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편집의 맛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뭉치 Jan 15. 2024

축구 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다정소감》김혼비 지음 l 출판사 안온북스 l 가격 1만5000원



일상의 편린(片鱗)에서 길어 올린 의미를 전하는 산문집이에요. 특히 이 책에는 축구와 관련된 이야기가 여러 편 담겨 있어요. 2024 AFC 아시안컵 E조 1차전인 대한민국과 바레인의 경기가 있는 오늘, 경기 전 대한민국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읽기에 좋아요.   


이전에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라는 책을 출간했던 저자는 이 책에선 <축구와 집주인>이라는 산문을 통해 축구를 하며 얻은 ‘싸우는 감각’에 대해 말해요. 축구를 시작하기 한참 전에는 위기의 순간에 공포와 억압을 이기고 소리를 지를 수 있을지 두려워했다면, 축구를 하면서 몸싸움을 하고 고통을 느끼는 경험을 쌓으면서 자신이 이전보다 더 잘 싸울 수 있게 됐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마음대로 누구를 때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선을 넘어버린 누군가가 폭력을 행사할 때, 공포와 억압에 가로막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지 말라”는 뜻이지요. “그라운드에서 몸싸움을 하면서 ‘맞는’ 경험치가 쌓이다 보니, 고통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고통이 구체성을 띠고 다가오니 그게 또 두려움을 한결 줄였다. (중략) 이것만도 굉장한 발전이었다. 우리는 보통 폭력에 제압당하기 전에 폭력에 대한 두려움에 먼저 제압당하니까. 수비수 한 명을 제친 기분이었다.”


이러한 경험은 저자에게 자신감을 심어주고, 삶의 다른 분야에서도 적극적으로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줬어요. “여기까지 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여기까지 해볼 수 있게 만들므로. 스트레칭으로 몸을 최대한 길게 뻗어보는 것처럼 내 마음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최대한 길게 뻗어보고 싶다. 나는 더 잘 싸우고 싶다. 더. 더.”


또 다른 산문들에선 축구장에서 만난 ‘전후반 풀타임을 다 뛰고도 체력이 남고, 허공에서 윗몸일으키기를 예순 개 정도 하는’ 언니들을 롤모델 삼아 몸과 마음의 근육을 키우고, 자신을 단단하게 지킬 수 있었다고도 말해요. 축구장을 누비고 공을 차다 보니, 이전에 비해 훨씬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몸이 됐기 때문이지요.  


이 책에 축구 얘기만 있는 건 아니에요. 저자가 겪고 느낀 다양한 경험과 감정을 마주할 수 있어요. 또 다른 산문 <책으로 인생이 바뀐다는 것>에서는 책에 발등 찍힌 경험으로부터 시작해 저자의 인생책들에 대해 이야기해요. 특히《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기대하는 모든 것이 다 들어가 있다며 10년 전에도, 지금도, 10년 후에도 단 한 권의 책으로 고를 수 있다고 말해요. 번번이 허를 찌르는 유머와 아우라가 독창적이기 때문이지요.  


이 책의 2부 ‘한 시절을 건너게 해준’ 초반부에서 저자는 유년 시절을 회상해요. 최대한 길게 마음이 뻗어나갈 수 있게 도와준 일에 대해 떠올리지요. 하교 시간에 예보에 없던 비가 갑자기 쏟아져 저마다 엄마들이 친구들을 데리러 온 날, 저자와, 같은 처지의 친구들은 일을 하던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아도 전혀 슬프거나 외롭지 않았다고 해요. 지금에 와서 그때를 추억해 보면 “저 어린 것을 남겨두고……”라며 혀를 차는 어른들이야말로 자신을 기어이 외롭게 만들었다고 분개하는 친구들도 있을 정도로요.  오히려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은 아이들은 그들 나름대로 비를 흠뻑 맞으며 재미있게 놀았다네요. 그 빈자리를 채워가며 스스로 단단하게 커갔고요.


학창 시절 친구였던 M과의 일화를 추억하기도 해요.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하버마스 같은 독일 철학자들의 책을 읽던 친구 M과 친하게 지냈지만 학년이 바뀌고 반이 바뀌자 자연스레 멀어지게 돼요.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교실에서 혼자 있던 M을 발견해 같이 놀았는데, 그 뒤로 M은 점심시간마다 저자를 기다리게 되지요. 그러나 끝내 오지 않은 저자가 미워서 전학 가는 걸 미리 알려주지 않은 M의 편지를 마주하고 저자는 깨달아요. 순간의 기분으로 문 너머 외로운 누군가에게 다가갔던 자신의 짧은 마음을요. 호의(好意)는 선한 마음이지만 섣부르게 호의를 베푸는 건 그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걸요.   


이 책의 제목은 ‘다정다감’을 장난스레 비튼 말이자 다정들에서 얻은 작고 소중한 감정의 총합을 뜻해요. 저자는 말해요. “주저앉고 싶은 순간마다 ‘내가 무능력했지 무기력하기까지 할까 봐!’라고 덮어놓고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도 내 안에 새겨진 다정들이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을 쉽게 포기하지 않게 붙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똑같은 패턴을 반복해서 얻게 되는 건 근육만이 아니었다. 다정한 패턴은 마음의 악력도 만든다.”


저자 특유의 유머가 매력적이라 유쾌하게 읽을 수 있어요. 책 읽는 즐거움을 더해주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달하지요. 이 책을 통해 축구의 매력을 느끼고 자신감과 열정, 도전하는 자세도 배울 수 있을 거예요.



김미향 출판평론가·에세이스트



2024년 1월 15일(월) <조선일보> '재밌다, 이 책!' 코너에 게재된 원고입니다

http://newsteacher.chosun.com/site/data/html_dir/2024/01/14/2024011401609.html

이 글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김뭉치의 브런치를 구독해 주세요.


이 글을 읽고 김뭉치가 궁금해졌다면 김뭉치의 인스타그램을 팔로우해 주세요.

https://www.instagram.com/edit_or_h/?hl=ko


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 주세요.


알라딘 http://asq.kr/XE1p

인터파크 http://asq.kr/PH2QwV

예스24 http://asq.kr/tU8tzB



매거진의 이전글 절망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는 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