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한 남학생의 망상 만화
*브런치 무비패스를 통해 시사회에서 선감상한 영화입니다.
때가 무르익었기에 <펭귄 하이웨이>를 봤습니다. 장점도 물론 많지만 상스러울 정도로 녹아 있는 천박한 남성 판타지가 거슬려서 리뷰를 씁니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저는 <펭귄 하이웨이>라는 작품(원작 포함)과 감독 입장에서는 좋은 관객이 아닙니다.
사실 대학생 때 원작자 모리미 토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흥미롭게 읽었고, 다 읽지는 못했지만 『야행』도 가지고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유방에 집착한다면 모리미 토미히코는 검은 머리에 집착하죠.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에는 그런 모리미 토미히코의 판타지가 극대화된 ‘검은 머리 귀여운 후배 아가씨’가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그녀를 짝사랑하는 어수룩한 선배 남학생이고요. 출판사가 제공한 책소개에도 이렇게 써 있습니다.
이 책은 바로 이 세상 남자들의 이상형을 그대로 구현한 것 같은, 현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아가씨'에 대한 망상 가득한 한 남자의 짝사랑이라는 그 전형적인 시추에이션을 발판으로 하여 독자들을 단번에 이야기 속 망상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아주 뛰어난 망상력’은 모리미 토미히코 소설의 특징입니다.
그럼, 여기서 본 작품의 주인공인 아오야마가 짝사랑하는 치과누나의 헤어 컬러를 봅니다. 앗. 이럴 수가. 검은 머리가 아니네요. 굳이 따지자면 갈색쯤일까요? 대신 엄청나게 큰 가슴이 있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모리미 토미히코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따라 가나요?
애니메이션 <펭귄 하이웨이>를 봅니다. 치과누나는 분명 치과에서 일을 함에도 불구하고 소년과 늘 함께합니다. 소년과 해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체스도 두고 소년과 콜라캔을 던지기도 하고 심지어는 소년에게 자신의 고향 바다를 보여주겠다며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 큰 어른, 그것도 미적으로 완벽한 치과누나가 초등학교 4학년 꼬마, 그것도 주인공인 아오야마에게만 친절하다고요? 왜요? 아오야마가 똑똑한 남학생이라서요?
전형적인 남성 판타지이지만 환상성 넘치는 애니메이션이니 그냥 넘어가보자고, 심호흡을 해봅니다. 그런데 도를 넘는 가슴 타령에 점차 눈살이 찌푸려집니다. “おっぱい, おっぱい.” 한 번은 괜찮은데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이쯤하면 제발 그만두라고,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싶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누나의 가슴에 대한 기하학’이라는 허울 좋은 말로 포장해 밥그릇과 누나의 가슴을 비교하고, 돔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며 가슴빵이라고 하고, 하루에 30분씩 가슴 생각을 하면 화가 사라진다고 말하다니요. 게다가 누나가 아예 대놓고 가슴 좀 그만 쳐다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더 황당한 건 아오야마를 좋아하던 하마모토가 결정적 순간에 외치는 한마디입니다. “넌 저 언니 가슴이 커서 좋아하는 거잖앗!” 이젠 하마모토 너까지냐... 어쩔 수 없습니다. 이제 저는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요. 초등학교 4학년들의 노골적인 가슴 타령이라니, 정말이지 가슴 노이로제에 걸릴 것 같더군요. 남자들에게 여자의 가슴이란 이토록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찬 것이었군요.
네. 어쩌면, 누군가에게 가슴이란 건 그토록 중요한 것일 테지요. 그걸 아예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적당히 좀 해줄 수는 없겠습니까. 이 애니메이션은 ‘펭귄’ 하이웨이입니까, ‘가슴’ 하이웨이입니까.
그러고 보니 ‘펭귄’도 그렇습니다. 왜 하필 펭귄입니까? 귀여운 펭귄들 실컷 보려고 극장엘 갔더니(마지막에 복사해서 붙여 넣은 듯한 펭귄 무리가 나오기는 합니다만, 글쎄요, 제가 보고 싶었던 펭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온통 おっぱい おっぱい 얘기, 누나 가슴 클로즈업밖에 없고, 도무지 펭귄일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정말이지 진짜로 펭귄을 ‘가슴’으로 치환해도 상관없는 서사입니다. 펭귄 하이웨이여도 되고 사슴 하이웨이여도 상관없으며 물소 하이웨이라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냥 펭귄이 귀여우니까 ‘펭귄 하이웨이’라고 했다, 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설정을 차용해 재버워크를 등장시키고 세계가 말려 있다느니, 세계의 끝은 이러하다느니 얘기하는 건 좋지만 여러 가지로 무리수라고밖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일단 이 서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도대체 아오야마의 아빠는 뭐란 말이니까? 구루입니까?
초록초록한 나무 이미지와 푸릇푸릇한 물의 이미지를 차용한 작화는 싱그러움이 느껴지고 후반의, 어디선가 본 듯한 초현실주의적인 작풍도 봐줄만 하지만 사실 이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좋았던 게 뭐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음악 정도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이 애니메이션은 어디까지나 남자들이 좋아할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요즘 같은 시국에 남자들 중에서도 소수일지 모르지요. 나만 바라봐주고 나한테만 잘해주며 아주아주 아름답고 큰 가슴을 지닌 환상 속의 누나를 그려보고 싶었다... 네, 그렇게 솔직하게 말한다면 저도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시다 히로야스의 <펭귄 하이웨이>는 똑똑한 남학생의 망상 만화입니다. ‘펭귄과 누나, 아마도 잊지 못할 이야기’라죠? 하지만 전 이런 망상에 같이 어울려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제목과 본문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읽고 난 뒤 책보다 더 핫해진 어느 일본인의 리뷰 「고독한 샐러리맨의 오징어 냄새나는 망상소설」을 패러디했습니다. 우리 둘의 리뷰는 통하는 데가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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