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월간 웹툰

못 말리는 책덕들의 세계

-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by 김뭉치

일찍이 벤야민은 과거의 예술작품을 정신집중의 예술로, 현대의 예술작품을 정신분산의 예술로 정의한 바 있다. 그에 따르면 “예술은 이제 더 이상 정신집중과 관조의 태도로 임하는 전통적 감상의 대상이 아니라, 정신을 분산시키면서도 언제 어디서나 유희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집단적 수용 매체”다. 오늘날의 웹툰 또한 벤야민이 말한 정신분산의 예술에 딱 들어맞는다. 웹툰은 오늘날 대중의 지각양식을 어떻게 변모시키고 있는가. 지금부터 시작하는 이 리뷰 지면에선 각 웹툰별로 개별 작품을 세세하게 들여다보면서 전체적으로는 오늘날 웹툰이 어떻게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는지 살펴보려 한다. 특히 웹툰webtoon이 서구권에서 유입된 단어가 아니라 대한민국에 정착된 고유의 웹 만화 플랫폼을 통칭하는 단어라는 점에서 웹툰은 더욱 유의미한 대상이다. 서구권에서는 연재 만화를 웹코믹Webcomic이라 부른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웹툰은 오로지 ‘대한민국의 웹 카툰’을 뜻함을 알 수 있다.


현재 웹툰은 다른 장르의 베이스 콘텐츠가 되는 등 미디어 믹스를 선도하며, 대한민국 스낵컬처문화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웹툰은 다른 장르보다 투자 비용이 그리 크지 않은 편이기 때문에 좀더 투자 비용이 높은 장르로의 미디어 믹스가 두드러지는 편이다. 상대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드는 영화나 드라마 등의 장르에서는 포털 사이트 통계를 통해 이미 인기가 검증된 웹툰을 재생산함으로써 타깃을 분명히 하고 그에 따른 전략적 마케팅을 펼칠 수 있다. <신과 함께> <치즈 인 더 트랩>의 사례는 웹툰의 미디어 믹스가 성공적임을 보여준다. 위험성이 높은 영화나 드라마 등의 장르가 이럴진대 출판은 오죽하겠는가.


<신과 함께>의 사례는 웹툰의 미디어 믹스가 성공적임을 보여준다. (좌) 웹툰 「신과 함께」(우) 영화 <신과 함께>


오늘 들여다볼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은 연재 내내 수많은 편집자들의 마음을 훔치더니 끝내 지난해 말 종이책으로 출간되면서 그 인기를 이어가고 있다. 이 웹툰은 나 책 좀 읽네,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재미있게 읽을 만한 에피소드들로 가득 차 있다. “아! 요즘 무슨 책 읽느냐고 친구가 물으면… 사실, 그런 질문을 하는 친구, 주위에 좀처럼 없지”라는 대사나, 구구절절 ‘감성충’ 같은 문장들로 가득한 저자 소개보다는 군더더기 없는 사실만 짧게 적힌 저자 소개를 볼 때 ‘심쿵’하고, 저자 소개보다 역자 소개가 긴 책은 재고의 여지없이 무시한다는 독서중독자들의 철학에 공감하지 않을 독자가 몇이나 될까. 근처에 도서관이 없으면 그곳은 인간이 살 곳이 아니니 이사를 가라거나 까치 출판사의 표지에 대한 언급, 베스트셀러를 내 독서 목록의 기준으로 삼긴 힘들다는 주관, 주석을 무시하고 완독에 집착하지 말라는 조언은 끝내 웹툰을 읽는 독서 중독자의 무릎을 치게 만든다.


(좌) 나도 군더더기 없는 사실만 짧게 적힌 저자 소개가 좋다 (우) 까치 출판사 모르시는 분 없쥬?!


적재적소에 배치된 인용문을 읽는 즐거움도 상당한데 예를 들어 “내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 마침내 찾아낸,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는 『장미의 이름』(열린책들) 서문 재인용이나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불쌍한 연기자가 무대 위를 잰 체 활보하며 자신의 시간을 안달복달하는 것일 뿐, 그러고는 더 이상 듣는 이 없는 것일 뿐. 그것은 백치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찼으나, 아무 의미도 없는”이라는 『맥베스』 5막 5장의 인용문은 진지하게 읽다가도 앞뒤의 상황 때문에 깔깔 소리 내어 웃게 된다.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이창현 글, 유희 그림, 다음 웹툰, 2018


결국 「익명의 독서중독자들」은 책을 엄숙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사실 책은 재미있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 실제 웹툰에 달린 댓글들을 보아도 책을 사놓고 안 읽거나 못 읽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고, 책읽기가 부담스러운 사람들이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도와준 듯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웹툰의 댓글창에 모여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도 그 책을 구매해 읽길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다(이는 ‘영업’이라는 단어로 포장된다. 예를 들어 “여기까지 오신 분들은 독서를 정말 좋아하시는 분이겠지… 앤 패디먼 '서재 결혼시키기' 헬렌 한프 '채링크로스 84번지' 클라스 후이징 '책벌레' 영업해봅니다.”는 댓글이 베스트댓글이 되는 식이다. - ‘평범한남자사람 2018-04-05 12:59:42 댓글’). 물론 기존의 독서 중독자들이야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이 절묘하게 웹툰화되어 그림과 문장으로 드러난 걸 즐기며 읽으면 된다. 책의 가치 운운하기 전에 처음 우리가 책장을 폈을 때를 떠올려보라. 책읽기는 우리에게 그 어떤 일보다 재미있는 ‘놀이’ 아니었던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창현 글, 유희 그림, 사계절, 2018


종이책으로 출간하자고 제안한 출판사만 여섯 곳이었다니, 역시 이 웹툰이 책 좀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제대로 훔친 건 틀림없다. 그러나 웹툰이 종이책으로 나올 때 독자들은 어쩔 수 없는 문법적 간극을 느끼게 된다. 스크롤하면서 위에서 아래로 읽는 웹툰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책장을 넘기며 보는 종이책은 제책 방식으로 제한될 수 없는, 근본적으로 다른 문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런 간극을 최소화하려면 종이책에서만 볼 수 있는 그 무엇이 필요하다. 출간된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단행본 말미에는 ‘알아 둬도 쓸 덴 없는 작가 주석’과 ‘독서 중독자들의 독서 리스트’가 충실히 정리되어 있다. 각 대사들은 어느 책에서 따 온 건지, 그 책은 어떤 의미가 있고, 그래서 이 대사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빼곡히 적혀 있다. 표지나 제목이 나오지 않았으나 참고한 책, 영감을 준 책까지 정리되어 있어 웹툰과 함께 그 책들을 탐구해나간다면 더울 살뜰한 웹툰 읽기(보기)가 가능해진다.


읭? 못 말리는 책덕이고나.


작가들은 “혼종과 변종이 그득한 21세기 한국 만화계에서 고고하게 왕도를 걷는 정통파 개그 만화를 선택해 주셔서 고맙”다고 했는데, 독자 입장에서도 혼종과 변종이 그득한 21세기 한국 만화계에서 고고하게 왕도를 걷는 정통파 개그만화를, 그것도 책 소재 만화를 그려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서 책 소재의 웹툰이란 무엇인가. 뭔가를 읽지 않고는 배겨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웹툰 또한 보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482호(2018년 2월 20일 발행) 리뷰 지면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8344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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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 통권 482호 | 2019.02.20 | 격주간


Book Design of the Month

슴슴한 아름다움이 묻어나오는 책 / 심우진 (북디자이너)


INTRO

엄지의 법칙을 넘어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 장은수 (이성과감성콘텐츠연구소 대표·<기획회의> 편집위원)


ISSUE 신간이 안 팔린다?

출판계에서는 보통 신간의 수명을 3개월로 봅니다. 발행 후 3개월이 지나면 판매율이 급감하기 때문이지요. 스테디셀러, 베스트셀러 등 이례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쏟아져 나오는 다른 신간들에 당할 재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마저도 1개월로 줄었다고 합니다. 출간 1개월 후 독자들의 반응이 없으면 서점 매대에서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케팅력이 없는 작은 출판사들의 신간은 나오자마자 사장 당하기 일쑤입니다. 유통사의 지표를 봐도 신간의 매출 비중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간 판매 감소 현상의 이면에는 어떤 원인이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장당하는 신간 /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전자책 대여와 월정액 서비스 /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상생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죽지 않는 균형을 위해 / 김성신 (출판평론가·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독자는 구독 중 / 김미향 (<기획회의> 편집팀장)


어메이징 예술책장 04

누구나 읽었지만 아무도 읽었다고 말하지 않는 예술계의 베스트셀러 / 심보선 (시인)


책으로 유튜브 하기 02

어쩌다 북튜버 / 김겨울 (유튜버)


고전하는 나에게 51

너나 해, 인형! / 김경집 (인문학자)


일본 출판 리포트 26

일본 출판계 현안과 화제 /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일본출판학회 정회원)


통계로 보는 한국 출판 02

출판은 사양산업인가 / 민지현 (대한출판문화협회 정책연구소)


Editor in Film 04

주인공을 정말 죽일 거요? / 이하영 (북칼럼니스트)


철학자의 글쓰기 04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글쓰기 / 황산 (인문학 연구자·코넥교육연구소)


BOOKSTAGRAM


REVIEW 김미향 장동석 박인하 김작가 황현경

못 말리는 책덕들의 세계 -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 김미향 (<기획회의> 편집팀장)

당면한 삶을 오롯이 살아내는 일 - 『사람, 장소, 환대』 /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좋았던 과거의 것들과 나쁜 오늘의 것 - 『무슨 만화』 / 박인하 (만화평론가)

당신이 모르는 아시아 - 『변방의 사운드』 /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

지금은 우리가 만나서 - 『디디의 우산』 / 황현경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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