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시작
생애 첫 해외여행에도 이르고 늦음의 기준이 있을까. 이십대에 흔히 경험하는 배낭여행이나 교환학생 한 번 떠나보지 않은 나는 이십대의 중간 즈음 첫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정보 프로그램은 즐겨보면서도 막상 그 여행의 대상을 실제 나로 대입해보지는 않았다. 나는 이곳을 떠날 리가 없으니까.
여행을 떠나기 세 달 전쯤 충동적으로 비행기 티켓을 끊어 버렸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또 어떤 변덕이 나를 이곳에 붙들어 맬지 나로서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연말, 2015년을 일주일 남겨두고 떠나는 여행. 카운트다운을 태국에서 세고 오리라는 드라마틱한 여행 계획은 내게 그러므로 언감생심이라고 해야 할까, 애초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굳센 믿음 덕분에 나는 나의 충동질에 불을 붙이고만 것이다. 대망의 첫 해외여행 파트너는 남자친구와 남자 사람 친구 그리고 나, 이렇게 셋.
그러니까 비행기 티켓을 끊기 세 달 전, 막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이 남자 사람 친구가 내게 흘린 말 한 마디가 이 모든 사건의 불씨가 되었다. ‘우리 언제 다 같이 태국 한 번 가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정확히 그 여행지가 태국이었는지 동남아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왠지 이 말을 들은 순간 이때가 아니라면 나는 정말 이 나라를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동시에 이 여행이라면 꽤 재미있는 ‘첫’ 해외여행의 시작이 될 것 같다는 유쾌한 확신이 들었다. 언제부터 내가 ‘첫’이라는 것에 이렇게 의미 부여를 하기 시작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흘린 이야기였다면 이 친구 입장에서는 꽤나난감했으리라. 정확히 이 이야기가 나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나는 여행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우리 비행기는 언제로 잡을까?’ 어떤 면에서는 우유부단하기로 제일가는 내가 대뜸 여행 이야기로 적극성을 띄자 ‘추진력’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야 말았다.
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일까. 겨울이 오면 늘 인사치레로 겪는 감기몸살이 제대로 찾아왔다. 이미 일찌감치 여름과 가을을 차례로 겪고 난 후였기에 나는 면역이 생겨 괜찮을 거라며 안심했었다. 위가 별로 좋지 못하다는 사실은 망각한 채. 아니 한 해에 계절마다 몸살을 앓으리라고 난들 알았을까. 대뜸 도져버린 위염을 시작으로 여행 삼일 전, 나는 열감기를 앓기 시작했다. 삼시세끼 처방받은 약을 꼬박 챙겨 먹으면서 기필코 출국날까지 낫겠노라 다짐했건만 야속한 몸뚱이는 오히려 악화되고 있었다. 그렇게 도착한 인천공항. 무슨 정신으로 그 모든 수속을 마쳤는지 유독 사람이 많았던 연말의 인천공항에서 나는 초인적인 집중력을 발휘했다. 남은 체력을 수속에 쏟아붓고 나는 비행기 안에서 사력을 다해 끙끙 앓았다.
오, 멀미. 비행기에서조차 멀미를 겪을 줄이야. 그러니까 나의 몸상태가 얼마나 최악인지를 알 수 있는 지표가 내게는 멀미다. 정말 상태가 나쁠 때는 지하철에서 조차 멀미를 하고 마는데 이 날은 그러니까 비행기에서 멀미를 하고 말았으니 얼마나 힘든 이동이 되었을지는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동행하는 이들의 즐거운 여행길에 재를 뿌리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입을 앙다물고 창가에 머리를 욱여넣은 채 눈을 감았다. 막연히 가깝게만 느껴졌던 태국에 도착하기까지 정확히 여섯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최대한 몸을 구긴 채 어떻게 하면 몸을 조금 더 편안히 웅크릴 수 있을지를 연구했다. 저가항공의 좌석이 그리도 옴짝달싹할 수 없는 것인지 그 날처음 알았다. 그렇게 인내심의 한계를 가늠하고 있을 즘 울려 퍼지는 반가운 소리.
"곧 착륙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