, 평론가가 아닌 미술 작가가 크고 두꺼운 학술적 서적을 출판했다는 것이 큰 화제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두 번째로 글 자체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몇 가지 부분에서 참신한 논의, 방법 등이 발견된다. 우선 카메라 옵스큐라가 실제 어느 작가들에게 적용되었을지 실증적으로 밝혀내고 이를 거대한 도판들을 통해서 제시한 것은 이 글이 가진 최고의 강점이다. 알브레히트 뒤러, 요하네스 베르메르 등 16-17세기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작품 분석하며 이런 작품들에서 광학 장치의 활용 양상을 탐구하는 것은 작품 분석의 측면에서 분명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중의 입장에서 사실적인 재현은 많은 부분 작가의 손에서 거친 일종의 기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르네상스, 네덜란드 회화의 여러 거장들이 광학 장치를 이용해 대상을 '모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도 충격적이고 흥미로운 논의로 다가올 수 있었다. 또한 카메라 루시다의 사용에 있어서 그것이 본래 알려져 있었던 것보다 더 일찍 몇몇 화가들에게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고 추측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교정한다는 측면에 있어서 생산적인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은 역사적 사실의 교정이라는 측면보다는 그것이 취하는 역사적 관점에 있어서 첨예한 논쟁 지점을 제공한다. 바로 이것이 이 책이 가진 마지막 측면과 연결되는데 이 책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카메라 옵스큐라 - 카메라라는 광학장치의 발전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사실 이런 것이 아주 명시적으로 드러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 글을 읽는 많은 사람들은 자연스레 카메라 옵스큐라가 카메라의 시원적 형태 혹은 전(前)사진기라고 생각할 여지를 충분히 제공한다. 호크니의 글이 이러한 발전상을 암묵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은 글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바로 사실적인 재현의 비밀을 파헤치는 데 있기 때문이다. 호크니의 논의에 따르면 서양 미술의 역사에 있어 재현은 어떤 대상을 점점 더 사실적으로 그리는 방향으로 발전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발전 경로에 있어서 카메라 옵스큐라와 같은 광학장치의 등장은 일종의 거대한 단절 혹은 진보로 기능한다. 만약 이 관점을 계속 끌고 나가면 19세기는 미술은 앵그르의 작품에서도 알 수 있듯 사실적 재현의 정점에 올라간 시기이며 이후에는 이런 사실적 재현의 역사가 사진기라는 정교한 재현기계장치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광학장치는 미술이 재현을 포기하고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하나의 원인이 된다. 이처럼 재현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미술이(광학 장치, 원근법 등 여러 요소들의 도움을 받아) 사실성의 재현으로 나아가다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사진이 미술의 역할을 대체했다는 관점은 두 매체의 관계에 대한 논의에서 고전적이고 또 보편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논의다. 그런 점에서 호크니가 암시적으로 취하고 있는 관점은 분명 보편타당하며 빈틈을 찾기 힘든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크니가 취하고 있는 역사적 흐름은 몇 가지 측면에서 분명 재고해볼 여지가 있다. 이에 관해 이야기하기 위해 세 가지 질문에 차례로 답하는 방식으로 글을 전개해볼까 한다. 우선 첫번째, 호크니의 논의는 참신한가? 둘째,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는 연속선상에 놓을 수 있는가? 마지막 세번째, 서구의 시각 모델은 단선적인가? 


첫번째 질문은 이미 앞서 수차례 언급했기 때문에 더 이상의 첨언이 불필요해 보인다. 다만 여기에서는 같은 말을 반복하기보다는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짤막한 연구사를 통해 호크니의 논의가 어느 위치에 있는지 가늠해볼까 한다. 광학 장치가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한 글들은 많은 경우 아주 전문적인 학술 영역, 특히 시각 철학이나 미술사의 영역에서 다뤄지는 경우가 많고 그 학술 영역 내에서도 상당히 까다로운 철학적, 과학적인 논의를 동반하고 있기 때문에 대중의 입장에서 처음 호크니의 책이 마치 새로운 이론과 문제의식을 제기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책이 가진 대중적인 인기와는 별개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논의는 이미 1930년대의 글에서도 등장한다.(Helmuth Fritzche, 1936) 물론 본격적으로 이러한 논의가 싹튼 것은 1970-80년대에 이르러서이며 이 시기를 전후로 해서 개별 작가들이 어떠한 광학장치를 사용해 무엇을 묘사했는지의 문제가 중요한 논의점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Aaron Scharf, 1974) 그리고 이러한 논의와 함께 시각 장치가 가지고 있는 철학적인 함의에 대한 논의들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뒤에서 설명할 이야기들은 바로 이러한 논의들을 기초로 등장했다. 특히 1990년대에 이르러 일군의 학자들은 광학 장치가 이끌어낸 시각 경험이라는 것이 주체가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주목했다. 후일 시각성Visuality이라는 범주로 묶이는 이러한 일련의 논의들은 시각이 어떤 선험적인 사고에 근거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제도적 맥락에 따라 해석하는 것에 가까운 무엇으로 보았다.(Hal Foster ed, 1999)


가령 조선시대 사람들이 원근법이 사용된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능숙하게 그리지 못했을 때 그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에 약했다는 뜻이 아니라 전혀 다른 시각적 재현 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며 이때 재현 체제는 그 사회의 맥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났다는 것이다. 서구 미술에 대한 논의에 있어 이것은 보는 방식이라는 것이 같은 유럽의 미술이라도 서로 다르며 우리가 단순히 서구 미술을 선원근법적이라고 통칭해서 부르는 것은 그 이면에 존재하는 시각 경험의 지역적 차이들을 모두 소거해 버린 폭력적 일반화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이상의 이러한 연구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호크니의 논의는 1980년대 전후에 있었던 개별 작가들에 대한 논의와 연장선에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들이 뒤떨어졌다거나 아무런 의미도 도출해내지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출간 당시 과연 최신의 학계 동향에 기반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며 그렇기에 대중이 가지고 있는 이 책에 대한 인식과도 상반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논쟁점으로 삼을만한 것은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의 연속성에 대한 논의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는 분명 유사한 원리로 작동된다. 그러나 몇몇 미술사학자들과 시각철학자들은 카메라 옵스큐라로 대표될 수 있는 시각적 모델이라는 것이 1820-1830년대를 전후로 하여 붕괴되고 새로운 모델이 등장했다고 보고 있다.(Jonathan Crary, 1990) 이 주장에 따르면 1820-30년대를 전후로 하여 카메라 옵스큐라 장치로 대변되는 기계적인 시각 모델은 헬름홀츠 등을 위시하는 생리학자들과 시각의 주체적 재현이라는 문제에 골몰했던 일군의 화가들(가령 낭만주의의 윌리엄 터너나 인상주의자들)에 의해 생리학적 시각모델로 대체된다. 이러한 단절은 매우 근본적인 것이었는데 이른바 시각 모델의 전환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를 넘어 인간의 오감을 어떤 방식으로 이해할 것인가, 인간의 오감이 대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와 같은 인식론, 감각론의 문제를 포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할 포스터는 자신의 책에서 카메라 옵스큐라가 시각 모델의 형성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한다.(Hal Foster, 1993) 


카메라 옵스쿠라에 포착된 이미지를 영원히 지속시키는 방식 때문에, 사진은 다소 15세기 르네상스 시대 이후 시각 그 자체로 동일시되는 원근법적인 시각체제를 승인하는 것처럼 보인다. 카메라의 눈은 작은 구멍을 통해 보는 단안 시각 그 자체로, 완전히 외부의 장면을 움직이지 않은 채로 바라보는 비육체화된 응시를 생성한다.
할 포스터, 『눈의 폄하』(2019), p. 182.


할 포스터에 따르면 카메라 옵스큐라 장치는 단순히 재현기계장치가 아니라 원근법이라는 서구 미술에서 대상을 재현하기 위해 고안해낸 발명품을 '승인'하는 장치이며 당시 원근법적인 시각체제라는 것이 곧 시각과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카메라 옵스큐라는 당대 서구인들이 보는 방식 그 자체를 규정하는데 큰 일조를 했던 장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장치가 가진 독특한 성질로 인해서 그것은 비육체화된 응시를 만들며 이것은 근대 철학에 중요한 이정표를 형성한 데카르트 여러 저작들, 특히 미술의 영역에서는『광학』에서 "관람자의 육체와의 유대는 파기되고, 이제 보는 주체는 어떤 관념적인 위치인 비경험적인 응시로서 제시되고 결정된다"(Bryson 1983)고 바라본 점과 일맥상통하다.


이렇듯 카메라 옵스큐라가 단순 시각 장치가 아닌 주체의 감각, 인식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그러한 감각, 인식을 규정하는 정치, 사회적인 맥락과도 깊은 연관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그리고 당연하게도 많은 저자들은 이런 논의를 미셸 푸코의 글을 디딤돌 삼아 시작한다) 이런 측면에서 1820-30년대 시각 모델의 붕괴는 당대의 사회적 변화, 즉 미술에서의 근대화라고 일컫는 여러 현상들과 궤를 같이한다. 실제로 카메라 옵스큐라 시각 모델의 붕괴는 당시 폭발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아방가르드 예술의 경향과 잘 맞아떨어지며 19세기 입체경, 파노라마와 같은 시각적인 스펙타클을 활용하는 여러 장치, 수법들이 등장했다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또한 이것은 과학적인 발견과도 맞아떨어지는데 이 시기 안구 운동에 대한 연구, 빛의 파장에 대한 여러 연구 등 시각에 관한 연구들이 시각체제의 변화와 맞물려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호크니의 논의가 지닌 약점이 존재한다. 19세기 초 시각 모델의 붕괴를 주장했던 크래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호크니의 주장을 간접적으로 반박한다(노파심에 첨언하면 이 글은 호크니의 글보다 먼저 출간되었다) 


베르미르에 대한 나의 논의는 그림 제작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한 방대한 예술사적 고찰과 전혀 연관이 없다. 정말 그가 사용했는가? 혹은 사용했다면 그림 구성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 이런 질문이 전문가들에게 흥미가 있는 것이지만 나는 여기서 이러쿵저러쿵 답을 구하는데 관심이 없다. 그러한 조사들은 카메라 옵스큐라의 문제들을 광학효과의 하나로, 궁극적으로는 화가들의 스타일로 축소해버린다. (중략) 나는 반드시, 어떻게 카메라 옵스큐라가 관찰 주체의 위치와 가능성을 정의하는가라는 견지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단순히 그림 혹은 스타일에서의 선택사항, 중립적으로 역사와 무관한 주체에게 여러 다른 것들 중 하나의 선택이 절대 아니었다.
조나단 크래리, 『관찰자의 기술』(2001), p. 75


이에 따르면 카메라 옵스큐라와 카메라는 그것이 작동하는 기계적 원리가 동일하고 그것의 결과물이 대상을 정밀하게 재현한다는 측면에서 동일할지라도 전혀 다른 재현 장치이며 역사적 연속선 상에서 동일한 궤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당연하게도, 16-17세기 카메라 옵스큐라가 사용되었던 맥락에서 크래리가 말하는 '관찰자'의 지위와 19세기 사진을 사용하는 '관찰자'의 지위는 앞서 언급한 단절로 인해 분명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요지는 우리가 광학장치를 바라볼 때 그것을 기계장치의 발전 과정이 아닌 인간 주체의 변화 과정이나 사회, 정치적인 맥락의 변화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며 그렇기에 단지 시각적 결과물의 유사성이나 기계 장치의 원리의 유사성을 통해서 연속성을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9세기를 전후로 해서 새로운 시각 모델이 등장했다는 것은 오늘날까지도 이 시기의 시각 모델의 변화상을 규명하는 강력한 이론으로 여겨지고 있다. 비록 시기가 흐르면서 그 시기가 좀 더 올라가기도 하고 또 1990년대 논의에서 주장했던 여러 사회적인 맥락들이 일부는 부정되고 또 일부는 수정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큰 골자 자체는 오늘날까지도 유지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호크니의 논의는 단선적인 역사상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도출한다. 즉, 호크니의 논의에 따라 서구의 미술이 사실적인 재현으로 점점 나아가는 미술이라 하더라도 이 '사실적'이라는 개념이 과연 유럽 전체의 미술에서 하나의 개념으로 일반화할 수 있겠느냐는 비판이 존재한다. 이것은 사실상 위에서 제기했던 문제, 즉 사실성의 재현이라는 측면에서만 카메라 옵스큐라와 작가와의 관계를 바라보는 문제와도 일맥상통한다. 가령 혹자는 호크니의 책에서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과 17세기 네덜란드의 미술가들이 동일한 범주로 묶일 수 있는지 의문을 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은 특히 1984년 스베틀라나 앨퍼스가 내놓은 저작 『묘사의 예술The Art of Describing』에서 북구 예술의 전통을 르네상스와는 다른 또 다른 시각 모델로 바라보았다는 점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앨퍼스는 네덜란드의 미술이 르네상스 미술의 전통에서 강조하는 내러티브의 강조와는 분명히 다른 전통이 있음을 주장하며 네덜란드의 미술이 내러티브를 최대한 배제하고 온전히 시각적으로만 기능하는 예술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네덜란드의 묘사의 미술과 데카르트적인 원근법주의의 차이는] 수많은 작은 대상들에 대한 주목 대 소수의 큰 대상들에 대한 주목, 대상들에서 반사되는 빛 대 음영에 의해 입체감이 주어지는 대상들, 해석 가능한 공간 내에서의 대상들의 배치보다는 오히려 대상들의 표면, 즉 색채들과 질감들에 대한 관심으로 [나눌 수 있다]
Svetlana Alpers, 『The Art of Describing』(1984), p. 44.


이에 따르면 카메라 옵스큐라는 내러티브에 따른 대상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모든 대상을 사실적이고 정교하게 투영시킨다는 점에서 유럽 저지대 지방의 시각 모델이 광학 장치의 영역에서 등장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주장은 다소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통칭 '북유럽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회화 작품에서 거울 등과 같이 광학 장치의 편린으로 읽을 수 있는 소재들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또 사용되기도 했다는 점에서 일견 설득력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에 발생한다. 그녀는 여기서 더 나아가 카메라 옵스큐라가 북구 예술의 시각 모델의 연장선에 있는 무엇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앨퍼스는 사진기 또한 이런 북구 전통에서 파생된 무엇이라 주장하는데 이 대목에서 호크니의 논의와 앨퍼스의 논의가 어떠한 공통점, 차이점이 드러나는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진의 궁극적인 기원은 15세기 투시도법의 발명에 있지 않고 오히려 북유럽의 대안적인 양식에 있다. 이렇게 본다면 사진 이미지, 네덜란드의 묘사술, 그리고 인상파 회화는 모두 서구 예술에서 이 일정한 예술 선택의 예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Svetlana Alpers, 『The Art of Describing』(1984), p. 244.


이러한 논의는 호크니가 말한 광학 장치의 사용이라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은 형이상학적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화가가 어떠한 시각 장치를 수용했을 때 그것은 어떤 실제적인 목적을 넘어 그것의 이면에 존재하는 시각 모델의 수용, 변형 혹은 거부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 모델이 개인 혹은 집단에게 '사실적이다'라는 관념에 대한 구체적인 틀을 제공하기 때문에 대상을 환영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카메라 옵스큐라를 사용했다는 것은 호크니가 여러 16-17세기 거장들의 사례를 통해서 증명했듯이 카메라 옵스큐라가 유럽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가 오늘날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시각 모델에 근거해 쓰였거나 변형되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요컨대, 광학 장치의 수용이 그것을 발생시킨 시각 모델의 수용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크니는 이렇듯 광학 장치 이면에 존재하는 시각 모델의 수용이라는 복잡한 역사적 전개 과정을 단지 형식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는 사실적인 재현의 여부로 단순화시켰다는 점에서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호크니의 논의에 근거한 여러 파생적인 적용이 지나친 단순화로 해당 시대의 미술의 세밀한 측면들을 가릴 수 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1990년대 중반 이후 르네상스적 시각 모델, 북구 네덜란드의 시각 모델에 더해 바로크적 시각 모델이라는 제3의 모델을 설정하는 논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에 따라 16-18세기 서구 유럽 미술의 양상이 단순히 형식의 문제로 귀결될 수 없음을 밝히는 논문들이 더욱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를 보았을 때 광학 장치의 사용을 단지 제작 과정에 있어 형식적인 편리함(대상을 보다 사실적으로 재현할 수 있다와 같은 문제)이라는 측면으로 단순화할 수는 없다. 


호크니의 책은 분명 뛰어나다. 압도적인 책의 크기에 담긴 훌륭한 도판들은 단지 텍스트 속에서 모호하게 다가오던 카메라 옵스큐라의 여러 측면을 생생한 시각적 이미지로 되살려내고 있다. 여기에 각종 광학 장치를 사용하는 호크니 본인의 노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존중받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카메라 옵스큐라를 다뤘던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성과 위에서 바라볼 때 그 의미를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카메라 옵스큐라에 대한 많은 대중적 글에서 호크니의 책이 하나의 의견으로서가 아닌 역사적 사실인양 인용되는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에 인용된 여러 논의들에서도 알 수 있듯 호크니가 주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논쟁의 영역에 있는 주장인 바, 여타 다른 저작들을 통해서 그 공통점과 차이를 비교해보고 그것의 타당성을 검토해 보다 종합적인 시각을 가질 필요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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