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어렵지 않아, 다만 용기가 필요할 뿐.

체인지메이커 청년들의 월례회 '세상에이게모임' : May, 2017

by Nina





살다보면 그냥 다 포기하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은 시기가 찾아온다. 이상하게 그 날이 그랬다. 일정을 다 미루고 집에 가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맘대로 움직여주지 않아 성질이 났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셜섹터 청년 리더들의 월례회, '세상에이게모임'의 첫 날인데!


가만히 있으면 멍청이가 되는 것 같아 뭐라도 해야 하는 이 성미가 어딜 가겠는가. 주말이었지만 그 날도 오전에 일정이 있었고, 스터디가 끝나고 나면 몇 시간 뒤 오후에 열릴 '세상에이게모임'을 위해 몇 가지 문서작업을 해야 했다. 그나마 내가 웃음이 헤픈 사람이라 별 것 아닌 일에 깔깔 웃으며 오전을 나름대로 괜찮게 보냈지만, 폭풍같은 웃음소리로 채워진 시간을 뒤로 하고 나 홀로 남겨졌을 땐 남아있던 손톱만한 에너지조차 쓸려가 사라지고 마음이 텅텅- 소리를 냈다. 마치 내 텅장처럼 말이지. 비어있다 못해 뒤틀려 쥐어짜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무엇에 이끌리듯 모임준비를 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이 열정이었는지, 호기심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책임감이었는지는 모른다. 약속장소 근처에서 우연히 모임원(이자 내게 늘 많은 도움을 주는) 백을 만나 함께 목적지로 향했다. 그림책과 커피를 파는 곳이었다.








크라테는 작년 3월에 친구와 함께 시작한 청년 단체, 아니 청년 프로젝트다. 우리는 ‘왜 우리는 본연의 우리로 살 수 없는가’에 집중했다. 세상은 너무나 많은 것들을 우리에게 기대하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우리는 그것을 마치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그리곤 어쩌면 일회용이라고 불러도 무리없을 우리의 매일 매일을, 그리고 삶이라는 것을 세상이 원하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 낭비한다. ‘오늘이 내 생의 가장 젊은 날이다’라는 말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 수많은 이들에게 과연 얼마나 큰 희망을 주는지는 잘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우린 생의 가장 젊은 나날들을 좋은 학력과 좋은 직장, 멋진 차, 내 집을 위해 투자하고 있으니까. '나 답게 살면 좋지! 근데 현실이 안 그래.'라는 말이 가슴을 툭 때린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우리를 이토록 씁쓸하게 한다.



지난 2월에 진행한 청소년 자아탐색 워크샵 현장


어쨌든, 그래서 크라테를 시작했다. 모두가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소소한 커스터마이즈 스티커 나눔이나 청소년 대상 자아탐색 워크샵을 진행해왔지만, 내 마음 속엔 청년을 위한 무언가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욕구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계속 남아 있었다. 어쩌면 내가 청년이기에, 그리고 자아가 왔다- 갔다-하는 폭풍 속에 있는 사람이기에 내게 필요한 것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와중에도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해 최근 나와 친구 모두 ‘인턴’이라는 신분을 갖게 되면서 크라테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것이 불가피해졌고, 때마침 주변에서 소셜섹터 청년 리더들을 위한 모임을 만들어달라는 제의가 들어왔다. 이게 바로 ‘세상에이게모임’(이하 세이모)이 탄생하게 된 계기다. 뭔가 심금을 울리는 엄청난 계기가 있었다거나, 운명적인 스토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셜섹터에 대한 설명은 더나은미래의 17.9.17일자 기사에서 루트임팩트 김단비 매니저 인터뷰 부분을 참고하시면 좋겠다.


입장을 달리할 기회가 많을수록 헤아릴 수 있는 것의 범위가 커지는 것 같다. 항상 객체로서 어떤 모임에 참여하는 입장이었다면, 세이모는 달랐다. 굳이 주도하는 자와 이끌리는 자를 가르고 싶지 않지만, 현재는 크라테가 모임을 이끌고 있다. 아무리 평등한 모임도 초창기에는 주도하는 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나의 믿음이 사실이라면, 지금은 감히 크라테가 주도하는 입장이라고 말해두어야겠다.


세이모는 크라테를 운영하면서 항상 지향해온 ‘다리(Bridge)’의 역할을 가장 잘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다. 모임의 주체는 크라테가 아닌 각 리더들이고, 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운영방식도 수정해가려고 한다. 그렇기에 주도한다는 말이 꺼려진다. 언젠가는 크라테가 없어도 잘 굴러갈 세이모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나는 크라테가 소셜섹터 청년 리더라는 '예술가'들에게 세이모라는 ‘훌륭한 도구'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길 원한다. 그래서인지 더욱 시작을 잘 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모임 참여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컸다. 더불어 주도하면서도 주도하지 않아야 하는 입장이 난처하기도 했다.








인액터스 활동중인 박과 '프로젝트 위기' 대표 백. 나는 본의 아니게 홍일점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첫 모임은 시작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참석자는 많았다. 물론 나를 제외하고 단 두 명 뿐이었지만 나는 나 혼자면 어쩌나 걱정했다! 소소한 근황 토크, 그리고 현재 가지고 있는 자신의 고민들을 풀어놓으니 속이 시원했다. 고민이 꼬리를 물고 더 늘어나는 느낌이긴 했지만. 모임에 참여한 이들에게 '세이모, 잘 할 수 있을까?'라고 물으니 '잘 될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책임한 듯 들릴 수도 있지만, 다정하고 진심이 담겨있는 대답. 그 말 한마디에 내내 석연치 않던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었다. 나는 아직도 이렇게 미숙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나는 그저 나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말이 필요했던 것이다. 늘 그랬듯, 나는 항상 '잘 하자'라는 생각에 점령되는 타입이기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느끼며, 나만 좋았던 시간은 아니었나 의심이 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 스스로를 다독거렸다. 잘 하지 말고, 열심히 하자. 그거면 됐어.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잖아. 엄마도 엄마가 처음인 것처럼, 나도 세이모가 처음이니까. 웃프게도 갑자기 엄마가 보고싶어졌다. 다행히도 집에 가는 길에 '오늘 모임에서 많은 인사이트를 얻었다. 고맙다.'고 박이 보내온 장문의 메시지는 세이모를 지속하는 것에 대한 확신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미지출처 : http://kimstreasure.tistory.com/1938


영화 <피터팬>에서 아버지가 용기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웬디와 동생들에게 어머니는 이런 말을 남긴다.

"용기에도 여러 종류가 있단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도 용기야."


크라테에게, 그리고 나에게 지금 필요한 용기는 '훌륭한 도구'가 되겠다는 용기. 시도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는 용기다. 백의 말대로, 변화는 어렵지 않다. 다만 용기가 필요할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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