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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시옹 Mar 23. 2022

권력의 중심지가 담아내야 할 대한민국의 가치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 권력 중심지의 변화와 청와대의 역사

출처: 연합뉴스

제6공화국이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제기되었던 청와대 특유의 외부의 고립된 별장과 같은 구조에서 비롯된 소통의 문제, 국민의 삶과 대통령의 삶이 동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써 윤석열 인수위원회에서 제시된 용산으로의 대통령 집무실 이전이 이번 5월 10일 정권교체 이후 확실시되어가는 분위기이다.


권력 중심지의 변화과정

청와대는 본래 경복궁의 후원이었다. 창덕궁의 후원을 가본 적이 있다면 알 수 있는데, 조선시대 왕이 기거했던 궁들의 뒤편에는 늘 왕과 신하가 쉴 수 있는 정원이 존재했다. 창덕궁에 후원이 있었다고, 하면 당연히 경복궁에도 후원이 있어야 마땅한데,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못했다. 이유는 그 경복궁의 후원이 바로 지금의 청와대 자리이기 때문이다. 본래 경복궁과 청와대는 자연스럽게 이어져 광화문을 통과해 근정전 뒤로 북악산을 향해 가다 보면, 경복궁의 후원 즉 지금의 청와대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구조였다.


경복궁은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소실된 이후 선조 때에 복구계획이 있었으나, 경복궁을 복구하기보다는 그 자재로 창덕궁을 지어 왕과 신하들이 기거하는 것으로 확정이 되면서, 흥선대원군 때 복원되기 전까지 경복궁은 폐쇄된 체 접근이 불가능한 지역이 되었다. 한양에 호랑이가 많았다는 역사적 기록이 많은데, 호랑이들이 민가로 접근할 수 있었던 이유가 인왕산과 북악산에서 폐쇄된 경복궁을 통해 민가로 내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을 정도로 경복궁에는 오랜 기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았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으니, 사람 다음가는 동물인 호랑이가 이 일대에서 군왕의 위엄을 떨치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럽기도 하다.


경복궁은 이후 흥선대원군 때에 복원되지만 얼마 사용되지 못하고, 고종의 아관파천 이후 권력의 중심지는 경복궁에서 지금의 덕수궁 (경운궁)으로 옮겨지게 된다. 아관파천 이후 고종은 환궁할 것을 압박당했고, 일본제국이 사실상 점거하다 싶이한 경복궁으로 옮겨가기보단, 경운궁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권력의 중심지가 경복궁에서 경운궁 (덕수궁)으로 바뀌게 된다.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러시아 제국 공사관, 미국공사관, 대영제국 공사관들이 덕수궁 일대에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으로 따지면 한남동의 대사관 밀집 지역이, 당시에는 덕수궁 정동 일대에 몰려있었다는 것이다.


덕수궁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덕수궁의 대한문을 중심으로 한 방사형 도로가 계획되고, 지금의 용산역 - 서울역 - 숭례문 - 덕수궁 (서울시청) - 육조대로 - 광화문 - 경복궁 - 청와대 -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도로의 기초는 이 대한제국 때에 덕수궁이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지정되면서 계획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 틀 안에서 도로망이 뒤바뀌게 된다.


역사적인 틀에서 바라보자면 권력의 중심지는, 정도전의 조선 초기의 경복궁에서 시작되어 (왕정 시대), 이후 창덕궁으로 사실상 옮겨졌다가, 근대에 접어들면서 덕수궁으로 옮겨짐과 동시에 대한제국으로 이어졌고 (근대화 과정), 이후 한일 강제병합으로 인해 경복궁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제국주의 지배). 다만 차이점이라고 하면, 일제는 경복궁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을 지었고, 이때부터 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사람이 들어앉아 살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김영삼 전 대통령 때 무너뜨렸던 조선총독부 청사는 업무를 보는 곳이었고, 지금의 청와대 부지는 조선총독부의 총독이 거주하던 곳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았던 곳에 일제가 들어서게 되면서 이때부터 지금의 청와대 부지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이후 일제의 무조건 항복 선언과 대한민국의 주권회복 그리고 광복 이후에는 권력의 중심이 조선총독부 청사에 조선총독부 총독 관저, 즉 현 청와대 위치로 옮겨졌다.


정권의 이념이나 방향성과 상관없이, 해방 이후 대대적인 일제강점기 시절의 치욕적 흔적들에 대한 바로 세우기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에 따라 광화문이 복원되고 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세워졌다. 청와대 구 본관 (조선총독부 총독관저)에 들어갔었던 이승만 정권도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닌, 모든 내부의 일제강점기 때의 만들어진 장식과 내부 인테리어를 해체했다고 하니, 이념을 뛰어넘어 민족적인 가치 아래에서 청와대 내의 일제에 대한 흔적은 사라져 갔다.


이러한 조치 아래에 복원되었던 광화문의 경우 2010년대에 다시 제대로 복원하기는 했지만, 1960년대 당시 고속도로 하나 제대로 짓기도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경제력과 내부 상황을 고려했을 때, 조선총독부가 권력 중심지를 대표하는 것보다는 당시의 경제 상황에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인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광화문이 대한민국의 권력을 대표하는 것이 그나마 나은 차선이었을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에는 일제강점기 때 지어졌던 조선총독부 청사 건물과 관저 (청와대 구 본관) 건물이 모두 해체되면서, 일제강점기 시절에 들어섰던 식민지배에 대한 상흔들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후에는 서서히 청와대 인근 지역의 개방범위를 넓혀가며 권위주의적 잔재를 없애는 작업이 지속되어왔다.


대한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청와대와 그 주변의 풍경

우리의 근현대사를 일제와 맞서 싸운 대한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현재의 청와대는 일제의 식민지배 역사를 완전히 지워내고, 근대화 그리고 현대화를 성공시켜 독자적인 계획과 방향성을 제시해 나간 대한 역사의 상징이라 볼 수 있다. 좀 더 정확히는 대한을 굴복시키려는 수많은 압박을 극복해나가고 투쟁해 나갔던 역사의 상징이다.


임시정부 초기 국호를 정할 때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1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의 신념과 굳은 믿음은 100여 년이 지난 이후에 대한민국의 성립, 한국전쟁으로 위시한 이념전쟁, 초고속 경제성장 그리고 민주화를 지나면서 현실이 되었다. 대한이란 이름으로 100여 년 전에 패망하고 일제에 복속당했던 대한은, 한 세기를 지나 굳건하고 강한 군사력과 경제력 그리고 100여 년 전 패망할 때의 제국주의 열강 국가들도 쉽게 가지지 못했던 문화적 영향력과 함께 ‘대한’이란 이름을 바로 세웠다.


지금의 권력 중심지인 청와대와 그 인근 지역은 대한의 근현대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소이다. 청와대 앞 광화문 광장을 가면, 훈민정음을 창제해 공통된 문화권을 형성시켜 하나의 민족이라는 인식을 확립시키고 현재 대한이라는 기초적인 틀을 만들어준 왕 세종대왕의 동상이 보이고, 그 앞으로는 민족이 수난을 당하던 시기에 영웅적인 전략과 지혜로 일본에 넘어갈 뻔한 나라를 구한 영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다. 청와대 바로 앞으로는 조선왕조의 역사가 담긴 광화문과 경복궁이 드넓게 펼쳐져 있으며, 광화문 광장 양옆으로는 한미동맹을 상징하는 미국 대사관과 대한으로 흥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우리 조상들에게 자랑하는 듯한 화려한 마천루와 건물들이 광장 주위를 감싼다.


광화문 광장을 넘어서 걸어가면, 세종대로를 따라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의 수난과 극복과정을 잘 보여주는 덕수궁 (경운궁)이 펼쳐져 있으며, 그 옆에는 제6공화국의 성립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6월 항쟁과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유하는 기억인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응원전이 펼쳐졌던 서울 시청 앞 광장이 들어서 있다. 그 아래로 대한의 정문 숭례문이 펼쳐져 있고, 또 더 아래로는 서울역과 용산역이 연 이어져 있다. 이 용산역과 서울역을 통해 한반도의 모든 지역을 철도로 연결했었고, 지금도 대한민국의 모든 지역은 이 용산역과 서울역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청와대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러한 모습과 풍경은 대한으로 망했었고 대한으로 다시 흥한 대한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한눈에 보여주는 곳이다.


바로 세워진 대한(大韓), 그러나 잘 보이지 않는 민국(民國)

지금의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에는 대한은 있지만 ‘민국’의 모습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구조에서는 민주주의 공화국을 상징하는 상징적인 곳이 없다는 것이다. 청와대에서는 그 풍경이 한눈에 보이지만, 청와대에서는 국민들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도, 구경할 수도 또 시간 나면 편하게 앉아서 구경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경복궁을 좀 깊숙이 걸어가다 보면, 시민들이 출입할 수 없는 구간이 나오는데, 그 구간이 바로 청와대와 경복궁이 이어지는 통로이다.


청와대에 접근 가능한 국민들은 대한의 역사와 결실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지만, 대한의 주권과 모든 권력을 가졌다는 대다수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그런 대한의 역사적 흔적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없고 접근하기 전에 제지당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건축가들과 예술문화 종사자들 혹은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대통령 집무실을 현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자는 제안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건축적으로 대한민국의 주인이라고 하는 국민들이 대한의 역사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권위주의를 상징하기에 옮겨야 한다는 여론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현 청와대 위치이기에 수 만 명의 국민이 밀집할 수 있는 광화문 광장이 존재할 수 있었고, 광화문 광장이 국민들이 집단으로 모여 권위주의적 권력에 투쟁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는 사실 또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또 반대로 대통령 집무실을 현 위치에 그대로 두기에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일궈낸 대한의 역사와 결실의 발전과정을 대다수의 국민들은 평생 볼 수 없다는 문제점과 청와대의 위치가 산속 깊숙이 들어가 있어, 국민들과 동떨어진 인식 세계를 가지기 쉽다는 문제점 또한 분명하게 존재한다.


사실 권력의 중심지를 옮기는 것 자체보다는, 옮기는 것을 뒷받침하는 명분의 문제이다. 예산 문제는 권력의 중심지를 정하는 데에서는 두 번째 적인 문제이다. 국회의사당, 대법원과 같은 상징적인 건물을, 예산이 많이 들어가니 저렴하게 아파트 상가처럼 짓자고 하는 것에 동의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건물은 단순히 일하는 공간을 넘어서는 국가적 가치관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옮겨간 곳이 어떤 가치를 상징하게 할 것이며, 어떠한 명분을 제시할 것이며, 어떠한 미래를 그려나갈지에 대한 명확한 정의와 방향성을 지닌 설계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특히나 용산으로의 이전은 대한민국이 처음으로 600여 년 전 한양에 터를 잡고 서울의 기초를 계획했던 정도전의 설계에서 완전히 벗어나, 온전히 대한민국의 역량과 가치관만으로 완전히 새로운 권력 지형을 설계하는 것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이미 주사위는 차기 윤석열 정부에게 넘어갔고, 차기 정부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 의지는 분명해 보인다.


용산은 대한의 근현대사가 시작한 즈음부터 수도 안에 있으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계획하지도 못했던 지역이다. 근현대사가 시작한 시기, 용산 특유의 서울의 중심부에 가까우면서 평평한 지형은 외국 군대의 주둔을 용이하게 만들었고, 이러한 지형적 특성은 용산이 수도 안에 있으면서도 대한의 영향력 밖에 있게 만들었다.


이제 용산 미군기지 반환과 함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대한의 영향력이 닿지 않았던 이 용산을 대한민국이 계획할 수 있게 되었다. 600여 년 전 정도전의 계획 아래에 세워졌던 서울의 기초에, 복잡했던 근현대사가 지나가면서 덕수궁이 축조되고 소실되고 또 임진왜란 때 파괴된 경복궁이 흥선대원군 때 복원되고 일제강점기에는 경복궁이 해체되고 그 위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올라가는 등의, 수없이 많은 수정, 제거, 변경, 추가 그리고 복원의 역사가 이뤄져 왔다.


그러나 용산으로의 집무실 이전은 정도전의 기초설계를 바탕으로 더하거나 수정하거나 바꿔왔던 기존의 권력 설계에서 벗어나, 완전히 독자적인 대한민국만의 설계가 될 것이다. 즉 어느 정도 조선시대 정도전의 한양개발 계획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권력 지형 설계에서 완전히 벗어난, 온전한 대한민국의 가치와 역량으로 계획되고 지어지는 첫 번째 대한민국만의 권력지형 설계가 될 것이다.



출처: 연합뉴스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는 것 그 자체로는 큰 문제가 아니다. 다만 옮긴 위치에 대한민국의 가치가 얼마나 복합적으로 의미 있게 담아내느냐에 관한 문제이다. 대한민국의 가치를 얼마나 담아내고 그것에 국민들이 얼마나 만족하고 납득하냐에 따라 차기 정부의 권력 중심지를 옮긴 것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많은 정권이 옮기려 했으나 이러한 부담으로 옮기지 못했던 권력의 위치, 차기 윤석열 정부가 주사위를 던진 이상, 얼마나 잘 설계하고 대한민국의 가치를 담아내고 실현하느냐에 따라 차기 정부 초기의 평가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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