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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시옹 Nov 02. 2019

구엘 공원으로 시작하는 가우디; 공원산책

구엘 공원 기행기; 우리의 삶과 위대한 한 건축가

어쩌면 안토니오 가우디는 너무나 뛰어난 자신의 업적 때문에 정작 자신이 전하려던 건축적 철학적 메시지가 묻혀버린 건축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가족 성당과 같은 유명한 건축물이 어떠한 가우디의 생각에 의해 어떻게 건축하게 되었는지는 관광지에서 흔하게 듣는 클리세가 되어버린 느낌도 있습니다.


관광지에서 듣는 설명을 벗어난

가우디가 자신의 건축으로서 전하고자 했던 자신의 생각을 살펴보고자. 실제 방문했었던 곳에서 느꼈던 감정을 살려 감히 가우디에 대해 그가 의도하고자 했던 것을 최대한 살려 써보자 합니다.


가우디의 대표적 건축물은

구엘공원, 까사 바트요, 까사 밀라 (하얀 집) 그리고 사그라다 파밀리아(성 가족) 성당일 것입니다. 굳이 이 순서로 나열한 것은 그렇게 봐야 가우디가 의도하고자 한 건축의 시작과 그 성대한 마무리가 잘 보이기에 이렇게 의도했습니다.


구엘 공원에 대해 설명하자면 구엘은 당시 아흐누보 시대 (Arte Nouveau)에 가우디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자본가 즉 새롭게 부를 쌓은 자산가였습니다. 구엘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가우디는 제한 없이 자신의 이상을 펼칠 공간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자본가들이 탄생하였고 이러한 자본가들의 문화적 욕구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자기와 맞는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경제적 사회적으로 지원해주면서 그 이전에는 없었던 대규모적 다양한 창작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구엘 공원 전경
진짜 말 그대로 공원입니다

20세기 초 이전에는 정원은 귀족의 소유였습니다. 정원이라는 곳은 사실 일반 시민 기준으로는 누릴 수 없는 문화생활이었다는 것입니다. 근데 근대 산업혁명이 이뤄지고 새롭게 부를 이룩한 계층이 대두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양상에 변화가 시작됩니다.


새로운 부의 계층은 단순히 먹고사는 것을 넘어선 문화생활을 누리고자 했고 이러한 욕구 속에 귀족들의 정원은 점점 대중들에게 개방된 정원 혹은 공원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특히 당시 유럽에서는 유럽 제국주의 열강들의 소위 자존심 싸움이 벌어졌는데 얼마나 멋진 정원을 만들어 시민들로 하여금 이용하게 만드는 가가 국가의 부를 자랑하는 수단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정원의 공원화와 도시의 중세 모습에서 근대로의 전환은 점점 가속화하게 됩니다. 


구엘 공원은 러한 기조에 있던 공원이었습니다. 1900년에 시작에 1914년에 완공되었지만 공원이라는 특성 탓에 지금도 공원 곳곳 새로운 시설물 공사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금과 그때의 다른 점이라고 하면 초기 공원은 지금의 휴식공간이라기보다는 오래된 근대 도시에 얼마 안 되는 무료인 멋지고 탁 트이고 사람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처럼 아무렇게 입고 나가는 것이 아닌 지금의 가로수길이나 강남대로 혹은 홍대 같은 곳과 같이 차려입고 뽐내고 자랑하고 얘기하러 가는 핫플레이스의 개념과 더 유사했습니다. 이러한 영향에 따라 20세기 초반 풍경화나 화가들이 그린 풍경을 보면 다들 옷도 이쁘고 소위 "힘 준듯한" 풍경이 많은 건 당시의 공원은 이쁘고 젊고 잘생기고 스타일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핫플"의 개념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Promenade (프호므나드)

라는 뜻은 산책하다의 뜻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핫플레이스에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즐기는 개념에 가깝다고 생각하면 편하실 것 같습니다.

이태원, 강남, 홍대 거리를 옷 예쁘게 입고 이리저리 배회하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이런 행위 자체를 프호므나드라는 개념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편하리라 봅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재의 핫플은 그 시대의 공원과 같은 곳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합니다.


인스타그램은 그 당시의 풍경화를 그려 판매하던 화방

사진가는 그 시대의 수많았던 화가들

사진 속 모델들은 그 시대에 외모나 어떠한 부분이 뛰어나 주목을 받았던 사람들

이런 맥락으로 생각하시면 지금의 문화가 이상한 것이 아닌 시대의 자연적 흐름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런 암벽들이 다 가우디가 의도하고자 한 바였습니다.
지금보면 꼴라쥬같은 여러 조각난 타일을 일일이 붙여 넣는 것이며 자연주의자적 특징을 보여주는 유선형 벤치입니다.
벤치라고 써 둘 필요 없습니다. 앉을 만하면 앉으면 됩니다. 그곳이 벤치입니다.

가우디는 자연주의자이자 독실한 가톨릭교도였습니다 또한 바르셀로나 즉 카탈루냐 지방의 지역 민담까지 이러 요소들을 모두 자신의 건축에 적용하려 했습니다. 그의 건축이 동화 같은 건 자연주의자이기에 가능했던 곡선형과 지역 민담으로 인한 동화 같은 풍경 그리고 가톨릭교도였기에 선택했던 고도제한과 같은 소가 있습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은 이 카탈루냐 지방의 지역 민담에 관한 얘기 거기에 얽힌 일화도 상당히 재밌습니다. 그때의 생각이 그럴 만했었다고 할까요.


이러한 가우디의 특성 탓에 공원은 공원적인 요소를 내포함과 동시에 그의 건축적 특징도 드러나게 됩니다. 지역 민담의 영향을 받아서 그런가 조각들도 마치 드래곤을 연상시키는 듯한 디자인 성채를 연상시키는 듯한 디자인이 상당히 많습니다.

용 뼈 안에 있는 듯한 돌기둥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돌무더기를 치우는 것이 아닌 그 돌무기를 이런식으로 마치 자연의 일부였던 것처럼 재창조시켰습니다.
조각 위에 자연이 얹어져 부드럽고 안아주는 듯 합니다. 이런 디자인을 싫어했었지만 좋아하게 만들어준 계기였습니다.
산의 경계를 따라 자연스럽게 길이 나 있습니다.

공원을 짓는 것은 건축물을 짓는 것 그 이상을 담아낸다고 생각합니다. 공원이라는 제3 공간의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건축가의 생각이 드러나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지속성 또한 담보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도심과 어우러지게 인접해 있습니다.
공원 입구, 가우디 타일이 인상적입니다.

사실 이 입구를 시작으로 뒤로 들어가는 것이 이 공원과 도심의 위치를 생각하면 더 자연스럽습니다. 근데 보존을 명목으로 한 입장료와 어마어마한 관광객을 맞이할 준비가 안 돼있는 듯한 인프라는 이러한 공원적 요소를 무시하게 만들었습니다.

정원을 공원으로 시민에게 돌려주자는 기조

이 기조 아래에 지어졌던 공원은 관광지화 되자 또 다른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에 정부의 정원이 되었습니다. 우디는 공원이 이렇게 폐쇄되는 것을 바랐을까요? 공원의 특성을 잃어가면서까지 자신의 작품이 보존되기를 바랐을까요? 아니면 흘러가는 자연처럼 시대에 맞는 새 세대의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시대에 맞게 자연의 이치처럼 바꿔나가기를 바랐을까요?


궁궐처럼

수많은 건축물들이 보존이라는 명목 아래에 원래 그 쓰임세를 잃어버리고 버려진 조각상처럼 사람의 온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당장 창덕궁 쪽 좀 후미진 데만 가도 좋은 공간이 많은데 아무도 모르고 찾아오지도 않고 보존이라는 명목에 갇혀 세월에 바레 가기만 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예술적인 측면도 있지만 실용적일 때 예술적인 측면이 빛을 발휘합니다. 실용할 수 없는 건물은 조각이 되어 그 아름다움의 진가를 알리지 못하고 무너져가게 됩니다.

창덕궁에 핵심적 공간 말고 원래 실무자들을 위해 쓰였던 공간은 문화재청 같은 공공기관이나 들어올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는 회사들에게 공모해 형태를 어느 정도 유지하되 현대화하는 조건으로 입찰하면 어떨까요?


그게 어렵다고 하면 덕수궁의 공터에 터만 맞추고 그 위에는 심사숙고를 걸쳐 완공된 궁궐에 어울리는 현대적인 건물을 지어 실용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은 어떨까요? 일제시대로 조선시대부터 내려온 우리만의 대규모 건축들이 끊긴 현재 이러한 시도는 우리의 정체성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우리가 어떻게 미래로 나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그 뒤로 입장하는 건 아무 제한이 없습니다.

다시 가우디로 돌아가

좀 돌아가긴 했지만 또 다른 입구로 들어간 구엘 공원은 공원다워서 좋았습니다. 도심지와 어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구엘 공원인지 아닌 지 잘 못 느낄 정도로 자연스럽게 공원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렇게 동선적으로 자유로우니 더 공원다워 인상적이었습니다. 바르셀로나 지방 특유의 식물과 그에 어울리는 암반 조경이 인상적이었는데요. 작은 것 같지만 미국의 서부를 뺨치는 야수적인 스페인의 풍경과 목가적으로 아름답게 덮어주는 식물이 잘 조화를 이뤄 독특한 풍경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느낌이 새롭고 따뜻했습니다.

공원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모이게 하는 요소는 입장료와 입장제한으로 유명무실해 진듯 합니다.
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뭐가 공원인지 시가지인지 모를 정도로 도심에 융화되어 있습니다. 바르셀로나가 매우 잘 보이는 위치해 있어 더 인상적인 듯 합니다.

이렇게 좋은 공간을 그냥 황량한 공원이 아닌 어울리는 시설물과 도심의 연계 무엇보다 가장 높고 좋은 공간을 공원으로 모두에게 나눠준 구엘의 구상에 감사를 표하고 가우디의 설계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공원을 지으면 지형을 갈아엎어 실용적이지도 않는 시설물을 만들거나

가장 높으면 바로 아파트나 고층빌딩을 올려버리고

공원을 만들라고 했는데 국립공원을 만들어버려 상업시설을 아예 없애버리고 접근하기 어렵게 해 아무도 가고 싶지 않게 만들고

공원이었던 곳을 보존이라는 명목으로 들어가기 어렵게 들어가기 싫게 만들고

공원을 지어야 할 곳에는 빌딩을 올리고 짓지 말아야 할 곳에 공원을 짓는


우리의 건축 특히나 공공건축을 보며 더욱더 많이 생각하기 됩니다. 우리도 좋은 건축가 많은데 좋은 디자인 생각 많은데


규제에 모두 가로막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구시대적 생각에 막혀 좋은 디자인도 그저 그런 디자인으로 바꿔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보니

바르셀로나의 풍경은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공원 자체가 산에 나지막히 있다보니 바르셀로나 전경이 이렇게 시원하게 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참조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가우디의 완성인 성 가족 성당이 일직선으로 보입니다.
장관입니다. 제 생각으로는 남산이나 북한산에서도 이러한 공원과 풍경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전에 있었을 법한 건물도 구엘 공원의 일부가 되었습니다.
가우디는 좋은 건축가입니다.


사용자의 특성과 공간에 맞춰 디자인하고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버무려 낼 줄 아는 예술가입니다. 사용자와 공간을 고려하지 않은 설계는 예술가의 장난감일 뿐입니다.


건축이 가장 뛰어난 예술로 인정받는 것은

실용적이면서 그 실용성에서 예술성을 뽑아내기 때문에 뛰어난 것이라 생각합니다. 건축을 제외한 예술은 사람을 덮어주거나 보호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건축은 예술이지만 사람을 덮어주고 안아주고 보호해줍니다. 이러기에 건축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가우디는 수 천만명의 바르셀로나 관광객을 품어냄과 동시에 자신의 예술성을 그 공원; 공공을 위한 건축을 통해 드러냈습니다.


공원의 식물이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고
지형을 따라 난 길은 하나님의 위대함과 오랫동안 형성된 자연의 발자취를 따라 걷게 해 주고
그의 용 같은 공원 시설은 마치 우리를 보호해주는 성처럼 우리는 더위로부터 외부로부터 감싸 안고 보호해줍니다.

중앙의 광장시설은 지금은 막혀있지만 사람들 오 하여금 모여서 얘기하며 풍경을 감상하고 생각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시설을 덮어버린 자연은 그의 자연주의적 특징과 자연을 사랑했던 가우디의 생각을 보여줍니다.


공원은 그 건축가의 사상을 잘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건축가의 생각과 깊이를 알고 싶을 때 저는 공원을 먼저 살펴봅니다. 그 공원의 구조나 설계를 통해 보이는 건축가의 태도는 그 건축가가 어떠한 지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엘 공원은 어찌 보면 가우디 작품 중 가장 대중성 높고 자기 색이 덜한 작품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예술가 가우디보다 건축가 혹은 조경가로서의 가우디가 더 빛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모두를 위한 구엘 공원을 만들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특이한 예술가로 남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구엘 공원은 가우디를 건축가와 조경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 작품이라 볼 수 있습니다.


바르셀로나를 가시기 되면

바로 유명한 건물을 보러 가기보다 풍경을 보고 거리를 보며 여러 공원들을 먼저 방문해보시기를 추천합니다. 그 공원이 그 도시의 태도, 건축가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우리가 여기서 어떠한 영감을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그러니 구엘 공원에 가서 가우디의 작품을 본격적으로 보기 전 공원을 걸으며 그가 사랑했던 자연, 따스함, 동화적 요소들을 모두와 함께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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