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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Aug 25. 2022

아르장퇴유로의 휴가 (3)

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풍경은 정치다. 그것은 자연의 가면을 쓰고 있지만 실상 인간 사회의 많은 측면들을 직간접적으로 비춰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또한 화가가 어떠한 풍경을 선택했을 때 그것은 이제 가치중립적인 무엇으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동시대에 대한 목소리의 일부로 기능한다. 이는 자연을 그린다는 것이 대상을 똑같이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자연 앞에서 화가는 어쩔수 없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시간 제약으로 인해 어떤 부분은 생략해야 하고 반대로 어떤 부분은 과장하여 표현해야 한다.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 특정 구도를 잡고 의도한 표현 방식을 활용해 자연을 그려내는 모든 과정에 쉬이 택하기 어려운 선택의 순간이 들어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화가의 결정은 당연하게도 자신이 딛고 서 있는 장소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일부 미술사학자들이 '천박한 마르크스주의'라 비판했던 이러한 반영론적 관점이 화가의 화풍을 결정하는 전부는 아니다. 화가의 선택은 시대의 영향을 받지만 때때로 화가는 그 시대를 타고 넘어 그것을 활용하거나 전복시키려한다. 그것이 성공했냐 실패했냐는 중요치 않다. 화가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거대한 힘이 불가항력적인 무엇이 아니라 저항과 수용이라는 선택지 하에 얼마든지 변형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다. 인상주의자들이 근교를 무대로 그렸던 일련의 풍경화 또한 이러한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 시기는 그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풍경의 정치성이 극대화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는 19세기가 온갖 이데올로기의 형성과 충돌, 그리고 그로인한 사회적 변동의 시대였기 가능한 것이었다.


20세기 중반 인상주의를 연구하던 많은 미술사학자들은 인상주의의 교외풍경화가 지니고 있는 미묘한 정치적 함의들을 밝혀냈다. 이때 교외풍경화는 주로 부르주아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시각적 대변인처럼 여겨졌으며 그러한 증거로 아르장퇴유의 복합적 산업구조에도 불구하고 레저, 관광의 측면만이 부각되어 나타났다는 점이 많이 지적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점들을 자세히 검토하기 전에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다. 바로 인상주의자들이 즐겨 그렸던 교외의 풍경이 당대인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해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결론만 말하자면 교외 풍경이라는 장르는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든 이미 그 자체로 기존의 규범에 대한 일종의 저항적 메세지를 담고 있었다. 왜냐하면 인상주의자들 이전에 교외풍경화는 널리 그려지지 않았으며 설사 그릴 수는 있어도 그리 권장하지는 않았던 장르기 때문이다.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화가가 풍경을 그린다고 했을 때 관심이 있었던 소재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숭고를 불러일으킬 정도이 웅장한 풍경이다. 터너의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풍경이나 프리드리히의 인간을 압도하는 광막한 바다는 모두 그러한 소재를 채택한 풍경화들이었다. 여기에 더해 18세기를 거치며 신대륙에 대한 이미지들도 이러한 범주로 소비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일상적 소재였다. 컨스터블이 <건초마차>에서 보여주었던 낮은 구릉의 시골이나 이탈리아, 네덜란드의 풍경화가들이 즐겨 그렸던 파노라마식의 도시풍경화들은 모두 이 범주에 들어간다. 


이러한 기준을 적용했을 때 인상주의자들의 풍경화는 후자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풍경은 휴가라는 특별한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아주 일상적인 파리 도시민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인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그림을 풍경화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그림이 도시의 풍속화 정도로 여겨졌다면 교외 풍경화가 지니고 있는 정치적인 함의는 그것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줄어들 것이다. 아니, 어쩌면 별 문제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 시기 회화는 매우 엄격한 장르적 위계 속에 있었고 그로 인해 각 장르간의 철저한 구분이 당연시되었다는 점이다. 시기는 다소 이르지면 1861년 막심 뒤 캉이 쓴 그 해 살롱에 대한 평문은 이 시기 장르적 구분이 어떠한 방식으로 풍경화를 옥죄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풍경화가들과 해양화가들은 자신들이 작품에 쓸모 없는 작은 인간들을 채워넣음으로서 스스로의 작품들을 해치고 있는지 깨닫지 못한다. 사람들은 숲, 초원, 바닷가 같은 자연의 절대적 고독을 좋아한다. 이러한 특성이 인간과 자연이 직접적으로 교류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농부나 선원이 자연 속에 등장하면 마법은 깨지게 된다. ...(중략)... 실재에 있어서 진실인 것은 허구에 있어서도 진실이다. 풍경은 인간의 흔적이 없을때에만 진정으로 장엄해질 수 있다.


테오도르 루소, <퐁텐블로 숲>, 1867, 캔버스에 유화, 72 x 93cm, 보르도 미술관
외젠 부댕, <투르빌의 해변>, 1865, 캔버스에 유화, 67.4 x 104.1cm, 미니애폴리스 미술관


막심 뒤 캉의 글에서 강조하고 있는 풍경화의 덕목은 인간 활동을 배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여기서 그는 소재의 선택과 배제의 문제가 풍경화 장르의 평가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고 있다. 그의 평문이 어떠한 작품을 보고 쓴 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60년대 초반 풍경화 분야에서 논란이 되었던 문제를 고려했을 때 그가 염두해둔 화가들은 소위 플렝 에르(plein air) 풍경화를 시도했던 일군의 화가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시기 풍경 장르는 예술계 내에서 전통과 혁신의 대립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르였다. 1860년의 시점에서 기존에 우세를 점하고 있던 고전적 풍경화들이 뚜렷한 쇠락을 겪었으며 한편으로는 바르비종파를 기수로 하는 새로운 풍경화 장르들이 두각을 드러내며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결 구도에서 등장한 플렝 에르 풍경화는 변화에 앞장선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엄청난 혁신이었다. 바르비종파는 그 화파의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프랑스의 작은 마을인 바르비종 일대를 무대로 활동하던 화가들이었다. 그들은 평범해 보이는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냄으로서 고전주의적 풍경화가 강조했던 이상화된 자연에 반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들 조차도 앞서 뒤 캉이 언급한 풍경화의 규범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우선 바르비종파의 풍경화는 기본적으로 인물의 비중이 적었고 자연의 "마법"이 깨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대상을 배치했다. 게다가 전체적으로 어두운 색조를 이용해 신중하게 대상을 묘사해 기존의 규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주로 바다풍경화를 배경으로 하는 부댕, 용킨트와 같은 인물들의 풍경화는 인물이 사실상 화면의 중심을 차지하는 경우가 많으며 설사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가령 배)이 풍경의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었다. 테오도르 루소의 <퐁텐블로 숲>과 외젠 부댕의 <투르빌의 해변>은 이 차이가 어떠한 효과를 만들어내는지 보여준다. 테오도르 루소는 일찍이 테오도르 뒤레 같은 평론가들이 "이 시대에 따라야할 풍경화가"로 지목한 인물이다. 사실 그의 글은 현장사생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다. 그러나 인간을 배제한 풍경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작품은 충분히 당대의 모범이었다. 한편 부댕의 그림은 인물들이 마치 띠처럼 배치되어 있어 후경에 어렴풋이 보이는 바다의 풍경을 전부 가려버리고 있다. 마치 세 개의 층을 이루어 쌓아올려진 영국 해협 어딘가의 풍경은 플렝 에르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그림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부댕과 용킨트는 모네가 화가로서 첫걸음을 떼고 있을 당시 그의 화풍에 큰 영향을 준 인물들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인연이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자들이 교외풍경화를 그리게된 직접적인 이유는 아닐 것이다. 사실 교외풍경화의 탄생 배경에는 그럴 수 밖에 없었던 모종의 사정이 있었다. 후일 인상주의자로 불리게 될 인물들은 1865년을 전후로 하여 퐁텐블로 숲으로 향했다. 18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 바르비종 화풍이 미술계에서 그 입지를 넓히고 있던 상황에서 젊은 화가들에게 퐁텐블로 숲은 일종의 성지 같은 곳이었다. 실제로 1860년대 퐁텐블로 숲은 프랑스 뿐만 아니라 유럽, 북미 등지에서 온 화가들의 사생 장소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숲은 바르비종파의 풍경에서 그러하였듯 더 이상 특유의 고요함을 간직한 곳이 아니었다. 젊은 화가들이 이곳으로 사생을 왔을 시점에 퐁텐블로는 유명한 사냥 명소이자 관광지가 되어 있었다. 석판화로 값싸게 찍힌 여행 가이드북과 그러한 출판물을 보고 찾아온 관광객들을 위해 깔린 포장도로, 안내 간판 등은 이곳의 자연을 문명화된 공간으로 만들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이곳에서 인간의 흔적이 없는 때묻지 않은 자연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인상주의자들이 교외를 집중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퐁텐블로에서의 사생 실습 이후였다. 따라서 그들이 교외를 자신들의 풍경으로 채택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은 더 이상 사생이 가능한 장소이면서 동시에 원시적인 자연 풍경을 갖추고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1850년대 이후 산업의 발달과 부르주아 계층의 성장은 자연 풍경을 관광지로 바꾸어 버렸다. 물론 대안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까지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을 찾아 떠나는 것은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었다. 손상되지 않은 자연과 전통 문화를 간직한 브르타뉴, 프로방스 같은 지역부터 타히티와 북아프리카 같은 해외 식민지까지 아직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은 혹은 닿지 않았을 것이라 여겨지는 세계는 남아있었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그러한 선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1860년대까지만 해도 국제적인 운송 수단은 아직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지구의 오지에까지 유럽의 증기선과 철도가 다니는 것은 1880년대에 이르러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인상주의자들에게 남은 것은 교외나 해변가와 같은 관광지가 되어버린 자연 풍경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상주의자들은 인간이 존재하는 풍경을 그리는 플렝 에르 풍경화의 길로 선회한다. 그리고 이러한 선택은 플렝 에르 풍경화가 품고 있었던 여러 도발적 논쟁과 혁신을 인상주의 회화에도 동일하게 적용하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그렇기에 교외 풍경화라는 장르는 이미 그 시작부터 기존 예술에 대한 저항이 담겨져 있었다. 더군다나 인상주의자들은 기법적 측면에서 선배화가들보다 훨씬 더 과격했기에 논란의 불씨는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모네가 빈번하게 살롱에서 고배를 마셨던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요컨대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반항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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