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우디앨런 감독의 영화 <레이니 데이 인 뉴욕>에는 개츠비(티모시 샬라메)와 첸(셀레나 고메즈)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두 배우가 나옴에도 나의 시선은 자꾸만 배경에 있는 작품을 향했다. 고흐의 작품이나 이집트 파라오 같은 것들 말이다.
두 주인공의 왼쪽 가슴에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는데 입장권 같았다. 보통 때 같았으면
‘놀이공원도 아니고 촌스럽게 무슨 스티커를 옷에 붙이는 거야?’
라고 생각했겠지만 이미 영화를 통해 미술관에 환상이 생긴 나는
‘아, 나도 저 스티커 붙여보고 싶다. 내가 Met에 가면 꼭 가슴에 스티커 붙이고 인증샷을 남겨야지.’
라고 생각했다.
큰 기대를 안고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입구에 들어섰다.
그런데, 직원은 예매한 입장권 QR코드만 체크하고 나를 그냥 들여보내는 것이 아닌가?
“저... 입장권 스티커를 받고 싶은데요?”
“그거 없어도 입장가능해요. QR코드만 있으면 돼요.”
“아니 그게 아니라, 저는 기념으로 입장권 스티커를 갖고 싶어요. 저는 관광객이거든요!”
“아~ 그러면 저기 안내 데스크로 가서 QR코드 보여주고 달라고 하면 스티커 입장권을 줄 거예요.”
이렇게 해서 최신식으로 QR 입장권을 발급받았음에도 굳이 줄을 서서 종이스티커 입장권을 받아, 가슴에 붙이고 다녔다. 아날로그적으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내셔널 갤러리,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함께 세계 3대 미술관이라고 불리는데, 소장품의 가치를 논하기는 어렵겠으나 그만큼 방대한 소장품이 있다는 의미로는 해석할 수 있겠다. 며칠을 봐도 이곳의 컬렉션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이라는 뜻. 하지만 나의 관심사는 분명하게 현대미술에 국한되어 있으니, 이럴 때는 아주 효율적이다. 미술관에 들어가서 맵을 펼치자마자 ‘여기, 여기’하며 우리가 갈 곳을 찍었다. Modern and Contemporary Art와 European Paintings 전시장이다.
그런데 막상 미술관에 들어오니 욕심이 난다. 게다가 남자친구는 이집트관에 가서 파라오를 보고 싶다고 한다. 개츠비와 첸도 스핑크스 앞에서 데이트를 하긴 했지? 그래, 가보자! 그래서 시대 순으로 1층부터 미술관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별 기대 없이 들어온 이집트관의 컬렉션이 너무나 훌륭해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었다. 온갖 진귀한 이집트의 보물이 전부 뉴욕에 와 있는 것만 같았다. 실제로 이는 카이로를 제외하면 가장 큰 이집트 예술 컬렉션으로 2만 6천여 점이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심지어 이집트의 신전 하나 (이름은 The Temple of Dendur이다.)가 그대로 떠져서 이 미술관 안에 들어와 있는 게 아닌가? 덴두어 신전은 1963년 아스완 하이
댐 건설 당시 스몰 위기에 처한 것을 미국의 지원으로 보존할 수 있었기에 이집트 정부가 미국 정부에 정식으로 기부한 것이라 한다.
문득 런던의 대영박물관이 떠올랐다. 대영박물관, British Museum에는 그리스 로마의 훌륭한 문화유산 예술품이 가득하다. 대영박물관은 이를 보존, 연구, 전시한다고 말하지만, 이곳의 유물에는 대영제국 시기 식민지에서 탈취한 예술품이라는 꼬리표가 항상 따라다닌다. 실제로 The Met은 2010년 투탕카멘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 개 조각상과 스핑크스의 팔찌 등을 이집트미술관에 반환한 바 있다.
그런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설명에 의하면,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906년 이집트미술 부서를 신설한 후 적극적으로 이집트 유물 발굴을 시작했으며 이집트 정부로부터 발굴된 유물의 절반을 반출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고 한다. 의심이 살짝 들면서도 수긍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특수성, 그러니까 이민자들의 국가이고 역사가 짧다는 특징을 감안하면, 그 방식은 다른 나라와 다를 수밖에 없다. 유럽, 중국 등 역사가 깊은 국가에서는 왕족이 황실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보존하여 박물관을 만들었지만, 미국은 철저히 기획에 의해 미술관과 박물관을 설립하고, 컬렉터들의 기부로 만들어온 것이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은 1866년 파리만국박람회 당시 미국도 국민들에게 예술을 향유하고 교육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자는 뜻을 모은 민간인들, 그러니까 사업가, 예술가, 자선가들이 힘을 모아 만든 미술관이다. 미술관 자체 기금과 기부를 통해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작품들, 그러니까 르누아르, 마티스, 베르메르 등의 작품을 컬렉션에 더하며 지금의 위치에 오르게 된다. 그래서일까, 모든 전시실에 이름이 붙어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기부자의 이름이 아닐까 짐작해 봤다.
이집트 미술관을 지나, 갑옷, 검, 총을 보고 났더니, 그러니까 1층의 이스트윙 반쪽만 보고 났는데도 컬렉션의 방대함에 지친다. 부랴부랴 미술관을 나와 점심을 먹고 카페까지 들렀다가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와서는 가장 먼저 루프탑 가든으로 향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루프탑 가든은 현대조각작품을 전시하는 곳으로, 센트럴파크의 전경과 맨해튼의 마천루들을 둘러볼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인원 제한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 올라가려면 엘리베이터를 타는 줄을 놀이공원 입장 줄처럼 길게 서야만 한다. 그리고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가 계획하고 기대하고 있는 Modern and Contemporary Art 섹션으로 갈 차례다. 이미 오후가 한참 지난 시간이어서 이제부터는 전시 관람에 속도를 냈다. 여기서는 1890년 이후의 현대미술을 다루는데, 아무래도 서유럽과 북미의 미술이 주를 이루다 보니 메트로폴리탄 측은 의식적으로 컬렉션을 여성과 유색인종,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으로 넓히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장르 역시 미디어, 회화, 조각으로부터 디자인과 장식까지 확장하고 말이다.
근현대 미술만 보고 돌아가려 했으나, 작품을 보자 신이 난 나는 European Paintings 방까지 들어갔다. 13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유럽 회화들의 화려한 컬렉션은 얀반아이크, 카라바지오의 걸작부터 엘그레코나 고야 같은 스페인 명작들을 지나 쿠르베, 드가, 마네, 모네, 세잔, 고흐 등의 19세기 프랑스 회화작품까지 아우른다.
오늘 우리가 하루 종일 둘러본 곳은 고작 이 정도이다. 아프리카 미술, 원주민 미술을 포함하는 아메리카 미술, 고대 근동 미술, 아시아 미술, 이슬람 미술, 의상, 악기, 인쇄물, 사진 전시관은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이런, 뉴욕에 다시 한번 와야겠는데?
녹초가 되어 미술관을 나온 우리는 미술관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라마 <가십걸>을 보면, 어퍼이스트 사이드의 아이들이 항상 The Met의 계단에 앉아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계단은 널찍하니 편하고, 뒤에는 센트럴파크가 펼쳐져 있으며 정면에는 어퍼이스트사이드의 고급 맨션과 고급차량들이 즐비한 광경이 펼쳐진다. 어퍼이스트사이드에 살면서 The Met을 매일같이 드나들고 싶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