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파리의 교외와 인상주의
에밀 졸라의 14번째 소설 <작품>(혹은 명작)에는 클로드 란티에라는 젊은 화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는 옷을 입은 남성 두 명과 함께 있는 여성 누드 작품을 그린 이후 프랑스 예술계의 주목을 한눈에 받는다. 또래 화가들 중에서 단연 돋보이던 그가 지방으로 간 것은 그즈음이었다. 작품의 모델을 서주었던 여인과 사랑에 빠져 파리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단순히 사랑이 동기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파리 예술계를 둘러싸고 있는 까탈스러운 관객, 비평가들의 비난에 진저리가 난 상태였다. 이후 그는 얼마간 지방에서 생활하다 '파리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돌아왔다. 그러나 란티에는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는 작품마다 성에 차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아들의 죽음까지 겹쳐 정신적인 고통을 받게 된다. 졸라는 이 인물의 최후를 꽤 비극적으로 끝맺는다. 전도유망하던 화가 란티에는 끝내 파리를 떠나기 이전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창작의 고통 속에서 결국 자신이 추구하던 예술적 신념과 거리가 먼 상징적인 화풍의 그림을 완성한 것을 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졸라에게 있어 란티에의 사례는 인상주의자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였을 것이다. 만약 파리라는 중심지를 벗어나게 되면 예술가는 금방 잊히게 될 것이고 결국 혁신적인 예술 운동도 똑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아르장퇴유에서 벌어진 일은 졸라가 예상한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클로드 모네는 아르장퇴유 체류 기간 동안 약 180점의 작품을 제작한다. 이는 횟수로 환산하면 12일에 한 번 꼴로 작품을 제작했다는 뜻이다. 그가 이 시기 독립전과 관련한 업무로 적지 않은 시간을 소비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그가 이곳에서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단 모네뿐만 아니라 르느와르, 시슬레와 같이 모네와 함께 작업했던 많은 인상주의자들은 아르장퇴유에서 자신의 화풍을 다져나갔다. 사실상의 도피를 선택한 란티에와 다르게 인상주의자들은 아르장퇴유에서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인상주의자들에게 교외는 앞으로 다가올 파리에서의 전투를 준비하는 장소이자 자신의 화풍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련의 장소였다.
하지만 졸라의 경고가 비단 화가 개인의 예술적 커리어에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졸라가 이야기했던 파리의 유혹이라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파리의 위협이기도 했다. 인상주의자들은 비록 몸은 파리에 없었지만 항상 그곳에 있는 관객들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아르장퇴유 체류 시기 모네가 파리에서 열릴 독립전 준비로 바빴다는 것은 사실상 이곳이 파리와 다를 바 없는 장소였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다. 더군다나 인상주의자들이 그렸던 인물, 소재, 배경 등은 빠짐없이 파리 부르주아들의 기호와 부합하는 것이었다. 란티에와 마찬가지로 인상주의자들은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것은 교외 풍경화라는 장르의 탄생과 소재의 차별적 선택이라는 측면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그들의 그림은 대상의 인상을 객관적으로 포착하겠다는 미학적 목표를 견지하고 있지만 도시의 특정 계급과 이해관계를 같이하고 있는 편향적인 회화였다.
이 지점에서 인상주의는 자본주의와의 벗어날 수 없는 관계망을 형성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지원해주는 살롱 체제 하의 후원 제도에서 이탈한 일군의 화가들은 이제 자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때 미술 시장을 지배하는 아트 딜러와 후원자는 단순히 작품을 사고팔기도 하지만 작품을 구입할 잠재적 고객들의 미학적 취향을 화가들에게 종용하기도 한다. 인상주의는 이러한 압박이 화풍에 영향을 주었던 초기 사례들 중 하나다. 물론 예술가는 그 스스로의 기질을 발휘할 때 가장 괜찮은 작품이 나온다. 이 시기 화가들 또한 자신들의 작품을 만드는 데 있어 이러한 기질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하지만 19세기의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는 화가가 모든 작품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질'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쉽게 말해, 화가들은 자신의 예술적 역량을 십분 발휘하는 필생의 역작뿐만 아니라 '판매용 그림'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련의 작품들을 제작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마치 하나의 고전처럼 인상주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들은 작품을 사실 그대로의 회화로 바라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상주의의 역사는 20세기 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온갖 신화적 일화들 속에서 하나의 영웅 서사처럼 이해되어 왔다. 주류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했지만 절치부심하여 끝끝내 화단의 중심이 된 화가들의 이야기가 현대 회화의 아버지들이라는 꼬리표에 힘입어 일종의 탄생 설화처럼 내려져 왔다. 아닌 게 아니라 인상주의자들은 올림포스의 신들처럼 마치 탈역사화된 존재인 것 마냥 다뤄졌고 몇몇 예외적 화가들을 제외하면 당대의 사회적 상황에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예술가-영웅으로 여겨졌다.
19세기말 인상주의자들은 프랑스 화단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주장하기 위해 줄곧 사실이라는 측면을 강조했다. 신화, 역사, 성경의 준거에 기대지 않는 당대 프랑스의 현실을 묘사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모더니즘이 위세를 부리던 시절 이 말은 시각적 순수성이라는 개념 하에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을 당대의 사회적 환경과 격리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오늘날 학자들은 인상주의자들의 주장이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19세기 부르주아들의 삶을 생생히 묘사했다는 점에서는 진실이지만 그 이외에 하층민들을 거의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거짓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미술사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교훈이 등장한다. 모든 미술가는 좋든 싫든, 적극적이든 수동적이든, 거장이든 평범한 화가이든 자신이 딛고 있는 사회와 교류한다는 것이다. 아르장퇴유 체류 시기 인상주의자들이 그렸던 그림들은 이러한 명제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참고문헌
John House, Impressionism: Paint and Politics, New haven and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04.
Paul Hayes Tucker, The Impressionists at Argenteuil, Washington, D.C., National Gallery of Art, 2000.
Roger Price, Social History of Nineteenth-Century France, London, Hutchinson,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