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2년 1월 4일 화요일
회사에서 진짜 하기 싫었던 일 하나를 해치웠다. 속이 다 시원했다. 이 상쾌함을 잊지 않고, 산재한 하기 싫은 일들을 '새해 액땜'이라 치고 긍정적으로 넘겨보려 한다. 대책 없이 낙천적이라는 소리를 듣는 내가 아닌가.
업무 : 200만 원짜리 광고를 땄다.
서머싯 몸의 <서밍 업> 원서 읽기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원서를 읽으며 고등학생 시절이 떠올랐다.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바짝 영어 공부를 했더니, 뭐라고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는데 영어의 쓰임과 맥락을 나도 모르게 파악할 수 있게 됐던 경험이 있다. 원래도 영어 과목을 잘 못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시기, 처음으로 모의고사 영어 과목에서 전교 1등을 했다. 학교엔 이미 유명한 전교 1등이 있었는데 그 아이보다 내 성적이 더 좋아서 영어 선생이 놀라 나를 찾아왔던 기억이 난다. 특히 그중 어려운 문제가 하나 있어서 - 전교 1등도 그 문제를 틀렸다고 한다 - 그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풀어냈는지에 대해 물었더랬다.
생각해보면 종종 나의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엄마는 말했다.
"내가 하도 책을 읽어줘서 그런가? 어느 순간 네가 내 손을 잡고 길거리를 지나는데 스치는 간판 속 글자를 전부 읽는 거야!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스스로 한글을 뗐다니까!"
비슷한 방식으로 영어도 스스로 익혔다. 열 살 때 아빠가 기분 좋게 취해서는 내 손을 붙잡고 들어가 어린이용 영어 사전을 사준 적이 있다.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영어 발음도 한글로 다 적혀 있는 사전이었다. - 아직도 그 사전 속 abbey라는 단어가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발음이 [애비]로 적혀 있었는데 애비=수도원이라는 게 웃음 포인트였다 - 그 사전을 몇 번 찬찬히 읽었더니 영어 단어가 어떤 구조로 발음되는지가 나도 모르게 새겨진 것 같다. 이후 친구 집에서 TV를 보는데 영어 자막으로 Gangwon-do가 나왔다. 열세 살 때였던 것 같은데, 그때 친구는 영어 과외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친구 엄마가 친구에게 Gangwon-do를 읽어보라고 했는데, 친구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친구 엄마가 기막혀하면서 나에게 물었다.
"얘, 너는 따로 영어 공부 안 하지?"
나는 6차 교육과정 세대였던 터라 중학교에 가서야 영어가 정규 과목이었던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중학교에 가면 배우겠지, 하고 따로 영어 공부는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Gangwon-do를 읽어낼 수 있었다. 이후 놀란 친구 엄마가 이것저것 영어 단어를 제시하며 읽어보라고 했을 때도 웬일인지 막힘 없이 읽어낼 수 있었다. 친구 엄마는 점점 더 입이 벌어졌고 급기야는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난다.
나도 모르게 언어의 구조를 익혔던 경험이 있던 터라 어릴 때의 나는 내가 언어 천재인 줄 알았다. 실제로 고등학교 때는 '국어 신동'이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는데 성인이 되고 보니 다 아니었다. 그냥 어쩌다 그런 경험들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 경험들은 나에게 소중한 성취로 남아 있어서 가랑비에 옷 젖듯 원서를 읽고 있는 지금에도 이런 생각을 한다. 이렇게 조금씩 꾸준히 공부를 하다 보면 언젠가 또 어릴 때의 어떤 날처럼 영어를 다시 깨우치는 날이 올지 모른다고.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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