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 선배에게 ①
k 선배에게,
누구보다 분주한 봄을 맞고 계시지요?
며칠 전에는 봄비가 흠뻑 내렸습니다. 선배를 알고는 계절이 바뀔 때 궁금해지는 것이 달라졌습니다. 내리는 봄비를 보며 이때쯤 오는 비는 선배에게 도움이 되려나, 이 정도면 충분한 비인가, 너무 많은가 혹은 부족한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 생각을 천연덕스레 하고 있는 제 모습에 혼자 웃습니다. 뭐 당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별생각이다, 싶어서요. 어쨌건 세상은 완연한 봄빛 아니 초여름의 기운이 시작되고 있네요.
지난밤에는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저는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무심한 듯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소박한 음식을 먹고 풍경 좋은 어느 정자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먹거리를 들고 정자로 자리를 옮기는 데, 오르는 계단이며 흙담 위 작은 기왓장이 너무 아름다워 속으로 감탄도 했습니다. 요란하지 않고 차분히 지는 노을을 지켜보며 날이 저물고 있구나, 생각했습니다.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쓸어갈 때 그가 물었어요. “이제 어디 가지?”
그 순간 잠에서 깼는데, 행복했습니다. 행복이… 그득 차올라 잠시 그 달콤쌉쌀한 감정을 곱씹으며 즐겼습니다. 시간을 함께 나누고 또 이어지는 앞날의 시간에도 함께 할 것을 묻는 그 물음이 너무 좋아서요. 또 현실에선 앞날의 시간은커녕 지금의 시간도 함께할 ‘그’가 없는 것이 쌉싸래해서요. 꿈같은 꿈이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던 건 그 가슴 그득했던 느낌이 잠에서 깨고도 한동안 고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았던 지난밤의 꿈을 꾸고 선배가 생각났던 건 언젠가 선배와 나눈 이야기가 떠올라서입니다. 지난날의 사랑에 관한 서로의 개인사를 나누다 선배가 말씀하셨죠. “네 사랑을 방해했던 건 ‘의심’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저도 동감합니다. 지난 사랑을 후회할 때 가장 안타까운 것은 한 번도 솔직하게 나를 드러내고 휩쓸리지 못해서입니다. 우선은 내 마음을 의심했고, 내 마음을 인정한 후에는 저 사람은 다른 마음일 거라고 의심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믿지 않으며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기만 했습니다. 거리가 더 이상 좁혀지지 않으면 생각했지요. ‘거 봐라, 딱 이정도지.’ 그렇게 추억도 무엇도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버린 지난날은 모두 부실한 제 마음에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지난밤의 꿈이 좋았던 건 모든 것이 물 흐르는 듯 자연스럽고 평온해서입니다. 설레는 마음도, 사랑한다는 마음도, 아름다운 풍경도, 차분한 노을도, 평범한 물음도, 이미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겨지는 꿈속 세상이 준 충만함에 행복했습니다.
상대가 이성이든, 친구이든, 부모 자식이든, 세상이든… 사랑은 수시로 목마릅니다. 그 갈증은 결국 자신에 대한 갈증과 허기짐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면에서 퍼져 나오는 힘찬 빛’ 그런 충만함을 저도 한때 간절히 갈망했습니다. ‘한때’라고 쓰는 건 지금은 해결됐다는 의미는 아니고 그때보다는 좀 엷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차마 가능할까 싶어서요.
선배.
지난밤의 충만했던 꿈을 꾸고 나니 속을 가득 채우는 그것, 사랑은 힘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면의 힘이 전제해야 이룩될 수 있는 사랑. 그래서 굳건히 믿을 수 있는 사랑은 결국 자신이 굳건해져야 비로소 받을 수 있는 보상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의심으로 부실한 그런 사람 말고 충만함에서 오는 여유로움을 갖고 싶어요. 그러니 결국 사랑은 내 안에서 찾기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고 나면 다른 것들도 하나씩 눈에 담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