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번역은 2010년 출간된 책 <그로의 자살, 제국의 화가들과 낭만주의 세대 Le Suicide de Gros: Les peintres de l’Empire et la génération romantique.>에 대한 세베린 소피오(Séverine Sofio)의 서평을 번역한 것입니다. 책에 대한 서지 정보는 아래 링크에서 확인해주세요.
Amazon.fr - Le suicide de Gros: Les peintres de l'Empire et la génération romantique - Allard, Sébastien, Chaudonneret, Marie-Claude - Livres
- 서평은 2012년 Nineteenth-Century Art Worldwide 봄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ww.19thc-artworldwide.org/spring12/le-suicide-de-gros-by-sebastien-allard-and-marie-claude-chaudonne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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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5년 6월 27일, 어부들이 센 강에서 물에 빠져 죽은 남자 한 명을 건져 올렸다. 그 남자의 이름은 장앙투안 그로, 당대에 가장 유명한 화가 중 한 명이었다. 자크루이 다비드의 제자이자 나폴레옹 제국 시기를 대표하는 이미지를 창조한 그로는 불과 몇 주 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살롱에 출품한 상태였다. 프랑스 아카데미의 회원이자 레지옹 도뇌르의 수훈자, 존경받는 화가이자 선생이었던 64살의 그로는 건강에도 문제가 없었다. 만약 그의 가정 상황이 문제였다면(사실 이 시기 그로와 같은 특권적 부르주아 계층에게 있어 행복한 결혼생활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또한 진정한 향락주의자로 알려졌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세바스티앙 알라르(Sébastien Allard)와 마리-클로드 쇼도네(Marie-Claude Chaudonneret)가 간결한 설명과 풍부한 삽화가 들어간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참고로 이 책은 최근에 권위 있는 문학상인 2011 프랑스 학술상을 받은 바 있다) 그로의 사례에 대한 저자들의 분석을 통해 19세기 첫 10년 동안 프랑스 예술계의 전반적인 구성을 엿볼 수 있다. 저자들이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기 위해 제시한 첫 번째 증거는 그로의 가족들이 자살을 숨겼다는 사실이다. 그로의 자살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것은 50년이 지난 뒤인 1880년의 일로 쥐스탱 트리피예르프랑(Justin Tripier-Lefranc)이 그로에 대한 자서전을 쓰며 처음으로 알려졌다.[1] 실제로 저자들은 그로의 죽음이 동시대에 얀루이 지로데(Anne-Louis Girodet, 1767–1824, 테오도르 제리코(Théodore Géricault, 1791–1824) 혹은 피에르나르시스 게렝(Pierre-Narcisse Guérin, 1774–1833)과 같이 몇 년 전 사망했으며 예술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죽음과 비교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화가들은 비극적인 고통으로 인해 너무나 빨리 삶을 마감했는데 이로 인해 예술가들이 때때로 겪는 잔혹한 운명의 전형적인 희생자로 여겨졌다. 그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은 사실 새롭게 등장한 관념 중 하나로 이는 그들의 천직, 다른 말로 하면 신의 선택을 받아 예술에 맹세한 사람들이 "사명"을 완수하고 인류를 위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과 관련이 있다.[2] 그러므로 만약에 운명이 그들의 존재를 앗아가기로 결정했다면, 대중은 탄생할 수도 있었던 대작의 존재로 인해 슬픔이나 좌절을 느낄 것이고 한편으론 죽은 예술가들을 진정한 순교자로 기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예술가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불명예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본래 대중들이 누렸어야 할 어떤 것, 즉 소명과 예술을 빼앗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념에 따라 그로 자신도 목숨을 끊기 몇 달 전 똑같은 선택을 했던 화가 레오폴드 로베르(Léopold Robert)를 비난한 바 있다.
따라서 저자들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화가의 선택으로 인해 그의 가족들과 친구들이 화가의 죽음을 기릴 수 없었고 슬픔을 이겨내며 마지막 존경을 표할 수 있는 기회 또한 막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관점에서 또 다른 설명이 제기될 수 있다. 이 시기에 물에 빠져 죽는 것은 여성적인 방법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여겨졌다.[3] 따라서 그로의 죽음은 콩스탕스 메이어(Constance Mayer, 1776–1821)의 부정적인 반영으로 여겨졌다. 콩스탕스 메이어는 14년 전 레오폴드 로베르와 마찬가지로 그녀 스스로 목을 그어 목숨을 끊었는데 이렇듯 폭력적이고 피가 난무하는 죽음은 여성들이 잘 선택하지 않았기에 보다 "남성적"인 방식으로 여겨졌다. 메이어의 죽음은 예술계에서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1831년 L'Artiste에 실린 석판화에 이를 다루는 외젠 데베리아(Eugène Devéria)의 그림이 실렸을 정도였다.[4]
다음장 "새로운 사회에서 제국의 화가들"은 부르봉 왕조의 복권이라는 폭력적 파열이 그로 세대의 역사화가들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 다루고 있다. 이 장에서 저자들은 1815년 이후 예술 생산 조건의 급격한 변화를 가져온 중대한 정치적, 문화적 변화에 대해 예술가들(그로와 과거 다비드 아틀리에 동료들이었던 프랑수와 제라르, 게렝, 지로데)이 각기 다른 반응을 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역사화상(Prix décennal pour la peinture d'histoire)과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였던 1814년 살롱을 예로 들면 저자들은 그 어떤 화가들보다 그로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가장 곤란한 입지에 놓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난 10년간 그는 나폴레옹 정권과 동시대 프랑스의 영광을 시각화한 작품들의 가장 유명한 전문가였다. 그러므로 그는 정치적으로 타협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 제국의 예술 커미션의 매우 개입적인 체계의 붕괴로 인해 예술적으로도 동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1820년대에 과거 정권의 엄격한 감독 체계는 주제 선택에 있어 거의 완전한 자유와 살롱을 위한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내재적인 의무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삶에 대한 요구로 대체된 상황이었다. 이런 삼중의 변화는 그로의 성향과 잘 맞지 않았다. 비록 기술적으로는 존경할 만 하지만 1815년 이후 그로가 제출한 작품은 "기묘하거나" 동시대 취향과 완전히 부조화한 정치적으로 기이한 주제들로 채워졌다. 그 결과 다비드의 아틀리에서 수학하던 그의 라이벌이자 전직 동료들 혹은 그의 제자들이 생존 작가들을 위한 국립 박물관인 뤽상부르그 박물관에 작품이 전시되는 것과 달리 그 어떤 작품도 몇 주 이상 전시되지 않았다. 이와 유사하게 그로는 아카데미 회원 지위와 레지옹 도뇌르의 오피시에(officier) 작위를 얻기 위해 투표를 요청해야 했는데 이것은 제라르, 지로데, 게렝, 심지어 그로보다 젊은 앵그르가 자연스럽게 이러한 영광을 얻었던 것과는 상반되는 결과였다. 이런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그로가 분명히 굴욕감을 느꼈을 것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로는 본인의 성공을 이끌었던 예술 체계의 끝을 목격한 것 이외에도 스승인 자크루이 다비드의 정치적 망명 또한 감내해야 했다. 1825년 그의 스승이 죽기 전까지 그로는 여전히 스승을 존경하고 있었다. 그들의 서신에서 그로는 불확실성과 끔찍할 정도의 불안감을 드러내면서 다음 작품을 위한 주제 선택에 관해 스승의 결정 혹은 교육적 조언을 기다리곤 했다. 만약 다비드의 그림자가 1820년대 예술계에 떠돌고 있었다면 다비드의 이전 제자들 중 두 명의 화가가 이것을 주도하고 있었다. 우선 지로데는 분명 가장 헌신적인 역사화가였다. 하지만 선생으로서 그의 가르침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반면 제라르는 그의 공식적인 직함과 그 유명세와 함께 특정 인물만 출입할 수 있었던 자신만의 살롱으로 인해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로 여겨졌다. 1824년 지로데의 죽음과 이후 제라르의 강제적인 은퇴는 앵그르가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1820년대 말, 독특한 스타일과 재능 있는 학생들 덕분에 앵그르는 예술계에서 핵심적인 인물로 거듭났다. 마지막 2개의 장(회화의 새로운 세대와 살롱과 박물관의 실험하는 아틀리에 Les ateliers à l'épreuve du Salon et du musée)에서 우리는 그로가 부차적인 지위에 머물러 있었으며 모두가 그의 새로운 회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점을 보게 될 것이다. 프랑스 전쟁화의 진화 과정에 대한 탁월한 설명을 통해 저자들은 1815년 이후 그로가 비평가들과 젊은 예술가들이 시대에 뒤처진 것이라 여겼던 스타일을 복권시키려는 때 화가가 가지고 있었던 대중 취향에 대한 오해에 대해 논의한다. 이와 유사하게 그로는 살롱에서 오래된 규칙을 고수했으며 동료 화가들이 그들의 주요 작품을 전시회에 전달할 때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기회 지연의 전략이나 비평가들과 대중을 사로잡기 위해 사용하곤 했던 명백한 전략들을 거부했다. 저자들에 따르면 순수한 다비드주의자로 남고 싶어 했던 그의 의지와 "길 잃은" 프랑스 화파와 싸우려고 했다는 점은 어떤 "예술적 용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다비드와의 편지에서 드러낸 불안감과 끊임없는 의심을 고려할 때 다소 역설적이다.
스승의 유산을 전수하려는 그로의 비융통성은 그가 운영하던 아틀리에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1820년대 초부터 다비드의 마지막 제자들은 스승이 망명한 이후 다시 모였다. 그러나 로마상에서의 몇몇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로의 아틀리에는 그로와 그의 스승이 기대했던 성공에 미치지 못했다. 그의 엄격한 교습법에 실망한 젊은 화가들은 조금 더 열려있고 매력적인 피에르나르시스 게렝이나 루이 에르셍(Louis Hersent, 1777–1860), 오라스 베르네(Horace Vernet, 1789–1863)의 아틀리에로 떠났다. 게다가 저자들은 그로의 보수성이 로마상 장학금을 받고 있는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의 화가들의 동요의 간접적인 원인으로 보였다고 지적한다. 이 젊은 화가들은 로마상을 받지 않고 살롱에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그들의 동료들의 예기치 못한 성공과 맞서야 했다. 반면에 가장 권위 있는 상을 받은 수상자들은 몇 년 동안 이탈리아에 갇혀 대중과 행정부와 떨어져 있어야 했는데 이로 인해 그들의 이름과 성취가 잊힐 가능성이 있었다. 로마상의 제한적인 평가절하는 사실상 예술계 진화의 상징이었다. 4장의 한 부분인 "박물관, 해방과 모방의 공간"에서 이러한 변화에 대한 간략하고 명쾌한 설명을 제공한다.
1830년 이후 그로는 대부분의 학생을 잃었으며 로마상은 앵그르 아틀리에의 학생들에게 돌아간다. 두 아틀리에의 라이벌 의식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1835년 앵그르가 로마 프랑스 아카데미의 교장으로 임명된 것은 그로에게 있어 씁쓸한 패배였을 것이다. 특히 같은 해 출품한 그의 주요 작품인 <헤라클레스와 디오메데>가 기대와 달리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국가가 작품을 구매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다비드의 유산을 보존해 젊은 화가들에게 그것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이 실패했다는 것을 그가 어찌 느끼지 못했을까?
물론 누군가는 그로가 왜 스스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는 선택을 했는지 확실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저자들의 매력적인 설명은 19세기 1/4분기 예술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 준다. <그로의 자살>은 새로운 종류의 전기다. 이것은 단지 예술가의 삶 마지막 20년 만을 연구한다거나 그로에 대해 살펴보는 것만큼이나 동시대 다른 역사화가들에 대해 살펴보는 것을 넘어 명백한 답이 없는 질문(왜 그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의 핵심에 다가가고 있다. 표준적인 미술사의 관점에서 사소해 보이며 무의미한 심리사회적 설명의 함정으로 빠질 위험이 있는 사건(늙고 시대에 뒤처진 예술가의 죽음)에서 출발함으로써, 저자들은 얽히고설킨 배경들과 사실들을 배열해 제시해 독자의 지성을 신뢰하고 있다. 책의 목표는 한 개인의 본질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행동을 이해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역사적 순간에 예술계에서 그의 위치를 정확하게 재구성하는 데 있다. 저자들은 결과적으로 그로의 행동, 작품, 결정을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미적 맥락과 연결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동료들, 라이벌들의 행동, 작품, 결정과도 연결함으로써 예술 생산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세심하고 상세한 분석을 시도한다. 저자들이 예술 커리어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과 개인적, 집단적 요소들이 동시에 형성되는 다양한 층위들을 따라가려고 하기 때문에 각각의 상황에 대한 재맥락화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연대기를 왔다 갔다 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이것이 책에 대한 내 유일한 불만이다)로 인해 시간선을 왔다갔다 하는 그들의 서술 방식이 독자들을 피곤하게 할 수 있고 때때로 사건들과 시간의 흐름을 놓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결함은 개인들의 삶을 그들의 복잡함 속에 놓으려는 저자들의 칭찬할만한 의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용서할 수 있다. 특히 이 책이 가진 유사 "실험적" 성격과 이 책의 목적, 즉 인간과 예술의 사회적 본성을 보여주겠다는 가장 야심 찬 목적을 보여준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렇다.
세베린 소피오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 파리
severine.sofio[at]cresppa.cnrs.fr
[1] Justin Tripier-Lefranc, Histoire de la vie et de la mort du Baron Gros (Paris, 1880). 그로에 대한 또 다른 전기로는, 트리피예르프랑이 쓴 전기 이후 약 100년 뒤에 쓰여진 데이비드 오브라이언(David O’Brien)의 책 Antoine-Jean Gros, peintre de Napoléon (Paris: Gallimard, 2006)가 있다.
[2] Paul Benichou, Romantismes français, vol. I: Le Sacre de l'écrivain; Le Temps des prophètes, and vol. II: Les Mages romantiques; L'École du désenchantement (Paris: Quarto-Gallimard, 2004)
[3] Richard Cobb, Death in Paris: the Records of the Basse-Geôle de la Seine. October 1795– December 1801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78). 이 시기에 목메달아 죽는 것은 남자들이 자살을 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으며 , 여성들은 대부분 물에 빠져 죽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주제에 관해 보다 포괄적으로 다루는 책은 다음을 보라. Emile Durkheim, Le Suicide. Etude de sociologie (Paris: Presses universitaires de France, 2007 [1897]).
[4] 젠더 분석으로 19세기 남성과 여성 예술가들의 자살을 다루는 것은 흥미로운 연구거리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 예술가들에게 있어 자살은 살롱 전시가 예술가의 커리어에서 중요해졌다는 점과 심사위원들에 의해 낙선한 젊은 예술가들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 사이의 모순에 저항하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100명의 유명 화가들이 의회에 제출한 1840년 탄원서에서 작품 선정 방식에 대한 개혁 요구는 심사위원들의 불공정한 의사결정 사례에 근거한 것이었다. 탄원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젊은 여성 화가 카미유 유대(Camille Eudes, 허구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작품이 두 번 연속으로 낙선한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Archives des Musées Nationaux, série X Salon, 1840, “심사위원들의 권한남용에 대한 예술가들의 탄원서 Pétition des artistes contre les abus du ju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