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델 Jan 18. 2024

들라크루아의 초기 커리어와 프랑스의 권력게임

외젠 들라크루아, <키오스 섬의 학살>, 1824, 캔버스에 유채, 루브르 박물관.


원문 : Elisabeth A. Fraser, Uncivil Alliances: Delacroix, the Private Collector, and the Public, Oxford Art Journal, 1998. (무례한 동맹: 들라크루아, 개인수장가 그리고 대중)


우리는 흔히 진보적 예술은 주류 혹은 제도와 기관의 매몰찬 외면 속에서 꽃핀다 생각한다. 이 관념을 뒷받침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다. 새로운 형식 실험을 도입했던 19-20세기 젊은 화가들의 투쟁이 현대 예술의 페이지 곳곳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투쟁의 장에서 예외적 사례가 하나 있으니 그것이 바로 낭만주의다. 19세기 초 고전주의와 대립하며 유럽 문화계의 한 축을 이뤘던 낭만주의는 미술로 한정하자면 그것의 탄생 초기부터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들라크루아의 초기 커리어는 이를 잘 보여준다.


 1820년대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언제나 논란거리였다. <키오스 섬의 학살>(1824),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1827)로 대표되는 이 시기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고전적 규범에 맞지 않는 파격적인 형식과 도발적 주제로 악명 높았다. 보수적 비평가 델레크루즈는 그의 작품이 출품된 1824년 살롱에서 "추함과의 전쟁을 선포한다"라고 까지 말하며 작품에 대한 성토를 쏟아냈다. 하지만 떠들썩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살롱전에서 자취를 감춘 적이 없었고 심지어 상을 받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정부는 왜 낭만주의로 무장한 젊은 화가들을 지원했을까?


엘리자베스 프레이저의 글 「무례한 동맹: 들라크루아, 사설수장가 그리고 대중 Uncivil Alliances: Delacroix, the Private Collector, and the Public」은 1820년대 들라크루아 작품의 후원 양상을 분석하며 저자가 "무례한 동맹"이라 명명한 보수적 후원가, 비평가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다. 특히 저자는 <키오스 섬의 학살>이 뤽상부르크 미술관 소장된 과정에 대해 상세하게 분석하며 이를 기반으로 부르봉 가문과 오를레앙 가문 사이의 알력 관계가 들라크루아 작품의 행방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있다. 


1824년 살롱에 공개된 <키오스 섬의 학살>은 공개 당시 관객들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적나라하게 표현된 그리스 인들의 신체 묘사와 기마 초상을 변형한 투르크 인에 대한 묘사는 그리스에 대한 유럽 사회의 동정적 여론과 대비되는 것이었다. 고귀하게 표현되어야 할 그리스인의 모습은 들라크루아의 화폭에서 끔찍한 희생자로 묘사된다. 역사화의 미덕인 영웅적인 행위는 실종되고 그로테스크만이 남아있다. 그런데 작품이 관객들에게 남긴 부정적 인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 작품을 구매하기로 결심한다. 이는 분명 파격적인 조치였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은 정부가 소장하기에는 지나치게 논쟁적일뿐더러 그것이 담고 있는 함의가 정부에 호의적이라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정부는 살롱이 개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작품 구매를 결정했다. 일반적으로 작품 구매는 살롱 전시가 끝나갈 시기에 결정되며 이를 살롱의 폐회식에서 발표한다. 더구나 이런 예외적 결정을 내리기 위해 관료들은 통상적인 예술품 구매 절차를 무시했다. 보통의 경우 작품 구매는 왕의 재가를 먼저 받는 것이 순서였다. 하지만 1824년 관료들은 작품 구매를 왕의 허락 없이, 더 정확히 말하면 왕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통해 약식으로 진행해버렸다. 다시 말해 이 시기 프랑스 정부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왕의 명령 하에 구매했지만 실제로 왕이 이것을 허락한 것은 구매 이전이 아니라 구매 이후의 일이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선을 넘은 행위였다. 


사건은 1824년 9월 6일 왕실박물관의 관장이었던 오귀스트 드 포르뱅(Louis Nicolas Philippe Auguste de Forbin, 1777-1841)이 왕실 건축부의 순수예술국 국장이었던 라로슈푸코(Ambroise-Polycarpe de La Rochefoucauld, 1765-1841)에게 쓴 한 제안서에서부터 시작한다. 편지에서 포르뱅은 사안의 긴급성에 대해 언급하며 들라크루아, 프랑수아마리우스 가르네(Francois-Marius Garnet), 샤를카이우 르누(Charles-Caius Renoux), 테오도르 귀댕(Theodoree Gudin)의 작품을 구매할 것을 촉구했다. 제안서에서 포르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 주목할만한 작품들을 보통의 관례적 절차보다 훨씬 더 빨리 구매할 것을 건의드리는 바입니다. 이는 작품들이 개인 수장가들에게 구매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또한 수장가들이 스스로 예술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이 작품들을 후원하지 않는 정부를 부당하게 비난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제안서를 받은 라로슈푸코는 작품 구매를 승인했고 정부는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6000천 프랑에 구매한다. 작품 구매가 결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 21일 라로슈푸코는 왕에게 작품 구매의 사후 승인 경위에 대해 설명한다. 


9월 초 저는 왕실박물관 관장으로부터 예술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개인 수장가들이 순수한 목적보다는 당파적 목적으로 이 주목할만한 작품들을 구매하려고 한다는 조언을 들었습니다. 


이후의 글에서 라로슈푸코는 이미 사설 수장가들이 몇몇 중요한 작품들을 구매했다는 점을 언급하며 훌륭한 작품들을 확보하기 위해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덧붙인다.


하지만 라로슈푸코의 입장에서 작품 구매의 사후승인이라는 조치는 분명 위험한 도박이었다. 포르뱅의 제안서가 제출된 지 한 달 뒤인 10월 6일 라로슈푸코는 새로 즉위한 샤를 10세에게 보내는 보고서에서 작품의 임의적인 구매 행태를 막기 위한 공식적인 심사 기관을 설립할 것을 제안한다. 또한 10월 12일에는 포르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그가 왕의 허락 없이 월권행위를 저질렀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에 포르뱅은 처음 제출했던 제안서와 동일한 주장을 견지하며 자신을 방어했다. 즉,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포함한 3명의 작가들의 작품은 사설 수장가들이 구매할 가능성이 높은 작품이었고 그 때문에 빠른 조치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포르뱅의 항변이 담긴 편지를 끝으로 작품 구매 사건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으며 표면적으로는 사건이 일단락된다. 


사건의 전 과정을 보았을 때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왕실 박물관의 수장이었던 오귀스트 드 포르뱅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의 핵심을 알기 위해서는 포르뱅이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의 작품을 구매한 동기, 그리고 동기의 원인을 제공한 사설 수장가의 공격적인 작품 구매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포르뱅은 왕정복고 시기 정부의 예술 정책 전반에 관여한 핵심 관료 중 한 명이었다. 또한 그는 보수 일변도였던 루이18세 치하의 관료 조직 내에서 그나마 진보적 입장을 취하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뤽상부르그 미술관 설립을 제안해 동시대 미술을 수용하고자 한 것이나 금기시되었던 나폴레옹 시기의 작품들을 대중들에게 공개하고자 한 것은 그의 진보적 성향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다. 특히 형식적인 측면에서 논란이 되었던 제리코의 <메두사호의 뗏목>을 구매한 것은 그가 왕정복고기 관료들 중에서 이질적인 존재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라로슈푸코에게 보낸 제안서에도 그의 진보적 성향은 드러난다. 제안서에서 언급된 작가들은 가르네를 제외하면 대부분 젊은 작가들이었다. 또한 장르에 있어서도 국가가 선호하는 역사화가 아닌 풍경화, 장르화 같이 다소 마이너한 장르들이었다. 어찌보면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그의 제안은 일정 부분 지난 정권의 국가 후원 체계에 대한 반발이었다. 나폴레옹 집권기 예술 후원은 궁정 화가라고 불리는 소수의 역사화가들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강했다. 포르뱅은 이들의 존재가 예술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 요인이라 생각했다. 젊은 화가들에게 돌아가야 할 지원이 이들에게 불필요하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가 국가의 예술 정책과 관련한 여러 결정권을 가지고 있을 시기 이들 궁정화가 출신 예술가들은 끊임없는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가령 포르뱅은 앙투안 장 그로를 "불완전한 재능을 가진 무뚝뚝하고 허영심이 강한 인간"으로 묘사하며 프랑수아 제라르에 대해서는 "질투심이 많고 진실되지 못한 아첨꾼"이라고 비난했다. 포르뱅에게 있어 궁정 화가 출신 예술가들은 영예란 영예는 다 받아놓곤 예술에 아무런 기여도 안 하는 권력의 시종들이었다. 


프란츠 크사버 빈터 할 터, <루이 필리프 1세의 초상>, 1841, 베르사유궁.


하지만 그의 선택이 단지 과거 예술 정책에 대한 반발심에 근거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초 프랑스 문화계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었다. 미술에서 절대적인 지위를 누리고 있던 살롱 전시는 새로운 수장가, 사립 갤러리와 협회, 사립 경매 등 미술품을 전시, 구매할 수 있는 다양한 수단들에게 도전받고 있었다. 특히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Louis Philippe, the Duc d'Orleans, 1773-1850)를 중심으로 한 예술 후원은 이런 도전 중 가장 위협적인 것이었다. 


1814년 21년 동안의 망명 생활을 끝내고 파리로 돌아온 루이 필리프는 가문의 유산과 명예를 되찾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다. 황폐화된 팔레 로얄(Palais Royal)을 개조하며 과거의 모습을 복원하는 한편 혁명 과정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가문 소유의 예술품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이뿐만 아니라 당대인들이 새로운 화파(Nouvelle Ecole)라 불렀던 낭만주의 화풍을 비롯해 동시대 미술 작품들을 후원하며 예술가들과 지식인들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특히 예술 분야에 있어 루이 필리프의 영향력은 그의 컬렉션을 왕실 컬렉션과 비교할 정도로 엄청났다. 이러한 비교 자체가 왕실이 고수하고자 했던 절대적 권위에 큰 타격을 주었다.


문제는 이러한 루이 필리프의 행위가 단순히 잃어버린 가문의 영광을 찾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의 예술품 수집과 후원은 분명한 정치적 지향 아래 행해졌다. 이것은 루이 필리프가 공공연하게 자유주의적 성향의 예술가, 문인, 지식인들을 후원하고 그들에게 토의 공간을 제공했다는 점을 통해 드러난다. 시민적 권리를 존중하겠다는 루이 필리프의 천명은 절대왕정으로의 복고를 꿈꾸는 루이 18세에 대한 공공연한 반발로 읽힐 소지가 다분했다. 당대인들 또한 팔레 로얄이 튈르리 궁의 왕실 세력과 맞설 수 있는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포르뱅의 조치는 단지 자신의 성향을 업무에 관철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오를레앙 가문과 부르봉 가문 간에 벌어진 광범위한 예술품 수집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포르뱅이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사도록 제안한 1824년, 살롱에서 나폴레옹 전쟁을 소재로 한 회화 작품들의 전시 여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자 포르뱅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만약 우리가 예술가의 작업실이나 오를레앙 공작의 갤러리에 매일같이 전시되고 있는 이 작품들을 거부한다면 대중들이 호기심에 차서 그 예술가들에게 몰려갈 것이라는 두려움이 없어지는가? 의심할 바 없이 우리는 신중한 행동에 대해 악의적인 해석이 가득한 적대적 팜플렛을 만들고 짜증나는 생각을 조장하는 전시회의 부활을 보게 될 것이다.


포르뱅에게 있어 논란이 될만한 작품을 거부하는 것은 되려 주도권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만약 살롱이 그런 작품들의 출품을 거부한다면 대중들은 그것을 외면하기는커녕 다른 대안적 전시 장소로 몰려가 작품을 구경할 것이었다. 18세기 살롱은 대중들의 취향을 계도하고 국가에서 지정한 올바른 시각적 이미지를 널리 퍼트리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세기 초 살롱은 그것이 가진 권위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대중들의 선택에 자신을 맞춰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당대의 비평가들은 이런 변화를 빠르게 눈치챘다. 스탕달은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비공식적 전시들이 정부 후원 하에 열리는 살롱전 보다 훨씬 더 동시대의 취향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 진보적 비평가들이 살롱에 대해 비판하면서 자주 사용했던 말은 laissez-faire, 즉 자유방임이었다. 이런 현상은 19세기 초 정치적으로는 왕정복고가 진행되었음에도 사회, 문화적인 관점에서 혁명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대중 취향은 살롱 전시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버마스식으로 말하자면 예술의 공론장은 더 이상 살롱이라는 독점적 장소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다. 들라크루아의 작품을 구매한 프랑스 정부의 결정은 어쩌면 이런 분위기를 미리 파악해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조치가 역으로 살롱과 대중의 분리를 보여주는 한 징후였다. 살롱은 이제 취향을 선도하는 위치에서 취향을 뒤따르는 위치가 된 것이다.


들라크루아의 초기 커리어를 바라보는 시각 또한 이러한 프랑스 사회의 변화 속에서 파악할 수 있다. 과거 분석들에서 그의 작품은 낭만주의의 신화적 예술가상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작가 개인의 감성과 상상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작품을 만드는 고독한 창조자 혹은 예술가-천재의 이미지는 들라크루아를 비롯한 낭만주의 예술가들을 설명하는 적합한 인간상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하지만 살롱이 더 이상 대중들의 취향과 일치하지 않는 시대에 예술가-천재는 자신의 창조성을 발휘하는 와중에도 그림을 감상할 대중을 의식해야했다. 요컨대 들라크루아의 1820년대 회화가 가진 대담한 형식 변화는 그것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가 역사화에 걸맞은 거대한 크기의 작품을 전혀 역사화 같지 않은 방식으로 그린 것은 살롱 이외의 대안적 공간이 이 작품을 포용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1824년 들라크루아는 <키오스 섬의 학살>을 완성하면서 루이 필리프의 갤러리에 수 차례 방문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 포르뱅 또한 들라크루아의 스튜디오를 방문하여 그의 작품들을 감상했다. 추정컨대 이 시점에서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작품이 수용될 수 있는 범위 내에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이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들라크루아는 국가와 대중이라는 두 축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작품의 가치를 평가했다. 이것은 이후 등장하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겪게 될 미래라는 점에서 단지 한 개인의 천재성이라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프랑스 사회의 장기적 변화와 연결된다. 들라크루아의 초기 커리어는 이후 시작될 거대한 변화의 편린이라는 점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낭만주의를 탄생시킨 아틀리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