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옛날 기억
문득, 옛날 생각이 났다.
신선한 새벽공기를 한 모금 마시며 차가운 시멘트 바닥, 자갈 섞인 땅에 한발 내딛는 순간,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우중충한 하늘, 차가운 변전소 설비들이 정렬해 있는 모습을 보며, 내 꼴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 나는 이름도 낯선 중동 어딘가의 발전소 건설 엔지니어였다. 꽤 큰 용량의 화력 발전소일수록 냉각을 위해 바다와 인접하고 있는데 그곳도 바닷가 근처였다. 현장에 출근하면 지중해의 비릿한 바다내음이 나를 반겼다. 20대 초반의 어린 기사(엔지니어)였던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였다. 당시 그 회사의 건축 직렬 신입공채 경쟁률이 500:1이었는데, 기계직렬은 수요가 있어서 조금 더 낮았다. 지방대 학벌에 국내 굴지의 5대 건설사에 취업하여 해외현장에 파견되다니, 스스로가 대견하고 뿌듯했다. 현장에 부임할 때까지는 말이다. 그 생각이 바뀌기까지는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았다.
그곳은 거대한 건설현장이었다. 아파트 건설과는 차원이 다른 기계덩어리들의 연속이었다. 내가 속한 배관팀은 수많은 기계설비들의 혈관겪인 배관을 시공하는 일을 했다. 나는 그 팀의 막내 현장엔지니어였다. 그때만 해도 해외 플랜트가 잘 나가던 시절이라 건설사는 국내 아파트 현장에서도 인력을 끌어다가 현장에 배치하였는데 과장님도 그런 케이스였다. 그는 영어를 못했기 때문에 현장노무자와의 짧은 통역은 내 역할이 되었다. 그 외 공기 관리, 도면보고 자재수량 확인하기, 현장엔지니어 관리(?), 등을 했다.
대부분의 현장일이 그러하듯 숙소는 처참했다. 건설현장 근처의 컨테이너에 나 같은 초보 엔지니어들의 숙소가 마련되어 있었으며, 고위 간부들은 근처 리조트를 임차해서 쓴다고 했다. 숙소 자체는 청소부가 깔끔히 청소를 해주기 때문에 괜찮았지만 그놈의 "술"이 문제였다. 퇴근을 하고 숙소에 돌아오면 어김없이 회식이 준비가 되어있곤 했는데, 부장, 상무 등과의 회식은 처음에는 재밌다가 갈수록 소재가 고갈되어 시들해졌다. 그래도 매일 빠짐없이 이뤄지는 어떠한 신성한 의식 같이 "거행"되었다.
두 번째는 "여권 압수"였다. 노무팀에서 잊어버리면 곤란하니 여권을 맡기고 필요하면 찾아가라는 지시에 순순히 내어줬다. 그런데 말이 맡기는 것이지 신입사원이 저 집에 가고 싶어요 여권 주세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겠나? 내 여권을 인사팀에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크게 위축이 되었다. 지금에서야 그것이 불법인 것을 알았지만 (물론 그때 알았다고 해서 달라진 건 없을 것이다) 그때는 몰랐다.
부장님은 성격이 아주 불과 같은 양반이었다. 공기가 지연되는 등 본인이 원하는 대로 업무가 되지 않으면 쌍욕을 서슴지 않고 했다. 본인의 연봉이 억대라고 자랑을 하며 우리가 그래도 그냥 노가다꾼이 아니야 ~라고 말하곤 했지만 건설공기 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깡마른 그의 모습을 보며 무언가 잘못됨을 느끼고 있었다.
같이 파견온 동기가 현장에 파견 나온 본사감사의 자료를 몰래 봤다고 했다. 외장하드가 고장 났다고 컴퓨터 좀 아는 친구를 찾길래 본인이 복구를 해줬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외장하드 안에는 같은 해 입사한 신입직원 인사정보가 있는 파일이 있었다. 열어보니 명문대생 출신은 모두 국내 본사에 배치되었고 우리 같은 지방대생은 모두 해외로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줬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 회사에서의 나의 등급은 육두품이라는 것을. 나의 용도는 최전방 칼잡이라는 것을.
나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던 대리급 사수는 묘했다. 정말 똑똑하고 영어도 잘하고 경험도 많았던 그는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하고 잘 섞이지 않았으며 능력대비 직급이 낮아 보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프로젝트 베이스 계약직"이었다. 이 건설 프로젝트가 끝나면 계약이 끝난다는 그는 "정직원"이 되기 위해서 인사고과를 잘 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그는 모든지 다 열심히 했다. 오랜 현장생활로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기 직전이었는데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인사팀은 장기휴가와 정직원을 미끼로 교묘하게 달래고(희망고문) 있었다. 현장에서 그는 육두품인 나보다 등급이 낮았다.
옆 부서 과장님은 점심시간마다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시도"했다. "시도"라고 표현한 이유는 당시만 해도 인터넷 연결이 잘 되지 않아서 영상이 자주 끊겼기 때문이다. "응 아빠야~ 들려? 지금 뭐 하고 있다고?" 휴대폰을 높이 들고 큰소리로 외치는 그의 목소리에 나까지 마음이 먹먹해졌다.
현장에서는 유일하게 양복을 입고 있는 직원이 한 명이 있었는데, "대관"업무를 하는 직원이었다. 한때 프랑스령이었던 그 나라는 프랑스어가 제2 언어였다. 항상 말끔한 차림새에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그 직원이 참 멋있어 보였다. 나는 기름밥 먹으며 각반에 반도차고 하이바 쓰고 현장에서 노무자들이랑 뒹굴 때, 그는 늘 우아해 보였다. 부러웠다.
현장의 선배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이 일은 한번 발들이면 빠져나올 수 없다고, 높은 급여에 건설현장 커리어만 있지, 가정 박살 났지, 다들 그렇게 계속 현장만 돌아다니게 된다고 말이다. 다른 길 생각 있으면 선택을 빨리하라고 말이다.
나는 밤마다 동기들과 그 컨테이너 숙소에서 토론했다. "야! 이거 맞아?, 이렇게 계속할 거야? 결혼이고 나발이고 해외현장만 돌 거 같은데?" 내가 이렇게 말하니, "야 인마, 우리 같은 학벌에 이런 대기업에 이런 급여 가능하겠냐? 난 일단 좀 더 다녀볼래."라고 동기들이 말했다. 우리의 토론은 늘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그 회사를 강렬히 원했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많이 실망을 했다. 무엇보다도 두려운 것은 가족도 없이 해외현장을 떠도는 것과 육두품 주제에 인사팀의 희망고문을 받으며 관리되는 삶을 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미련 없이 사표를 내고 공기업에 입사했다. 운이 좋았다.
요즘은 전력설비를 관리하는 부서에서 사무직군으로 근무한다. 출근길 새벽공기와 그새 청명해진 하늘, 그리고 가지런히 늘어선 설비들을 보니 비릿한 바다내음마저 느껴지는 듯하다. 장비를 착용한 기술파트 직원이 수트를 입고 출근하는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문득 그 시절 대관직원이 생각난다. 나는 그처럼 되고 싶었던 걸까? 그때의 추억이 자꾸 담배연기처럼 피어오른다. 기분이 이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