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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Dec 21. 2018

북 큐레이션의 힘

- 함께 읽는 2018 책의 해 제9차 책 생태계 비전 포럼

지난 11월 29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2018 책의 해 제9차 책 생태계비전 포럼이 열렸다. ‘북 큐레이션의 힘'을 주제로 진행된 이번 포럼에서는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이 좌장을 맡고 영국 카넬로 대표이자 『큐레이션』(예문아카이브)의 저자 마이클 바스카, 영국 북초이스 콘텐츠 디렉터 리야 크레소와티, 일본 문화통신사 편집장이자 전무이사인 호시노 와타루, 오지은 광진정보도서관 관장과 이용주 우분투북스 대표가 주제 발표에 나섰다. 이들의 주제 발표 이후에는 김미정 한국북큐레이터협회 회장과 조성은 레이어스랩 공동 대표의 토론이 이어졌다.    


지난 11월 29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서울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에서 2018 책의 해 제9차 책 생태계 비전 포럼이 열렸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넷플릭스를 보라

마이클 바스카 영국 카넬로 대표는 큐레이션의 정의는 무엇이고 지난 20년간 그 정의가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지금 큐레이션이 중요한 개념이 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큐레이션이 어떻게 책과 출판이라는 세계를 바꾸고 있는지에 대해 발표했다. 마이클 바스카는 큐레이션은 ‘cura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며 그 어원은 ‘to take of’, 즉 ‘보살피다’라고 말했다. 일찍이 로마 시대에는 제국의 관료들이, 또 시간이 흐르면서는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큐레이터였다. 그러다 18세기 말부터 전문 큐레이터들이 등장하는데, 최초로 박물관과 미술관이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마이클 바스카는 큐레이션은 ‘cura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다며 그 어원은 ‘to take of’, 즉 ‘보살피다’라고 말했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미술계의 전유물로 느껴졌던 이 단어는 1990년대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그 사용이 급증한다. 마이클 바스카는 ‘Superabundance’, 이른바 과잉, 잉여의 문제에 대해 여러 번 거론했다. 지금은 정보가 너무 많은 잉여의 시대이기 때문이 큐레이션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잉여의 시대에는 너무 많은 선택이 필요하다. 선택거리가 많을수록 사람들은 선택하는 데 부담을 느낀다. 잘못된 선택은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 하에 중요해진 큐레이션을 마이클 바스카는 “선별+가치를 추가하기 위해 배열”이라고 정의했다.

이 큐레이션 경제의 성장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로 그는 넷플릭스를 꼽았다. 또 홍콩의 IFC 쇼핑몰을 예로 들며 지금은 하이퍼큐레이션된 매장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시대라고 힘주어 말했다. 출판인으로서 그는 전 세계적으로 매년 영어로 된 100만 부의 책이 출판되는 시대이니만큼 독자에게 딱 맞는 완벽한 한 권의 책을 만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물론 우리는 더 많은 책을 출판할 수 있지만 그건 실패한 전략이라는 것이다. 마이클 바스카는 좀더 선별적으로 책을 출간하지 않는다면 출판업자로서의 우리 가치는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다. 한 해 8만 종 이상의 책이 출판되는 한국 출판계에도 시사점이 되어주는 이야기였다.


미술계의 전유물로 느껴졌던 '큐레이션'은 1990년대에 인터넷이 등장하면서 그 사용이 급증한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다음으로 발표에 나선 리야 크레소와티 영국 북초이스 콘텐츠 디렉터는 다양한 큐레이션 방법들과 장단점, 휴머 큐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미 해외의 대형출판사들은 세분화된 플랫폼을 만들어 독자에게 책을 추천하고 있다. 펭귄의 범죄소설 플랫폼 ‘데드굿deadgood’이나 ‘호더스케이프HODERSCAPE’의 경우 성공한 사례로 손꼽히는데, 펭귄의 경우 자사 내 모든 책을 추천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 맞춤한 책들을 엄선해 선보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한편 온라인서점의 큐레이션은 구매 이력에 따른 기계적 큐레이션이므로 자칫 잘못하면 필터 버블에 갇힐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독자가 어떤 책을 산 것까지는 알지만 그 책을 진정으로 좋아했는지는 알고리즘만으로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리아 크레소와티는 휴먼 큐레이션을 가장 추천한다고 했다. 북리스트, 북클럽, 크라우드 소싱을 이야기하며 특히 독자 스스로 큐레이션하는 크라우드 소싱을 출판사가 활용하면 좋을 거라고 했다. 독자가 책 탄생에 기여하는 경험모델을 만들라는 것이다.


리야 크레소와티 영국 북초이스 콘텐츠 디렉터는 다양한 큐레이션 방법들과 장단점, 휴머 큐레이션에 대해 이야기했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세 번째로 발표에 나선 호시노 와타루 일본 문화통신사 편집장이자 전무이사는 큐레이션의 범위를 좀더 넓혀 일본에서 독자들이 책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늘려가게 하기 위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했다. 먼저 야마나시 현에서 2012년에 건립한 도서관에 대해 말했는데, 카페까지 갖춘 이 도서관이 생김으로써 지역의 서점들이 힘들어졌다고 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도서관과 서점이 함께 책을 권장하는 등의 활동을 해 나갔다고 한다. 그렇게 되고 보니 도서관과 서점, 야마나시 현이라는 지자체가 다 함께 독서를 촉진하는 전례 없는 일이 일어났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소설가이기도 한 도서관 관장이 아이디어를 내 ‘책을 선물하는 날’을 만들었고 전국의 초중고등학생에게 선물하고 싶은 책이 무엇인지 응모를 받았다. 그렇게 해서 선별된 책들은 도서관에서 전시, 서점에서 소장하고 판매로 연결되게 했다. 그 외에 서점과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스탬프 랠리를 한다든지 학교도서관에서 북페어를 연다든지 서점에서 저자와의 요리 이벤트 등을 벌여 성공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다 한다.


또 나가노 현은 출판사를 창업한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나온 곳이다. 이 현에서도 역시 지역의 도서관과 서점이 함께 책을 권장하는 활동을 많이 하고 있다 한다. 서점 점원들과 도서관 사서들이 함께 추천도서를 소개하는 정보지를 만들어 매달 발행하고 초중등학생들이 자신이 읽은 책을 기록할 수 있는 독서수첩을 제작해 배포하기도 했다. 서점조합원들이 추천한 열 권의 책에 한해서는 띠지 디자인을 모집, 선정된 띠지를 두른 책을 서점에 진열했는데,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에게 입학 선물로 인기 만점이었다고 한다. 선물을 주는 사람이 메시지를 쓸 수 있는 띠지를 만들어 팔았기 때문이다.


또 앞서 리야 크레소와티 영국 북초이스 콘텐츠 디렉터가 중요하다고 역설한 대로 일본에서도 휴먼 큐레이션이 각광받고 있다고 말했다. 아마존에 모든 게 다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선택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독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도쿄 오키쿠보에 있는 어떤 서점은 역에서 15분 정도 떨어져 있지만 서점주인이 선별한 책을 읽고 사기 위해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갈 정도라고 한다.


최근 일본에서는 독서회가 활성화되고 있는데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비블리오 배틀’이다. 출판업계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교토대 연구실에서 시작됐다는 것도 재미있다. 한 연구원이 다 함께 모여 책만 읽는 건 재미없으니 스스로 재미있다고 여기는 책이 얼마나 재미있고 의미가 있는지를 서로 게임처럼 이야기해보자고 한 데서 시작됐다. 현재는 비블리오 배틀 보급위원회가 설립돼 민간에서 자연발생적으로 1000회 정도 이벤트가 열리고 있다. 출판사, 신문사, 서점 등도 협력해 이 이벤트는 점점 확산되고 있는 중이다.      



독자 맞춤형 큐레이션이 필요하다

오지은 광진정보도서관 관장은 도서관 발전의 차원에서는 큐레이션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와 공공도서관 큐레이션의 개념을 제안했다. 또 그 개념에 따라 활동하는 성북구립도서관(마을in수다), 느티나무도서관(마을포럼), 광진정보도서관(책 읽는 엄마, 아빠 학교) 등의 도서관 사례를 소개하며 공공도서관의 북 큐레이션은 커뮤니티를 보살피고 돌보는 방향, 즉 큐레이션의 기원인 Curare(보살피다, 돌보다의 듯)의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 공공도서관의 북 큐레이션은 아직 구체적인 주제를 기반으로 활동을 조직화하기까지 발전하지 못하고 단순한 주제별 추천 수준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은 구글이 1분마다 400만 건이 넘는 검색어를 받고 이메일 사용자는 2억 400만 건의 메일을 보내는 정보 과부하의 시대다. 도서관 사서들은 이러한 정보의 바다를 뛰어 넘게 하는 콘텐츠 큐레이션의 진화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서의 역량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공도서관 큐레이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자료는 역시 책이지만 디지털 형식을 포함하여 콘텐츠 및 데이터까지 포괄하는 범위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용주 우분투북스 대표는 서점의 큐레이션을 고민하는 책방주인들에게 유효한 제안들을 했다. 이용주 대표는 여성잡지가 뷰티, 웨딩, 인테리어 등으로 분화되듯 서점들도 점점 세분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 요소가 있겠지만 우리 서점들이 외국의 모델들을 보고 벤치마킹한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아쉬운 점은 외형과 껍데기만 가지고 오고 바다를 건너면서 본질은 실종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요즘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츠타야 모델의 본질은 21개 분류와 함께 각각의 코너에서 그 코너의 전문가가 무엇을 물어봐도 그 책에 대해 얘기해줄 수 있는 서비스를 해준다는 것이지만, 대개의 국내 대형서점들은 외형은 츠타야와 비슷해졌다 할지라도 서비스 면에서는 예전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책 제목과 출판사, 저자명을 정확히 알아와야 책을 찾아주는 서비스가 그대로인데 외형적인 변화만 이뤄졌다고 해서 독자들이 책을 살지는 의문이라는 것이다.


이용주 우분투북스 대표는 서점의 큐레이션을 고민하는 책방주인들에게 유효한 제안들을 했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그러면서 이용주 대표는 마스다 무네아키의 『지적자본론』(민음사)의 문장들을 인용했다. “서점은 서적을 판매하기 때문에 안 되는 것이다. 고객에게 가치가 있는 것은 서적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그 안에 풍부하게 들어 있는 제안이다. 따라서 그 서적에 쓰여 있는 제안을 판매해야 한다.” 사람과 책 사이에는 개별적 책장이 존재하지만 이 둘 사이가 연결되는 과정, 공간이 곧 ‘서점’이라는 이용주 대표의 말에는 큰 울림이 있었다. 사람들은 왜 서점에 가는가. 예전에는 서점이 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찾아갔다면 지금은 그들이 안고 있는 고민, 생각들, 관심사를 읽기 위해 서점에 가는 것 아닐까.      



큐레이션을 위한 큐레이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어진 토론 시간에 김미정 한국북큐레이터협회 회장은 마이클 바스카 카넬로 대표에게 북 큐레이션에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단계는 무엇인지 물었다. 그러자 마이클 바스카 대표는 큐레이션을 할 때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큐레이션을 위한 큐레이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달성하고 싶은 비전이 먼저 있어야 하고 그에 맞춰 큐레이션하며 이 큐레이션을 위해 무엇을 얻고 싶은지가 명확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인사들까지 함께해 자리를 빛낸 이번 제9차 책 생태계 비전 포럼은 준비한 좌석이 꽉 찰 정도로 청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김미정 한국북큐레이터협회 회장은 오지은 광진정보도서관 관장에게 사서 역량 강화를 위해 어떤 부분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물었다. 오 관장은 사서 역량 강화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을지 항상 고민한다고 답했다.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학자로서 오 관장은 우리나라 문헌정보학과 커리큘럼에 독서 교육이 꼭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한 학기에 15권만 읽어도 4학년 때까지 100권의 독서를 할 수 있다. 100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는 사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사서 업무도 과감하게 구조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광진도서관의 사서들은 업무 중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책을 읽지 않으면 독서 동아리를 이끌 수 없기 때문이다. 오 관장은 학문적으로도 역량을 강화할 순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자기 경험과 토론, 사람들과의 만남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책 읽는 사서를 보고 논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충분히 책을 읽고 시민들과 만나 토론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부분은 ‘역량 강화 교육비’로 잡아 사서들에게 지원하고, 사서들을 위한 자체 강좌를 도서관 내에서 개최하면 좋을 것이라 이야기했다.


이용주 우분투북스 대표는 서점 운영에 있어 염두에 두는 큐레이션이 있냐는 김미정 한국북큐레이터협회 회장의 질문에 서점을 시작할 때는 서점의 색깔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 콘셉트에 맞는 책을 구비하는 데 집중했고, 시간이 흐르고 나선 서점에 찾아오는 독자들의 관심사에 맞는 책을 들이는 데 집중해 균형을 이루었다고 답했다. 청중 질의응답 시간에는 전례 없이 좌장에게도 질문이 들어왔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은 큐레이션 없는 대형서점의 매대 판매를 비판하며 보텍스vortex와 AI 시대에는 시스템과 프레임이 모두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따라서 책의 생명력을 불어넣는 큐레이션과 멤버십 비즈니스를 하지 않으면 출판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역설했다.


ⓒ 2018 책의 해 조직위원회 제공


국제인사들까지 함께해 자리를 빛낸 이번 제9차 책 생태계 비전 포럼은 준비한 좌석이 꽉 찰 정도로 청중의 큰 호응을 받았다. 디지털 텍스트와 아날로그 텍스트가 함께하는 하이브리드 텍스트 시대에서 우리 출판의 오늘과 미래에 대한 고민이 치열하게 드러났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마도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478호(2018년 12월 20일 발행) 이슈 '출판계 리포트'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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