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와 불완전성 사이에서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문명의 전개 과정을 요약하며 그것이 도전과 응전의 역사였다고 말했다. 19세기 살롱의 역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살롱전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전시장은 서로 다른 예술적 생각들이 도전과 응전을 거듭하는 전쟁터였다. 그리고 이는 19세기에 생긴 갑작스러운 현상이라기보다는 17-18세기부터 미약하게나마 나타났던 조짐이 표면화, 본격화된 것에 가까웠다.
17세기 단 두 차례만 열렸던 살롱전은 국가의 프로파간다에 봉사하는 것이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예술가라는 아카데미의 가치에 부합하는가라는 의문과 살롱전이 상업적 행위의 연장선이 아닌가라는 의심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궁정과 귀족 사회에서 유행하던 바로크, 로코코 예술에 맞서 신고전주의를 고수하는 일군의 화가, 비평가들이 살롱전을 매개로 자신의 생각을 전개해 나갔다.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으로 점철되었던 19세기 초의 살롱전은 국가적 행사임과 동시에 서로 다른 화풍이 경쟁하는 대립의 공간이었다. 이후 등장하는 여러 젊은 화가들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살롱전에 도전했는데 이 시기의 도전은 살롱전 내부의 싸움만큼이나 외부에서의 균열을 야기했다는 점에서 이전 세기 보다 더 격렬한 대립이었다. 이렇듯 그 양상과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언정 18-19세기 살롱전은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제나 논란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논란은 누군가에겐 모순적으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17세기 후반 왕립 회화 조각 아카데미가 설립된 이후 살롱전은 아카데미가 추구하는 예술적 규범들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전시로 이해되었다. 국가가 살롱전에 부여한 권위는 이곳에서의 전시를 출세의 지름길이자 모든 예술가들의 필수 관문으로 만들었다. 비록 19세기에 와서 여러 대안적인 전시들이 탄생하고 화가들 또한 다양한 경로로 작품 판매처를 찾았지만 그 힘은 여전했다. 이것은 19세기 일간지에 종종 등장했던 낙방한 예술가들의 자살 소식이나 편지에 적힌 청년 화가들의 푸념 섞인 좌절에서도 드러난다. 살롱전은 분명 모든 예술가들이 지향하는 최종 목표였다.
살롱전을 운영했던 주체들은 자신들이 생각했던 예술적 규범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몇 가지 규칙들을 제정하고 심사를 통해 전시 작품을 선정했다. 대안적 전시는 공공연히 억압되었고 예술가의 커리어는 살롱전이라는 자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실제 18세기 살롱전은 매우 엄격한 규칙 하에 운영되었는데 아카데미 회원만이 전시에 출품할 수 있었고 심사 기준 또한 명확했다. 실제 이런 엄격한 심사기준은 몇몇 시기를 제외하면 줄곧 문제가 되어 19세기 낙선전이 탄생한 배경이 되기도 했다.(미술사에서 유명한 낙선전은 1863년의 낙선전이지만 이것이 최초의 낙선전은 아니었다. 최초의 낙선전은 1806년 처음으로 열렸다) 요컨대 18-19세기 살롱전이 누렸던 권위는 그것이 불안정한 대립의 공간이었다는 명제와 모순되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살롱전은 단지 보수적, 권위적이라는 꼬리표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한 맥락 속에서 작동되었다. 아카데미가 살롱전을 운영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이 내세웠던 중요한 원칙 중 하나는 그것이 상업적 전시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원칙은 아카데미가 상업적 지향성이 강했던 조합에 반발한 단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역사화에 대한 우대는 이런 원칙을 반영하는 대표적 사례였다. 역사화는 상업적 목적으로 판매되는 장르화들과 다르게 고귀한 주제를 전달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기에 전시하기 적합했다. 역사화에 대한 살롱전의 편애는 분명 아카데미 내부의 이론적 근거에 기댄 것이기도 했지만 살롱전 자체가 가진 성격에 기반한 것이기도 했다는 것이다. 관람객들에게 무료로 전시를 개방해 상업적 행위를 지양한 것이나 격년제로 전시를 열어 작품의 수준을 보장한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조치들이 역으로 원칙을 흔드는 결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무료 전시는 귀족의 특권이라 여겨졌던 전시 관람이 부르주아, 심지어는 노동자까지 전시를 볼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로운 규칙이 있다. 마치 오늘날의 전시장에서 취식 금지나 사진 촬영 금지와 같은 조항을 달아놓는 것처럼 1840년 이전까지 살롱 카탈로그에는 전시 입장 전 소지하고 있는 지팡이, 칼, 우산을 박물관 정문에 설치된 물품 보관함에 맡겨야 한다는 안내가 있었다. 이런 규칙은 분명 전시장 내부의 공간과 외부의 공간을 분리하고 내부의 공간에서 관람자 간의 계급적 차이를 최대한 줄이는 효과로 나타났다.(물론 작품과 전시 운영 요원을 보호한다는 현실적 이유가 먼저겠지만 말이다.) 이것은 귀족적 기반을 두고 있는 아카데미 회원들에게 있어서는 끔찍한 현실이었다.
격년제로 전시를 여는 것 또한 살롱 심사위원들에게 있어선 재앙이었다. 19세기 들어 예술가의 수는 단일 전시가 소화할 수 없을 정도 많아졌기 때문에 한꺼번에 출품작이 몰려들어 심사의 질이 떨어질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역사화에 있었다. 역사화에 대한 우대는 역설적이게도 살롱전과 그것의 운영 주체인 아카데미에게 치명적인 요인이 되어 돌아왔다. 살롱전에서 역사화의 높은 입지로 인해 많은 화가들이 자신들의 야심작으로 역사화를 그리게 되었다. 하지만 역사화는 그 자체로는 예술가들에게 명성을 안겨주지만 생계수단이 되지 못했다. 일단 그것은 부르주아의 집이나, 귀족의 성에 걸리기에는 너무 큰 작품이었고 내용 또한 지나치게 무거웠다. 때문에 역사화가로 명성을 얻은 화가라 하더라도 그들의 실제 수익은 보다 낮은 위계에 있는 장르화를 그려 충당했다. 역사화 장르의 성장에 있어 국가 개입이 필수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역사화를 주문하는 주체는 대부분 왕실 혹은 정부 조직과 관련이 있었고 이들의 주문이 역사화가 지속될 수 있는 경제적 원천이었다. 이들의 지원이 없다면 화가들은 어쩔 수 없이 장르화에 몰두할 수밖에 없다. 18세기 살롱전에서 역사화의 증감 추이가 정부의 후원 증감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연구는 이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심지어 심사 과정에서 엄격한 규칙이 유지되었던 18세기에도 역사화는 외부 후원이라는 변수에 취약했던 것이다. 프랑스에 공화정이 들어선 이후에도 이 경향은 변하지 않았다. 프랑스 혁명 이후 전쟁과 내부적 불안으로 국가 후원이 줄어들자 역사화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었다. 특히 혁명 시기에는 보수적 화가들이 지나치게 자유화된 규정에 반발하며 집단적으로 전시 참여를 거부하곤 했는데 이때마다 역사화 출품 수는 곤두박질쳤다.
이렇듯 18세기 살롱전에서 역사화는 그것이 가장 고귀한 예술 장르로 여겨졌다는 인식과 다르게 국가라는 외부적 요인에 좌지우지되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19세기 역사화와 국가의 관계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 때 새로운 위기를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에 들어 국가는 아카데미의 엄격한 규범 아래 제작된 역사화가 아닌 역사장르화라고 불리는 예술 장르를 선호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살롱에서 역사화가 자신의 지속성을 유지할 경제적 뒷받침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시기 보수적 비평가들이 소리 높여 이야기 한 역사화의 위기는 장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위기인 것만큼이나 장르 외부에서 촉발된 위기였다. 이제 역사화가 의존할 것이라곤 에콜 데 보자르 출신 심사위원들의 엄격한 평가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바꿔 말해 역사화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태도 변화가 이 장르의 쇠락과 직결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살롱전의 예술적 권위를 드러냈던 역사화가 그들의 몰락을 가속화시킬 아킬레스건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역사화가 직면한 불행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역사화의 위계를 지탱해 줄 심사 시스템은 19세기 들어서면서 여러 방면에서 도전을 받았다. 가장 큰 도전은 출품작이 너무 많다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미 18세기에 전시공간이 부족할 정도로 늘어난 출품작 수는 19세기 들어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폭발적 증가세를 보인다. 소수의 한정된 인원만이 참가한 심사 시스템으로는 늘어난 작품을 감당할 수 없었다. 탈락자들이 무더기로 발생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고 여기에 반발하는 화가들의 청원이 빗발쳤다. 살롱의 문턱을 두드리기를 포기하고 아트 딜러들과 사립 협회를 찾아가는 일이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1791년 살롱전이 아카데미의 통제에서 벗어나고 모든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살롱전에 출품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양원 체제(bicameral system)라 불리는 전시 방식이 제시된 것도 이러한 맥락과 관련이 있다. 양원 체제는 기존의 엄격하고 아카데미 회원 중심으로 운영되던 살롱전과 보다 자유롭고 빈번하게 열리는 살롱전을 분리하는 전시 운영 방식을 말한다. 이것은 일견 갈등을 중재할 수 있는 대안으로 보였다. 보수적 화가들은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 타협안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진보적 화가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누군가는 보수적 입장을 가진 인물들의 예술적 가치를 별도의 전시에 묶어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든다고 비판했다. 이들에게 분리는 대중으로부터 엘리트를 보호하는 미봉책에 불과했다. 반면 이러한 분리가 예술가들에게 더 많은 자유를 줄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의견이 어찌 되었든 진보적 화가들은 모든 부문에서의 자유를 원했고 그 자유가 어떠한 방식으로 구현되어야 할지에 대한 의견 차이만이 존재했다. 그럼에도 그들이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개혁안은 있었다. 출품 자격 철폐와 심사의 간편화는 그것의 대표적 예였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참가자들 간의 보통 선거를 통한 의사결정을 지지했다. 양원 체제에 대한 논의는 19세기 내내 살롱전이 도마에 오를 때마다 거론되었다. 하지만 그것의 세부적인 의견 차이로 인해 실제 실행된 것은 단 두 번(1810년, 1883년) 뿐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두 번째 실현된 이후 공식적 살롱 체제는 국가의 손을 떠났고 다시는 이전과 같은 헤게모니를 누리지 못했다.
한편 19세기 살롱전의 심사위원들에게는 새로운 방향의 위협이 다가오기도 했다. 위협의 근원은 국가였다. 아카데미와 다른 성향을 가지게 된 정부는 이제 심사위원들에게 새로운 회화, 가령 역사장르화를 받아들이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심사위원 선정에 있어 아카데미 회원이 아닌 정부 요인 혹은 정부 정책에 호의적인 예술가를 앉히도록 종용하는 것은 프랑스 정부가 살롱을 통제하기 위해 즐겨 쓰던 방법이었다. 즉, 살롱전은 19세기에 들어서 전시 운영과 후원을 담당하는 정부 조직과 살롱 출품작들의 심사를 담당하는 아카데미 회원의 대립으로 내부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더해 일부 정부 관료들은 살롱전이 그 효과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예산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1848년과 1849년 프랑스 정부 예산위원회는 살롱전을 3년에 한 번씩 개최하거나 아예 취소시키는 안에 대해 논의했는데 여기에는 보수적 인물들이 반기던 순수 예술의 수준 향상은 안중에 없었다. 전시 공간 장식, 전시 운영 직원과 심사위원 봉급, 상금과 작품 설치 비용 등등 경제적 부담이 정부 관료들에게는 우선순위였다. 때문에 살롱 심사위원의 핵심 인력이라 할 수 있는 아카데미는 원치 않게 다른 부처에게 공격을 받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다른 한 번 살롱은 외교적 관점에서 프랑스의 문화적 우월성을 드러내는 공간이어야만 했다. 그렇기에 그러한 우월성을 전세계인들이 볼 수 있도록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되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방성은 한편으로는 아카데미가 원치 않았던 하층민들까지 관람객으로 끌어들일 위험을 내포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에콜 데 보자르의 보수적 인물들은 살롱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해야 하는지를 두고 정부 요인들과 씨름을 벌였다. 이렇듯 19세기 내내 지속적으로 있어왔던 부처 간 알력 관계는 1880년대 이후 정부가 공식적으로 살롱전에 손을 떼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종합해보면 19세기 살롱전은 일반적 인식과 다르게 전방위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우선 살롱전에 대한 반감이 큰 진영은 역사화가 아닌 장르화를 그리는 일군의 화가들과 실험적 양식으로 인해 배척당한 화가들이었다. 이들 "진보적" 화가들은 보수적 성향의 인물들에겐 전시 시스템 자체의 붕괴를 도모하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또 다른 위협은 보수도 진보도 아닌 중도적 입장에 선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19세기 초반 정부의 후원을 받아 급성장 한 이후 아카데미의 보수적 규범에서 이탈한 새로운 회화를 그려냈다. 비록 양식상의 분류나 그들의 정치적 지향을 따져보았을 때 이들은 분명 보수적 진영과 친연성이 있었지만 그것이 살롱전의 규칙에 전적으로 찬성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수적인 인물들 또한 살롱전에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살롱전이 지나치게 유연한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했다. 앞서 언급한 여러 요인들로 인해 살롱전은 과거의 전시 관행보다 관대한 조치를 취하곤 했는데 그것이 보수적인 비평가들에게는 순수 예술 몰락이나 자본에 대한 굴복으로 여겨졌다. 또 한편으로 이들은 위계상 최고의 위치에 있는 역사화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살롱전이라는 전시 체계가 유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강도 높은 비판을 통해 살롱 자체의 쇄신을 도모하기도 했다. 외부적 요인에 휘둘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살롱 전시 운영 행태는 그런 점에서 보수적 인물들의 주요 비판점이 되었다.
이처럼 살롱전은 사실상 모든 진영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만 그러한 공격에도 불구하고 수 세기 동안 프랑스 예술계에서 헤게모니를 누렸다. 이를 보았을 때 살롱전이 가지고 있었던 생명력은 그것이 완고한 보수성을 가지고 있다거나 국가의 적극적은 후원 하에서 운영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사실 살롱전은 시대에 따라 그 얼굴을 다양하게 바꿔가며 변화하는 정치, 사회, 문화적 환경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비록 그 기본 논조가 보수적이고 정부친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언정 모든 측면에서 융통성 없는 태도를 보였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융통성은 양 진영에게 공격 구실을 제공했다. 보수적 인물들은 살롱이 순수 예술을 협상과 상업적 논리에 휘둘리는 타협의 산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고 진보적인 인물들은 미봉책과 기만책으로 본질적인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살롱전이 19세기 동안 보여주었던 키메라적인 특성은 전시가 지속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것은 양 진영의 갈등이 극에 달한 순간에도 살롱전을 그 대결의 공간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쿠르베, 마네와 같은 인물들이 살롱전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프랑스 예술계의 상수처럼 남아있었다.
오늘날의 고지에서 살롱전은 분명 미술계의 보수성을 대표하는 전시다. 살롱전은 시대의 변화에 충분하게 부응하지 못했고 그 결과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예술의 공론장으로 기능하던 살롱전의 무대는 이제 난립하는 독립전과 대안적 살롱 전시들에게 자리를 내주게 된다. 추상화로의 경로를 알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 살롱전은 지난 시기의 영광을 대변하는 시대착오적인 체계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것이 현대 미술의 산파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살롱이 현대 예술에 기여한 바가 아무것도 없다는 일반화로 이어지는 것은 곤란할 것이다. 진보적 예술가들의 새로운 방향 전환은 살롱에 대한 도전과 이에 뒤따르는 좌절로부터 연원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때문에 살롱의 위기와 몰락은 "충분히" 변화하지 못한 것에서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19세기 미술은 단지 반쪽짜리 서사만을 가지게 될 것이며 그 시대에 대한 역사상 또한 충분히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살롱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참고문헌
Albert Boime, The Academy and French Painting in the Nineteenth Century, 1986.
Patricia Mainardi, The End of the Salon : Art and the State in the Early Third Republic, 1993.
김선형, 프랑스 살롱전시회의 기원과 역사(1667-1799) Ⅱ. 살롱전시회와 미술비평가들, 프랑스 문화 연구, Vol. 50, 2021.
프랑스 내셔널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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