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우정, 존중, 나이듦… 책에서 만난 인생의 단상

제1화. 프롤로그

by 김편

‘책’ 만드는 일이 생업으로 연루되면, 남의 글이든 내 글이든 그 글이 책이라는 물성으로 독자에게 전해질 것을 감안할 수밖에 없고, 그러면 궁리할 것이 자꾸 더해진다. 궁리할 것이 많아지면 골치가 아파지는 법. 그 궁리가 책이 팔릴 궁리로까지 생각이 이어지면 어느새 책은 그 순간만큼은 골칫덩이가 된다. 책이 좋아서, 하는 일도 좋았지만 바로 그 ‘일’이란 것 때문에 언젠가부터 책을 즐거이, 여유롭게 누리는 시간이 현저히 준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어쩌다 일과 상관없이 여유롭게 책장을 펼치는 어떤 날은 평범하지만 ‘흔치 않은’ 날이 되었다. 그렇더라도 아직은 여전히 가장 즐기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렇게 여러 어떤 날 함께한 책에서 나는 이전에 정의했던 사랑을 재정의하기도 하고, 오랜 우정이나 타인의 고통을 짐작해 보기도 하고, 혹은 아픈 몸과 나이 듦을 자연스레 수긍하는 법을 배우기도 한다.


읽고 쓰는 삶, 그 안의 책


‘쓰기’가 나와 내 생각을 한 발짝 물러서 볼 수 있게 한다면, ‘읽기’는 다른 사람의 세상, 다른 사람의 삶과 생각 속으로 풍덩 뛰어들게 해 준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다른 세상을 살아 볼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책 읽기를 말하곤 한다. 나도 열에 열 번 그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다. 게으르고 진취적이지 못한 나의 천성이 곧잘 선택하고 마는 ‘여러모로 가만한 나’를 그나마 가장 편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구제해 주는 것이 책 읽기여서 그렇다. 책을 통해 다른 세상, 다른 사람, 다른 생각을 접하는 대리 체험의 경험은 확실히 가장 손쉽게 자신의 세상과 생각을 확장하는 방법이다.


동네서점에서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이들과 환담을 나누다 문득 ‘당신에게 책은 뭐냐’는 질문이 나왔다. 누군가는 자신에게 책은 연결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위로라고, 동굴이라고, 균열이라고, 저마다 자신만의 의미로 책을 정의했다. 나에게 책은 향유하는 것이다. 나는 책을 통해 뜻밖의 세상을 향유하고 새롭게 알게 되는 사실과 앎을 향유한다. 개중 특별히 더 향유하는 것은 무수한 삶과 마딘 감정이다. 그렇게 즐기고 누린 향유하는 읽기 중에 쉽게 닳거나 없어지지 않았던 마딘 감정이 휘발되지 않도록 쓰기를 겸했다.


이 책과 함께하는 이 순간의 나


요즘 들어 새삼 후회하는 일이 하나 있다. 매번은 아니어도 적어도 십 년 정도 주기를 두고 같은 책으로 독서 노트를 써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우연한 생각에서 시작된 후회다. 몇 권 책을 정해두고 20대, 30대에도 40대, 50대에도 읽어서 독서 노트를 남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한 권의 책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우연한 계기로 근 30년 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읽다 보니 전혀 기억에도 없던 장면이 새삼스레 다가왔고 예전과는 다른 인물에 감정이 이입되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같은 책을 내가 서른 살에 읽었다면, 마흔 살에 읽었다면 어떤 장면에 가장 마음이 닿았을까, 각 인생 단계의 내 마음이 궁금했다. 하긴 굳이 인생의 단계까지 엮을 것 없이 지금 당장이라도 한 권의 책을 재독, 삼독 하더라도 읽을 때마다 밑줄 긋게 되는 문장이 달라지곤 한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니 그렇다. 인생의 이벤트가 되풀이될 리는 없으니 한 권의 책과 함께한 그 순간의 자신을 남긴다면 ‘나’라는 사람의 변화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늦지 않은 청춘들에게 “당신이라도…” 하는 맘으로 기록의 경험을 권하고 싶다.


책 속 한 구절에서 이어진 인생의 단상


지나가 버린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이미 나는 중년의 나이다. 생각해 보면 중년이라는 인생의 단계는 참, 어중간한 인생의 시기이다. 청년의 젊음이나 활기와는 멀어지고 있고 노년의 안정감이나 노쇠에는 아직 가닿지 않은 상태이다. 사는 일마저 조금 알 것도 같고 당최 모를 것도 같은 긴가민가한 것투성이다. 이 정도의 나이에도 인생은 여전히 모호해 혼미하고, 이 정도의 나이에도 혼란해야 하나 싶어 시시때때로 나는 열없다. 이런 어중간한 인생의 시기에 내 마음이 날아가 꽂혔던 책 속 한 구절과 이어진 세상, 삶, 사람, 생각의 한 지점들을 펼쳐놓아 본다. 당신의 ‘지금’ 마음은 어느 지점, 어떤 인물, 무슨 일에 가닿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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