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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델 Aug 25. 2022

아르장퇴유로의 휴가 (4)

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지금까지 인상주의의 아르장퇴유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두 가지 요인들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하나는 외부적인 요인으로 파리의 팽창과 그로 인한 교외 지역의 성장과 관련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예술계 내부의 요인으로 풍경화 장르의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아르장퇴유 체류 시기 인상주의자들의 내부 상황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당시 프랑스의 정치적인 불안 때문에 영국과 네덜란드를 전전하던 모네는 1872년 국외 생활을 청산하고 아르장퇴유로 정착한다. 모네는 자신과 동일한 예술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동지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독립전을 열 생각이었다. 이 독립전이 훗날 파리 카퓌신 대로의 나다르 스튜디오에서 열리는 제 1회 인상주의 전시, 당시의 명칭으로는 화가, 조각가, 판화 무명 예술가 협회(혹은 합자회사)전으로 발전하기까지 인상주의의 주요 인물들은 각지에서 기금을 모으고 전시를 할 화가들을 섭외하고 또 언론에 자신들의 전시 일정을 홍보했다. 살롱 체제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살길을 찾아 떠나는 젊은 화가들의 고군분투는 대부분 아르장퇴유를 배경으로 펼쳐졌다. 


그러나 작품의 소재 자체로만 보았을 때 아르장퇴유를 묘사한 화가는 의외로 적다. 아르장퇴유와 그 주변을 낱낱히 파헤친 두 명의 대표적 인물인 모네와 르느와르, 그리고 인상주의자들의 독립전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매우 깊은 연관이 있었던 마네, 보불 전쟁이후 동료이자 후원자로 인상주의 그룹의 중심 인물이 되는 카유보트와 같은 인물 정도만이 아르장퇴유라는 장소에 깊은 관심을 보였을 뿐이다. 반면 인상주의자로 많이 알려진 피사로나 드가 같은 인물들은 의외로 아르장퇴유와는 인연이 없었다. 피사로의 경우 1870년대 퐁투아즈 지역에 정착해 많은 작품들을 그곳에서 제작했다. 그리고 드가의 경우 주로 관심이 있었던 지역은 교외가 아니라 파리였다. 초기에 인상주의 그룹에 참여하지만 곧 자신만의 길을 개척하는 세잔 또한 프로방스에서 제작한 일련의 연작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아르장퇴유의 화가는 아니었다.


이처럼 인상주의자라 하더라도 모두 이 곳의 풍경에 관심을 가진 것은 아니었고 그렇기 때문에 주제적인 측면에서 아르장퇴유가 바르비종파의 퐁텐블로 숲이 그러하듯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상주의 연구에 있어 아르장퇴유라는 조그만 지역이 반드시 언급되는 것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아르장퇴유는 모네와 르느와르와 같은 주요한 인상주의자들이 자신의 화풍을 확립한 지역이었다. 둘째, 이 지역은 역사적인 1874년 독립전의 불씨가 타오른 곳이기도 했다.  


1864년 9월 4일 어느 신문의 삽화
오귀스트 르느와르, <정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네>, 1873, 캔버스에 유채, 워즈워스 미술관.


화풍의 확립이라는 측면에 있어 아르장퇴유를 주제로 한 풍경화들은 자연과 레저 활동을 어떠한 방식으로 묘사할지에 대한 화가들의 고민을 반영하고 있다.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사생하는 관습은 이 시기에 들어 비단 진보적인 화가들뿐만 아니라 당대 사회를 묘사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던 많은 화가들에게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교외 지역은 이러한 사생 장소로 인기가 많았는데 당대에 그려진 몇몇 삽화들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상주의자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1872년 모네와 시슬레의 공동 작업, 1869년과 1873년 모네와 르느와르의 사생 여행, 그리고 1874년 마네와 인상주의자들간의 협업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1873년 르느와르가 그린 한 작품은 이 시기 교외 사생이 어떠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보여준다. 그림 속에서 르느와르는 바로 옆에서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모네를 그렸다. 붓을 쥐고 있는 손의 위치를 보았을 때 화면 가득히 늘어서 있는 꽃이 아닌 보다 상단에 위치한 집들을 그리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후경의 모습을 보았을 때 모네가 그리고자 하는 것은 관광 혹은 레저 풍경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인간(건물)과 자연(꽃)의 병치라는 기본적인 테마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관광, 레저를 묘사한 풍경화들과 본질적으로 같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 


한편 독립전의 계획 측면에서도 아르장퇴유는 중요한 장소였다. 왜냐하면 1874년 전시를 준비하는데 있어 가장 많은 공력을 쏟은 인물이 다름 아닌 모네이기 때문이다. 그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한참 전시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른 1873년에는 완성한 작품의 수가 지난 해 대비 절반 가량 줄어들었을 정도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모네는 독립전을 준비하며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우선 그는 자금을 확보하는데 있어 자기 자신을 '비즈니스맨'으로 가장해야 하는 것에 대해 어려움을 토로했다. 1873년 피사로에게 보낸 한 편지는 이를 잘 보여주는데 여기서 모네는 "우리에 대해 알지 못하고 심지어는 우리의 대의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시를 위한 돈을 요청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에 대해 장광설을 토해낼 정도였다.


또한 작품을 출품할 화가들을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많은 화가들은 살롱 전시에 대항할 새로운 전시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했지만 선뜻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다. 여전히 국가에서 주도하는 전시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작가의 주요한 생존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의 판매 또한 살롱전의 출품 유무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예술가들의 최대 후원자였던 국가는 진보적 작가들 조차도 매력을 느낄 정도로 엄청난 양의 작품들을 구매하고 주문했다. 그렇기에 독립전 형성 시기 모네를 방문하기 위해 아르장퇴유를 자주 드나들었던 테오도르 뒤레 같은 비평가는 자신과 친한 화가인 피사로에게 "독립전은 앞으로의 예술적 커리어에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아는 사람들만 방문하는 전시가 될 확률이 높으니" 살롱에서 인지도를 넓히는 것이 좋다고 조언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아르장퇴유와 인상주의를 둘러싼 여러 정치, 사회, 예술적 상황들에 대해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19세기 후반 프랑스를 둘러싼 여러 상황들은 아르장퇴유를 묘사하는 여러 작품에 직간접적으로 다시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는 비단 이 지역을 대표하는 화가라고 할 수 있는 모네뿐만이 아니라 1874년 잠시 이곳에 들러 함께 사생했던 마네, 모네의 옆에서 여러 공동 작업을 진행했던 르느와르, 마지막까지 아르장퇴유에 남아 결국 이곳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카유보트까지 모두에게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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