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기잼 향기, 회복의 맛

by 이디뜨

스텐볼에 물을 받아 딸기를 쏟아붓고, 흐르는 물에 딸기를 하나씩 씻었다.

꽃병의 시들어 가는 꽃들 속에서 살릴 만한 것만 골라내듯, 설레지 않지만 필요한 일이었다.

냉장고에서 잘 익다 못해 무르고 있는 딸기 한 박스와 반만 꺼내 씻어 먹은 딸기 박스를 드디어 해치우는 날이었다.

아직까지 탱탱하고 상태가 좋은 딸기는 꼭지를 따서 접시에 가지런히 놓아 식탁에 올려두었다.

'많이 익은 딸기로 딸기잼을 만들어야겠다.'

폭이 넓은 냄비를 꺼내 씻은 딸기들을 넣고 가스불을 켰다.

딸기 향이 열을 만나 시큼하고 강한 단내를 풍기자, 텁텁한 입에 사탕 하나를 넣은 듯 침이 고였다.

순식간에 딸기향 가득한 집으로 변했다.


잘 익은 딸기가 열을 받아 흐물어지는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딸아이는, 서랍에서 도구 하나를 찾아냈다.

"너무 곱게 하지 않아도 돼. 과육이 씹히면 더 맛있어."

나는 어디서 본 기억으로, 향을 더하고 살균 작용도 되도록 레몬즙을 살짝 뿌리고 소금도 한 꼬집 넣었다.


한 알 한 알 딸기들이 달디단 빨간 즙을 품은 젤리 형태로 끓어가는 모습을 불멍 하듯 바라보았다.

"설탕은 많다 싶게 넣어야 돼. "

하얀 설탕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꺼냈다.

"열 스푼 정도가 좋겠어. 지금이야. 넣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아쉬운 듯 한 스푼 더 잽싸게 넣는 너.

딱 떨어지는 것보다, 좀 모자란 것보다, 조금이라도 더하는 좋아하는 모습이 나를 닮았다.


불을 줄여 휘휘 고르게 저어주니 끓어오르는 딸기잼에 흰색 섞인 거품이 막처럼 생겨났다.

"엄마! 너무 묽어 보이는데?"

"그래? 조금 더 끓일까? 식으면 굳어서 농도가 적당해지긴 해."

거품을 걷어내 가며 열심히 휘젓다가 충분히 점성이 생긴 듯한 순간 불을 껐다.


마침 남편이 퇴근해 왔다.

"냄새 좋다."

남편은 저녁을 먹고 와 배부르다며 소파에 앉아 티브이를 보기 시작했다.

식빵 두장을 토스트기에 노릇하게 구워 딸기잼 토스트를 만들었다.

반으로 잘라 남편에게 주고 나머지 반은 딸과 한입씩 맛을 보았다.

바삭하고 쫀득한 식빵의 고소함에 갓 끓인 딸기잼이 더해지자, 몇 번 씹을 것도 없이 입안에서 금방 사라졌다.

어릴 때 먹던 맛, 딸기철 끝물에 한솥씩 끓여 큼직한 유리병에 한가득 담아 냉장고에 항상 있던 엄마표 딸기잼, 바로 그 맛이었다.

엄마 옆에서 참견하던 내가 이제 그 맛을 구현해 다.

먹어 본 가락으로 마음이 울리는 지점으로 찾아가면 아는 맛이 되곤 한다.


딸기잼을 냉장고에 넣고 돌아서자, 아일랜드 식탁 위에 갈색 반점이 많아진 바나나가 눈에 들어왔다.

"바나나도 빨리 먹어야 하는데... 초코바나나 스무디 만들어 줄까?"

내친김에 잘 익은 바나나와 초코가루, 우유를 믹서에 달달 갈았다.

순식간에 만들어지는, 딸이 좋아하는 '초바'

유리컵에 가득 따라 붓고 기다란 빨대를 꽂아 딸아이에게 건넸다.

"으음. 엄마! 사 먹는 거랑 같은 맛이야."


이유도 없이 심연의 지하계단으로 한 발 한 발 내려가던 나는 밥때가 되면 겨우 한 발씩 올라오곤 한다.

마치 관성과도 같다.

내 손끝 꼼지락 해서 집안에 음식 냄새가 풍기면 심연으로 가는 문이 잠시 닫힌다.

돈가스를 튀기고, 양배추 채를 썰면서.

냉장고에 무슨 재료가 있나 확인하며 내일의, 모레의 식단을 구상하면서.


빨리 먹지 않으면 물러서 버려야 할지도 모를 딸기 박스를 며칠 동안 모른 체했다.

'결국 버리게 될 거야.'

바나나의 갈색 반점 개수가 늘어가는 모습을, 결과를 정해 놓고 지켜봤었다.

싱싱한 딸기와 연둣빛이 섞인 바나나를 신나게 집어 들던 나는 딴 사람이었다는 듯이.

딸기가 잼이 되고, 바나나가 스무디가 되고서야 다시금 평온한 내가 되었다.

"내 마음이 이랬다, 당신 피곤하지?"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직 온기가 있는 딸기잼을 식빵에 슥슥 발라 나눠먹었으니 괜찮은 결말이었다.

식탁 위에 딸기 접시는 어느새 소파에 앉은 남편 손에서 비워졌다.




딸기와 바나나를 외면하듯 브런치를 멀리했다.

가만히 있고 싶었다.

갑자기 딸기잼을 만들 결심, 움직임엔 심호흡이 필요하다.

열어 보지 않는다는 건, 덮어둔다는 말이며, 다시 열어보는 날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글감 없음을 핑계로, 에너지 없음을 핑계로 또다시 멀리할지도 모르지만, 못 쓰더라도 읽어야 할 글들이 많기 때문에 컴백이다.

브런치의 글들은 딸기잼의 단맛처럼 자극적이고 맛있을 게 분명하다. 엄마표 딸기잼처럼 익숙하고 아는 맛일 게 확실하다.

딸기잼 바른 식빵. 이 브런치가 그 브런치가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방학 끝 새 학기의 시작이 다가오는 시점이다.

방학 때문이었던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