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고독

명자꽃

by 이든

명자꽃 전설이 있다. 의붓남매가 살았는데 오누이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성장해서 오빠가 동생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이 너무 괴로워서 오빠가 스스로 집을 떠났다. 떠난 오빠를 그리워하다 여동생이 죽었고 여동생이 죽은 자리에서 명자꽃이 피었다. 이 전설 때문에 명자나무는 집 안에 심지 않는다고 한다.
아직 꽃들이 피지 않은 4월, 명자의 요염한 꽃잎을 보면 황홀해진다. 샛노란 꽃가루와 초록 잎사귀와 연붉은 꽃송이가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이때 명자나무는 벌에게도 인기다.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꽃잎 속으로 벌들이 앵앵 수분한다.

명자나무 가지치기를 했다. 웬만하면 생긴 대로 자라도록 두는데 지나다닐 때마다 옷을 잡아채서 가지들을 잘라냈다. 잘라낸 가지들은 말렸다 불쏘시개로 쓰려고 모아두었다.

명자꽃이 지자 메리골드가 쑥쑥 올라왔다. 메리골드는 돌보지 않아도 씨앗을 퍼뜨리고 발아도 잘 된다. 뽑아서 던져버려도 뿌리를 내릴 만큼 생명력이 강하다. 줄기를 세워 올릴 힘이 없으면 땅을 포복하며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곧게 키우려면 지주대를 받쳐야 한다. 명자나무 가지들로 메리골드 지주대를 세웠다.

추석 무렵 메리골드는 절경을 이뤘다. 메리골드는 직물염색 재료로 쓰기도 하고 꽃잎을 말려 차로 마시기도 하는데 루테인 성분이 많아서 눈 건강에 좋다고 알려졌다.

가장 많은 시간을 텃밭에서 보내고 있다. 추석이 지난 텃밭은 별로 할 일이 없다. 사진에 담으려고 나비, 벌나방을 쫓아다니거나 풀들 사이에서 불쑥 나타나는 사마귀를 관찰한다. 사냥을 하거나 성큼성큼 다리를 움직이는 모습을 기다리는데 사마귀는 꼼짝하지 않는다. 내가 사라져야 사마귀가 움직이는 것 같다.

이 텃밭 주인은 강 여사였다. 강 여사는 내게 텃밭을 남겼는데 사람들은 이 텃밭을 계륵이라고 했다. 땅 모양이 길쭉해서 쓸모가 없는 게 마치 먹을 게 없는 닭의 갈비뼈 같다는 말이었다.

잡풀 무성한 폐가로 둘 수 없어서 허브나 초화류를 키우고 있다. 강 여사가 이 텃밭을 가꿀 때는 계절마다 꽃과 채소, 열매가 바지런히 피고 지는 생명 넘치는 집이었다. 경상도 사투리가 까랑까랑 마당을 울리는 활기찬 곳이었다. 토끼, 닭, 개도 키웠다. 별의별 생명들이 다양하게 살면서 토양과 기후와 사람을 건강하게 했다. 명자나무도 강여사가 심었다.

강 여사는 이 텃밭집을 떠나고 싶어 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아파트에서 편리하게 살고 싶다고 했다. 그 바람은 병들어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내 집에서 이루어졌다.

며칠 전 메리골드 지주대로 세워놓은 명자나무 가지에서 새잎이 돋아났다. 놀랐다. 무슨 대사가 꽂아놓은 지팡이가 은행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사실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기적인가?', 흥분돼서 허둥지둥 사진을 찍었다. 광택제를 바른 것처럼 반짝거리는 잎사귀를 담아내려고 애썼다. 새싹을 근접 촬영도 하고 지주대임을 알 수 있게 메리골드까지 찍기도 했다. 강여사가 돌아온 것 마냥 기뻤다.

남들이 계륵이라고 했던 이 텃밭은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를 알려준다. 외로움이 혼자라는 쓸쓸함이라면 고독은 혼자 있는 상태를 안온하게 느끼는 감정 같다. 나는 텃밭에 혼자 있지만 다른 생명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 텃밭이 만들어준 푸성귀를 내가 먹고 내가 만든 퇴비를 흙이 먹고 그 흙이 벌레를, 식물을 키운다. 서로가 돌본다. 그래서 텃밭은 고독하고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