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누군가에게는 맞는 구두라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발을 조이는 구두이다. 누구에게나 딱 맞는 인생의 비결은 없다. 우리 각자가 짊어진 인생 계획은 다른 어떤 계획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융
‘인생에서 내가 계획해서 이뤄진 일이 있었나?’ 가끔 생각해 본다. 하나, 하나 따져보다 보면 결국 집념에 불타올라 본 적이 없다는 후회로 귀결된다.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사랑, 미리 접었던 꿈, 도중에 놓아 버린 우정, 치열하지 못했던 시간…… 마음을 쏟아붓는 일을 도중에 멈춘 기억이 가득이다. 사랑, 열정, 욕망 같은 감정과 본능에 충실히 따른 것도 아니고 논리와 합리성, 지성만을 따져 냉철히 움직인 것도 아니다.
여기 롤링스 부부는 그나마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력을 발휘해 매끄럽고 흠잡을 데 없이 균형 잡힌 삶을 꾸린 듯하다. 하지만 인생이 그것만으로 굴러갈 수도 없나 보다.
“이것은 지성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롤링스 부부의 결혼 생활은 지성에 발목을 붙잡혔다.” -277쪽
롤링스 부부, 수전과 매슈는 정원이 딸린 주택에서 네 아이와 사는 행복한 부부다. 함께 바라던 것, 계획한 것을 모두 손에 쥐었다. 단지 너무 계획적이고 모든 것이 예상한 그대로 굴러간 탓에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단조로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런 생활에 평화롭다는 표현이 아닌 단조롭다는 표현이 나오는 이유는 그들이 실용적인 지혜를 발휘해 유지하는 가족, 집, 정원을 위한 모든 노력이 “모두 이것을 위해서”라고 할 만한 단 하나의 원천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아이, 일, 심지어 사랑까지도 그 단 하나의 이유라고 할 만큼 강렬하고 중요하지는 못했던 듯하다.
그렇다면 서로를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일까? 음, 그나마 이 마음이 ‘이것’에 가깝기는 했다. 사랑조차 삶의 중심이 아니라면, 무엇이 중심이 될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의 훌륭한 인생은 분명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중략) 그러니 사랑이 바로 삶의 중심이자 원천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280~281쪽
하지만 두 사람은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았고 서로를, 혹은 자신을 탓하지 않고 “현명하게” 지성을 동원해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계속 삶을 꾸렸다.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폭풍과 모래 구덩이”까지 잘 알고 있는 현명한 그들이라 건조하고 단조롭게 느껴지는 삶 따위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쯤 되니 이 소설의 첫 문장이 다시 떠오른다.
“지성의 실패” 이들 부부의 지성은 어디서 난관을 맞을까. 비이성적인 사랑, 열망, 욕망 같은 감정적 요소는 지성의 힘으로 극복하고 이성적으로 사고해 완벽한 가정, 관계, 삶을 설계하고 한 치도 어긋남 없이 진행(?)시켜 온 이 부부에게 말이다.
지적인 결혼생활의 뚜렷한 특징인 건조하고 통제된 동경에 대해서도 대체로 준비가 되어 있다. -283쪽
심지어 이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생각조차 진부하다고 생각하며 창피해한다. 이런 부부에게 균열이 생긴 것은 매슈가 파티에서 만난 아가씨와 자고 왔다고 고백한 일 때문이다. 하지만 이마저 이 사건으로 그들의 삶에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다. 당연히 수전은 매슈를 용서했고 이해했다. 파티에서 만난 아가씨가 그들의 인생에 중요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는 건 “웃기지도 않을” 일이었다.
이들 부부의 일이 차라리 고함과 분노와 눈물로 얼룩졌다면 이 이야기는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었겠다. 하지만 그 일은 두 사람 모두 “쉽게 짜증을 내게” 된 이상의 일은 가져오지 않았다. 오다가다 만난 여자들이 그들의 이상적인 결혼 생활을 건드릴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수전은 왜 인생이 사막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가? 왜 중요한 것은 하나도 없고, 아이들도 자신의 것이 아닌 듯한 기분을 느끼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지성은 계속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286쪽
수전에게 ‘지성’은 개인의 감정과 욕망을 억누르고 이상적인 결혼이나 합리적 삶을 만들어내려는 사회적, 도덕적 규범의 언어이기도 한 것 같다. 이들 부부가 이성적으로 사고하며 설계한 ‘완벽한 관계’는 결국 감정과 본능이 사라진 공허한 계약 관계와 같다. 지성으로만 자신과 삶을 통제하려한 시도가 실패하면 어떤 이야기로 이어질까.
함께 공유할 것이 없고, 앞으로 무엇을 공유할 것인지 계획할 것이 없는 관계는 ‘아무’ 관계가 아니다. 내 옆의 사람을 보며 “이 사람과 내가 공유하는 것이 무엇일까?” 문득 의문이 들 때 그 사람의 얼굴은 그 누구보다 낯선 얼굴이 된다. 그렇게 시작된 균열이 수전의 마음속에서 멈추지 않았나 보다. 막내인 쌍둥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수전은 “일시정지 상태로 차가운 창고에 들어가” 있던 상태에서 깨어나 자신만의 시간을 갖고 다시 자신만의 본질을 꽃피울 계획이었다. 그 계획은 아마 폐기될 것 같다.
두 사람의 결혼생활 중에 처음으로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 바로 이때였다. (중략) 다음 날 수전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고 돌아와서, 크고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뭔가가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289쪽
수전은 이제 “다시 나 자신이 되는 법”을 배워야 했고, 새로운 장소와 새로운 상황이 필요했으나 생활 안에서 자신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아마도 또 하나의 자신과 만난 것 같다. 이성으로 통제되던 자신과 정반대인, 감정으로 가득 찬 자신 말이다.
수전은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는 감정, 그녀 스스로 경멸하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감정들이 너무나 강렬해서 떨쳐버릴 수 없었다. -296쪽
그녀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했다. 수전은 기차를 타고 다른 마을로 가 열심히 찾아 헤맨 끝에 작고 조용한 호텔에 이른다. 그곳에서 정신적으로 침잠해 정말로 혼자가 되는 “짧은 시간 동안의 황홀함”을 맛본다.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매슈는 이미 수전을 ‘비이성적’이라고 진단을 내렸고, 그런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 파출부 외에 입주 가정부까지 구하고 매슈에게 매주 5파운드를 받아 집을 나선다. 그녀는 더 이상 이상적인 결혼이나 합리적인 삶 같은 것들과는 먼 통제불가능한 존재다.
수전은 이번엔 “디스트릭트 선 열차를 타고 사우스 켄싱턴까지 가서 서클 선으로 갈아타 패딩턴에서 내렸다.” 그리고 일주일에 세 번, 20실링을 건네고 ‘프레드 호텔’ 19호실로 들어간다. 그 방에서 수전은 익명의 존재가 되어 자유를 만끽했다.
낮 12시였다. 수전은 자유였다. 그녀는 안락의자에 앉았다. 그냥 앉았다. 눈을 감고 앉아서 혼자가 되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317쪽
사는 집보다 더 그녀의 것 같았던 그 방에서 수전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익명의 존재가 되어 “곰곰이 생각에 잠기고, 방황하고, 깜깜하게 어두워져서 공허함이 피처럼 혈관을 따라 즐겁게 도는 것을 느끼며” 보냈다.
고독의 침례식(La baptême de la solitude)이라는 말이 있다. 프랑스에서 쓰이는 표현이다. 침례는 세례를 받는 사람의 온몸을 물속에 푹 담가 그 몸의 죄를 사하고 다시 태어남을 상징하는 기독교의 의식이다. 대부분의 삶을 모로코에서 보냈던 미국 시인 폴 볼스는 1953년, 한 잡지에 「고독의 침례식」이라는 제목으로 한 편의 에세이를 기고했다. 그는 그 글에서 우리가 사막에 가야 하는 이유를 말하며 ‘침묵’을 이야기했다.
“단단한 바위처럼 꿈쩍도 없이 정지한 곳 (…) 경이롭고 절대적인 침묵이 지배하는” 사막은 한 번을 방문하든 열 번을 방문하든 가장 주목하게 되는 것이 ‘침묵’이며, 그 침묵으로 가득 찬 극한의 장소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이 머물고 있던 요새나 마을 성벽 안으로 되돌아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거기 그대로 서서 매우 특별한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흠뻑 그 침묵과 고독에 적셔지는 ‘고독의 침례식’을 치른다. 고독의 침례식은 그 사막이라는 장소 앞에서 이전의 기억은 희미해지고 온전히 자신을 마주하는 마음 상태가 되어 “기이하고 전혀 즐겁지 않은 쓰라린 재통합 과정”이 자신의 안에서 일어나도록 하는 의식이다.
수전이 그 19호실로 향한 것은 어쩌면 그 침례의 장소로 향하는 순례 의식과 닮은 것 같다. 수전에게 19호실은 자신이 재통합될 사막이었을까. 그곳은 세상과 단절된, 오직 자신과의 관계만이 존재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남편의 논리적인 대화, 사회의 요구에서 멀리 떨어진 그 고요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오랫동안 타인의 언어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깨달았을 것이고 그 침묵 속 깨달음을 거치는 과정이 바로 그녀의 ‘침례식’이었을 것이다. 볼스가 사막의 바람 속에서 신의 침묵을 들었다면, 수전은 19호실의 침묵 속에서 자기 존재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남편이 여기서 그녀를 찾아냈다. (세상이 그녀를 찾아냈다.) -324쪽
19호실에서 수전은 더 이상 아내도, 어머니도, 사회적 주체도 아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 방, ‘지성’의 언어가 닿을 수 없는 그 장소에서 그녀는 익명의 존재가 되어 그녀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며 사회적 질서와 도덕, 이성의 무게를 벗고 자신을 새로이 발견할 가능성을 찾기 위해 고요히 치열했을 것이다. 그 자궁과 같은 방을 남편이(세상이) 찾아냈으니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새로이 태어날 곳은 이 지상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누워서 가스가 작게 쉭쉭거리며 방 안으로, 그녀의 허파 안으로, 뇌 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꽤나 만족스러웠다. 그녀는 어두운 강물로 떠갔다. -335쪽
사막의 절대적 침묵과 마주해 고독에 흠뻑 젖고 난 사람은 그곳에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고독에 흠뻑 잠겼다 나오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전혀 다른 영혼으로 거듭날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잃은 수전이 스스로 19호실, 그 사막으로 가 극한의 막대한 고독과 마주하고, 그 고독 속에서 맹렬히 자신과 마주할 수 있었던 시간이 좀 더 주어졌더라면 그녀가 결국 “어두운 강물로” 떠가지는 않았을 거라고 문득 생각한다.
지성이 무너지고, 관계가 무너지고, 언어가 사라진 자리에서야 비로소 인간은 진짜 자신의 얼굴을 마주한다. 수전에게 그 순수한 자기 귀환 의식의 시간이 조금만 더 보장되었더라면 19호실은 죽음의 사막이 아니라 침묵의 세례를 거친, “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기 자신에게 돌아가는 일이 이토록 무참하다.
**인용글 출처: 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문예출판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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