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Frei aber einsam “자유로운 그러나 고독한”
바이올리니스트 요하임의 인생 좌우명이자 그가 친구인 브람스에게 건넨 말이다. 곱씹을수록 참, 브람스의 생(生)과 어울리는 말이다. 한평생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자유로웠지만 그래서 고독했던 삶. 아차, 쓰고 보니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았다는 말은 어폐가 있다. 브람스의 삶은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은 독신의 삶이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 철저히 한 사람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던 삶이기도 했다.
슈만과 클라라의 사랑만큼이나 클라라를 향한 브람스의 외사랑도 유명한데, 그는 스무 살에 슈만의 아내 클라라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브람스보다 열네 살이나 연상이던 그녀는 자신의 스승인 슈만의 아내이자 이미 그때 여러 아이를 둔 엄마이기도 했다. 브람스의 재능을 힘껏 지지하고 응원했던 슈만이 40대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브람스는 클라라를 물심양면으로 돌보았고 평생 그녀를 연모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후에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자 브람스 또한 급격히 쇠약해져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브람스의 음악은 쓸쓸하고 따스하다. 소박하고 잔잔해 아름답다. 종종 완결을 미루고 여운을 남기는 듯한 브람스의 하모니처럼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제목에는 질문의 물음표가 아니라 여운의 말줄임표가 찍혀 있다.
“그녀는 한 손을 그의 손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녀는 완벽한 안정감과 더불어 자신이 그에게 완전히 익숙해져 있음을 느꼈다. 로제 이외의 누군가를 사귀는 일 같은 건 결코 할 수 없으리라. 그녀는 그런 안정감에서 서글픈 행복을 끌어냈다.” -21~22쪽
폴은 서른아홉 살의 이혼녀로 파리에서 실내 장식가로 일하고 있다. 운송 회사를 경영하는 중년의 남자 로제와 6년째 사귀고 있지만 둘의 관계는 애매하다. 분명 사랑하지만 남자는 그들의 관계에 확고한 의지가 없다. 그는 폴보다 어리고 부담이 없는 여자들과 밤을 보내는 것을 마다하지 않고, 그녀는 두 사람의 관계에서 규율처럼 자리한 ‘자유’에 지쳐가고 있다.
익숙하다는 건 뭘까. 감정이 요동치며 천당과 지옥을 오가고, 그 와중에 도파민 세례가 쏟아지는 짜릿한 ‘사랑’의 시간이 지나면 들끓던 호르몬도 제자리를 찾아 익숙함이 곧 안정감이 되는 걸까. 한때 사랑이 아니면 곧 죽을 것처럼 절박했던 청춘의 날도 있었는데, ‘시간’이 시나브로 죽여 온 것은 우리의 ‘모습’만은 아니어서 고작 “안정감에서 서글픈 행복”을 찾으며 우리는 속이 시든다.
속이 시든다고 말하는 것은 익숙함이 안정감으로 정착할 때 사랑인 채로 안착하는 것은 좀체 보기 힘든 것 같아서다. 익숙함은 자주 ‘무사태평’으로 변질되어 못 견딜 것이 되어버리기 일쑤다. 못 견딜 것 같은 느낌이 든 순간 사람의 마음은 시든다.
“그들 두 사람 사이에 하나의 규율처럼 자리 잡은 이 자유를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자유는 로제만 이용하고 있고, 그녀에게는 자유가 고독을 의미할 뿐이 아니던가.” -12~13쪽
어느 정도 각자의 시간을 허용하는 ‘자유’로운 그들의 관계에 지쳐가던 폴의 앞에 스물다섯의 아름다운 청년 시몽이 나타난다. “뭔가 알 수 없는 것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것” 같은 열네 살 연상의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청년은 거침없다. 폴이라는 사람에 관해 아무것도 아는 것도 없으면서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는 젊은 가슴을 상상하니 피식 웃음이 난다. 어느 인터뷰에서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던 이 소설의 작가, 20대의 프랑수아즈 사강은 시몽의 사랑도 “2년, 아니 기껏해야 3년”이면 끝날 거라 생각했겠지.
시몽은 폴에게 속달 우편으로 편지를 보냈다. ‘오늘 6시에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냐는 물음에 웃음 짓던 폴은 곧 그 짧은 질문을 곱씹어 보며 생각에 잠긴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86~87쪽
“이 부분을 읽으며 저는 왈칵 눈물이 났어요. 예전에 저는 즉흥적이고, 좋아하는 건 꼭 해야 하고, 갖고 싶은 게 있으면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는데, 결혼하고 나이가 들며 점점 제가 흐릿해지는 느낌이랄까, 어떤 선택을 하는 것도 이제는 바꿀 수 없다는 부담감 같은 게 있으니까 고민을 길게 해요. 뭘 하나 하려고 해도 엄청난 사고의 과정을 거쳐야 겨우 선택할 수 있고요. 그래서 좋아하고 싫어하던 것이 분명하고 즉흥적이기도 하던 예전의 제가 그립기도 해요. 그래서 시몽이 좋아요. 하하.” 요즘 지인 둘과 함께하는 독서모임에서 J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였었다.
이 소설에서 누구에게 가장 감정이입을 했었냐고 물으며 왠지 모두 ‘폴’이라고 대답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모임 멤버 세 명 중 두 명이 ‘시몽’이라고 답했다. 아마 과거의 젊었던 우리를 떠올리게 해 주는 그의 선명함 때문인 것 같다. 가족, 가정, 사회에서의 관계, 그런 관계들이 확장될수록 내 삶의 선호도, 나의 가치관, 나의 자존감, 나의 그 무엇이 타협과 체념, 양보와 버무려지며 우리는 희미해진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짧은 질문을 폴처럼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곱씹으며 왈칵 눈물이 솟는 건 아마 그 때문이 아닐까. 오랜만에 되새겨 본 내가 너무 희미해서. 그런 나이의 우리라 시몽이 좋고 시몽을 응원하게 된다. 시몽은 머뭇거리지 않고 망설이지 않고 선명하다. 그것이 오히려 폴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불안정한 세계로 느껴졌겠지만.
**뒤편의 이야기는 8월 30일(토) 업로드됩니다.
**인용글 출처: 프랑수아즈 사강,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민음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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