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인류의 기원부터 시작되었을 몸에 대한 탐구
weekly delights; 하루종일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인프제(INFJ)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때로는 흥미로운, 때로는 쓸데없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이제 매주 하나씩 짧은 글로 남겨두려고 합니다. 잠깐씩 스쳐 지나가는 생각들에게 보다 느린 관심을 주고, 한번 더 곱씹어보고, 조금의 정성을 더해 붙들어 놓는 이 과정을 통해서 내가 살아가는 세상을 더 잘 읽고 이해하며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본문에는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원치 않으시면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본의 아니게 또 방송 프로그램에 대한 인사이트를 적게 되었습니다. 최근에 푹 빠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피지컬:100! 정주행 후 마지막 에피소드를 기다리며 다시 재주행을 하고, 결말까지 모두 나온 지금은 삼주행까지 하고 있답니다. 그간 여러 개의 넷플릭스 오리지널 한국 드라마가 세계적으로 흥행하며 K-드라마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지만, 유독 예능 프로그램 중에서는 눈에 띌만한 성적을 낸 경우가 딱히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피지컬: 100으로 넷플릭스 비영어권 순위에서 처음으로 세계 1위를 거머쥐었다고 하죠. 그만큼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피지컬: 100은 여러모로 잘 만든 프로그램이지만 특히 죽기 살기로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드는 참가자들의 진정성 있는 모습이 프로그램의 재미를 더해주는 것 같습니다. 최후의 1인은 3억이라는 상금을 받긴 하지만, 최후의 1인까지는 남지 못할 거라는 생각도 분명 있을 텐데. 매 경기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하지도 않았는데 정말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마지막화인 9화까지 모두 공개되어 종료되었지만, 그 후에 결과에 대한 여러 가지 잡음이 들려 애청자로서 안타까운 마음도 듭니다. 좋지 않은 소식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참가자들도 있고 말이에요.
어쨌든 오늘은 이런저런 것들은 차치하고, 피지컬: 100에서 특히나 문화적, 미적인 부분에서 흥미로웠던 점들에 대해 간단히 남겨두려고 합니다. 평소에 개인적으로 스쳐 지날 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예리하게 집어내어 재미있게 들려주는 중앙일보 문소영 기자의 기사를 참 좋아합니다. 이번에 피지컬: 100 관련해서도 재미있는 기사를 쓰셨더군요. 프로그램에서 흥미롭게 보았던 부분들을 명쾌하게 글로 정리해 주신 좋은 기사, 관심 있는 분을 위해 아래 기사 링크를 첨부합니다.
균형 있고 아름다운 비율을 지닌 완벽하고 이상적인 신체. 인간의 아름다운 몸을 찬양하던 그리스 미술의 특징을 생각해 보면, '완벽한 피지컬을 탐구한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 고대 그리스를 모티브로 삼는 건 당연한 수순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고대 그리스, 로마의 조각상 중에서는 오랜 세월이 지나 발굴된 조각상들이 온전히 보존되지 못하고, 몸통만 남은 형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방으로 뻗어있고 상대적으로 얇은 팔, 다리 부분이 아무래도 훼손되기 훨씬 쉬웠던 거겠죠. 이렇게 몸통만 남은 조각상을 19세기 이후부터는 '토르소'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참가자들의 몸을 본떠 만든 토르소는 경기 내내 본인의 분신과 같은 상징적인 존재이기도 했는데요. 게임에서 승리한 참가자는 자신의 토르소를 지킬 수 있었고, 실패한 참가자는 자신의 토르소를 깨고 경기장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리스 시대 미술 조각상처럼 보이는 이미지들이 등장하는 오프닝과 첫 화에서 100인의 토르소로 가득 찬 방이 나올 때부터 고대 그리스를 떠올린 건 시청자들, 참가자들 모두 비슷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리스 신전 같다"라는 참가자들의 반응이 영상에서 비치기도 했고요.
세미 파이널 라운드에서는 아예 그리스 신화를 직접적으로 차용한 게임을 선보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라운드이기도 합니다. 이미 유명한 신화의 내용을 어떻게 공정하면서도 치열한 게임으로 재현할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영원히 하늘을 어깨에 받치고 세상을 들고 있는 아틀라스, 대장장이 헤파이토스의 불을 훔쳐 신들 몰래 인간에게 선사한 프로메테우스, 너무 태양 가까이에 가면 위험하다는 경고를 무시하고 날다가 결국 밀랍이 녹아 땅으로 추락하게 된 이카루스, 신의 노여움을 사 끊임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굴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푸스, 자신의 꼬리를 물고 둥글게 몸을 마는 신화 속 뱀 우로보로스까지. 다섯 가지 게임에 대해서는 직접 보는 재미를 위해 말을 아끼도록 할게요.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건 피지컬: 100에서 차용한 사회, 문화적 리소스는 비단 그리스 신화와 고대 그리스 문화만이 아니더군요. 최초의 기원부터 문명의 발전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를 메타포로 삼은 흔적이 시작부터 눈에 띄었다는 이야기를 봤어요. 사전 퀘스트에서 매달렸던 구조물에서 떨어진 후, 물에 빠졌다가 나오게 되는 설정은 마치 새로운 생명이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는 과정을 암시하는 것 같다고요.
일대일 데스매치에서는 몸싸움 위주의 전투를 위한 무대인 모래밭 위 원형 경기장 A, 각종 구조물을 응용해 공격과 수비 전략을 짤 수 있도록 마련된 경기장 B의 두 세트장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이 또한 흙을 이용하여 움막을 짓고 살았던 선사시대부터 원시부족 시대의 수렵, 사냥 활동을 은유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후 나무다리를 만들어 모래주머니를 옮기고, 배에 짐을 싣고 힘을 합쳐 출항하는 모습에서는 점차 발전하는 문명과 무역의 인간사가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네요.
최후의 5인이 진행한 파이널 퀘스트는 그 전의 게임들에 비해 작아진 스케일로 기대한 거세 비해 퀄리티가 실망스러웠다는 의견도 꽤 있는 것 같습니다. 제작비의 문제였는지, 혹은 제작진이 추구하던 바에 따라 충실히 이루어진 기획임에도 대중의 입맛에 맞지 않았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재미있었던 건 5인으로 시작해 게임을 거치며 한 명씩 떨어지는 규칙을 시각적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느껴졌다는 점이었습니다. 각자 앞 방향을 향해 달리며 경기장에 그려지던 오각형, 흰색과 검은색으로 뒤집히고 또 뒤집히던 사각형, 지칠 때까지 셔틀런으로 왕복하던 삼각형, 끊임없이 당기던 로프가 만들어낸 선. 면-선-점으로 결국 최후의 1인이 점으로 남는 구조의 기하학이 나름 흥미로웠던 포인트였던 것 같네요.
종영 이후에도 이래저래 구설수가 많지만, 그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뜨거웠던 프로그램이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어쨌든 넷플릭스의 피지컬: 100, 오래간만에 다 보자마자 시즌2가 바로 기다려지는 예능이었는데 모쪼록 불미스러운 일들로 얼룩진 채로 남지 않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부디 모든 과정이 공정하고 깨끗하게 이루어졌기를, 그리고 더는' 방송에 나오지 말아야 할 사람들이 나왔던 사례'가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