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열에 들뜬 눈으로 처음 만난 방콕의 색.
비행기 문을 벗어나자 피부로 느껴지는 여름밤의 습한 공기 냄새. 생각 없이 챙겨 입고 온 두터운 짜임의 니트를 내려다보며 다음 여행에는 이런 실수 따위 하지 않으리 다짐했다. 아찔한 현기증을 느끼며 수완나품 공항에 첫 발자국을 남긴다.
공항에서 택시를 잡아 숙소로 향하는 길. 비행기에서 착륙 도중 느낀 멀미가 가실 새 없이 택시에 올라타며 부디 이 차에서 아무 냄새가 나지 않길(멀미가 아니라도 나는 냄새에 민감한데 특히 한국의 택시 냄새를 맡으면 오분 안에 멀미를 시작한다) 바랐다. 공항에서 삼십여 분 정도 떨어진 숙소. 울렁거리는 속을 부여잡고 그렇게 방콕의 길을 처음 바라봤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간, 깜깜한 어둠이 깔린 방콕의 도로 위로 스쳐나가는 나지막한 건물들은 한국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심지어 나는 "여기 분당 가는 길 같아"라는 얘길 뱉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큰 실언이었는지는 다음날 본격적으로 시작된 여행길의 시작에서 알아챘다.
늦은 새벽, 숙소에 도착해 허겁지겁 샤워를 마친 후 잠자리에 들어 또 그렇게 동이 틀 때까지 끙끙 앓았다. 그렇게 맞이한 대망의 첫날, 나는 낯선 침대 위에서 눈을 뜨자마자 몰아치는 편두통에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끼며 집 생각이 간절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진통제를 삼키며 발등을 내려다본다. 어지럼증이 내 키를 180 센티미터 정도 늘려놓은 듯 아득하다. 이럴 수는 없다, 여행 첫날부터 이럴 수야 없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튼을 젖힌다. 과연 내리쬐는 햇살의 강렬함을 맞이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서 있는 이 곳이 태국 땅임을 인정했다.
리조트 밖을 빠져나와 처음 맞이한 태국의 햇살이란. 모든 사물을 총천연색으로 빛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정말로 태국의 길거리는 건물 색부터 택시, 뚝뚝(삼륜 오토바이 형태의 이동수단)에 이르기까지 알록달록 눈부신 원색으로 가득했다. 아무런 길에 잠시 정차한 택시만 촬영해도 그림이 완성될 정도였으니까. 여행길에 오르는 순간까지 카메라를 사지 않은 것에 크게 낙심했지만 방콕의 찬란한 햇살 덕분에 아이폰 하나면 사진은 충분했다.
바가지를 씌우겠다는 의지를 밝히는(미터기 켜기를 거부하는) 택시기사를 두어 명 보내고 우리는 드디어 정직한 택시 드라이버의 차에 올라탔다. 무려 다섯 가지의 성조를 갖고 있다는 태국어. 여행책자에 적힌 그 한 문장이 예상치 못한 언어의 장벽을 실감케 할 줄은 택시에 오르는 순간까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관광수입으로 먹고사는 나라의 사람들이지만 리조트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는 어쩐 일인지 아주 간단한 영어로도 의사소통을 하기가 어려운 곳이 방콕이다. 옆구리에 챙겨 든 가이드북 안의 간단한 태국어를 사용해가며 최대한 내 발음이 태국어의 그것과 비슷하기를 바랄 뿐.
그래서 이 태국어에 얽힌 다소 우스운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희한하게 같은 단어를 발음해도 남자친구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고 내가 발음하는 단어는 용케도 알아듣는 것이다. 평소 동생과 장난 삼아 주고받았던 태국의 인사말(사와디카)이 도움이 되었던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 첫 행선지인 태국의 왕궁 '왓 프라깨우'에 무사 도착할 수 있었다. 여기서 살짝 밝히는 태국어 발음의 비법은 아주 간단하다. 파열음을 강조해 사용하면 된다. 그러니까 세게 발음하시라. 왇쁘라깨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