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나는 폴에 자연스레 감정이입이 되었다. 가장 보통의 인물인 것 같아서다. 그녀는 자율적이고 싶은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에 소속되고 싶은 이중의 욕망을 가졌다. 타인, 관계, 제도로부터의 구속을 끊으며 이룩되는 자유에는 그 단절이 주는 고독이 불가피하다. 반면, 관계를 추구하면 자유가 억눌린다. 이 양극 사이에서 우리는 머뭇대고 맴도느라 또 고독하다. 이쯤 되면 고독은 어떻게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니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매번 “잘해 보려고 했어. 정말 잘해 보려고 했어" 울먹이면서도 아예 떨쳐버리지도, 아예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이 또 매번 서툰 인간이다.
20대의 사강이 아니라 40대, 50대의 사강이 그릴 폴은 어떤 모습일까 문득 궁금하다. 안정과 성숙, 자기 통제라는 삶의 관습이 몸에 밴 폴의 선택이 다시 외로움으로 채워질 것이 뻔해 보이는 이 소설의 결말에서 2년 혹은 3년 뒤의 폴이 어떤 모습일까 궁금했다. 시몽이 줄 불안도, 로제가 줄 외로움도 모두 거절하고 혼자 고독할 순 없었나, 폴에게 묻고 싶기도 했고.
“어쩌면 자신이 그들의 사랑을 위해 육 년 전부터 기울여 온 노력, 그 고통스럽고 끊임없는 노력이 행복보다 더 소중해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219쪽
또 하나, 폴에 감정이입이 되었던 건 미련쟁이 폴의 모습 때문이다. 때로 버리고 끊어내야 할 시간이나 인연을 차마 놓지 못할 때가 있다. 6년 치 인생의 시간 동안 갈아 넣은 노력이 아까워 행복을 잡지 못할지라도 꼭 쥔 손을 풀지 않는다. 아무리 그 노력이 고통스럽고 하염없는 것이어도 우리는 자주 그렇게 어리석다.
미련은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이다. ‘미련’이라는 명사에 ‘그러한 상태’라는 뜻을 더해 형용사를 만드는 ‘-하다’라는 접미사가 붙으면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릴 정도로 매우 어리석고 둔하다”라는 형용사 ‘미련하다’가 된다.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이 그러한 상태로 계속 남아 있게 되면 미련해지나 보다. 어리석고 둔한. 그런데 뜻밖에 많은 사람이, 뜻밖에 많은 시간을 미련쟁이로 사는 것 같지 않나. 폴처럼.
이 이야기의 결말은 ‘고독’이다. 세 사람 모두 외로울 수밖에 없다. 익숙하고 편하지만 앞으로도 “책임에서 자유로운 남자”일 로제에게 돌아가며 “이제 나는 늙었어. 늙은 것 같아…”라며 시몽에게 이별을 고하는 폴은 당장 외로워질 것이 뻔하고, 폴이 시몽에게 간 동안 너무 불행했고 몹시 외로웠다던 로제는 그럼에도 자유를 포기하지 못해 자유 속에서 계속 외로울 것이며, 열정 가득한 사랑을 거절당한 시몽도 한동안 외로울 것이다. 그 외로움으로 가득 찰 시간 속에서 그나마 시몽은 성장하겠다. 모든 고통과 모든 슬픔을 격렬히 겪어낼 것이므로.
피아니스트 김정림은 브람스 선율을 두고 “한 음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도는 듯한 선율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라고 했다. 폴, 로제, 시몽. 이들 세 사람의 이야기는 브람스의 선율처럼 어떤 멜로디를 선택하든 결국 ‘고독’으로 다시 돌아와 빙글빙글 맴돌게 될 것 같다.
그나저나 브람스와 클라라, 시몽과 폴, 두 커플 모두 열네 살의 나이 차라는 것과 청년 시절 푸른 눈을 가진 아름다운 금발의 미소년 이미지였다는 브람스와 "깜짝 놀랄 정도로 미남"인 아름다운 시몽의 공통분모를 떠올리며 스물네 살의 사강을 또 상상했다. 그녀는 어떻게 이 이야기의 뼈대를 세워나갔을까. 시몽처럼 젊은 사강에게 폴의 선택과 나이 듦의 심리(사실 폴은 겨우 서른아홉, 심지어 아직은 30대다)는 어떻게 도출되고 이해됐을까. “우리의 일상을 배경으로, 난해하고 모호한 사랑이라는 감정을 진솔하게 그려 냈다”는 출판사의 책 소개를 찾아 읽으며 사강이 그려낸 결말이 진솔함일지, 혹은 스물넷이 바라본 서른아홉에 대한 오해(혹은 나이듦의 오해) 일지, 문득 궁금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앞서 “자유로운 그러나 고독한(Frei aber einsam)”이라는 말이 브람스의 삶과 어울린다고 했으나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는 브람스와 클라라의 관계에서 자유롭지만 고독한 채 살았던 건 클라라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네 살이나 연하인 아름답고 재능 있는 청년, 존경과 불타는 사랑의 마음으로 자신에게 헌신했던 남편과 자신의 제자, 평생 마음속에 자신을 품었던 우수와 낭만의 예술가.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자신을 연모하면서도 끊임없이 창녀를 찾아다닌 남자… 이렇게 브람스를 서술하다 보니 아무리 클라라 자신이 브람스에게 열정적 사랑과 예술적 영감의 대상, 연모의 대상이었더라도 그녀에게 브람스는 시몽처럼 젊고 아름답지만 불안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였겠다 싶다. 받아들일 수 없는, 또 다른 고독의 이유만 될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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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글 출처: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민음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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