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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백 Jan 04. 2021

1-1) 33살 그리고 대장암 3기

'쉼'



고불고불 올레길에 

작은 의자 하나씩 놓여있다. 


시커먼 콘크리트 바닥, 

두 사람 포롯이 앉을 벤치 하나, 

구멍 송송 뚫린 길 가 바위 두엇, 

시원한 바다가 보이는 부둣가, 

소금 빛 가득했을 염전 터


내 가는 길에 작은 쉼터 하나씩 놓여있다. 


그곳에 내 사랑하는 이도 함께면 좋으련만

내 사랑하는 이의 그곳에 나 함께면 좋으련만,



'쉼'




 나는 어릴 적부터 장염과 비슷한 증세가 잦았다. 우유를 탄 커피를 좋아하는데 마신 뒤엔 반드시 탈이 났다. 커피 뿐만 아니라 먹는 것 또한 무척이나 좋아했고 자주 많이 먹으며 화장실을 오갔다. 처음에는 너무 자주 화장실을 가는 것이 어디가 안 좋은가 싶어 병원도 가보았지만, 별다른 이상이 없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서른 두 해의 생을 살아내다 변에 피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엔 스트레스가 많은 날들이라 그런가보다 하다가 지속되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 해 건강검진에 대장내시경 항목을 추가했다. 


 대장 내시경 검사를 담당했던 젊은 의사는 내게 5cm 종양이 발견되었고 조직 검사를 위해 약간 떼어냈고, 결과를 기다려보겠지만 크기가 너무 크고 위치나 모든 것이 대장암일 것 같다는 소견을 들려주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접하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황당한 소식은 들어야 하는 이보다 전해야 하는 사람을 더 난감하게 만든다. 나보다 여의사가 더 주춤거리며 나이도 아직 어리시고 여자분이셔서 대장 내시경을 들어가기 전에 의아해했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조금 더 풀어냈다. 나는 당황한 그녀를 보면서 차분히 내 표정을 정돈했고, 남은 그녀의 위로를 듣다 검사실을 나왔다. 연계될 병원을 고르라는 접수처 직원의 말에 내 고향 ‘아산’ 두 글자가 가운데 콕 박혀 있는 병원을 짚어내고 센터를 나왔다. 


 비록 암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배는 허기졌다. 병원을 나서자 마자 따뜻한 소고기 국밥 한 그릇이 간절해졌다. 집 앞에 오래된 국밥집의 시원 칼칼한 국밥 한 그릇이 혼자 무거운 소식을 접한 나를 조금쯤 달래줄 것 같았다. 그렇게 찾은 국밥집에서 밥 한 두 수저 떴을 뿐이었는데 그저 조금 찌릿찌릿하던 아랫배가 ‘콕-콕-’에서 ‘쿡-쿡-’으로 급발진을 해대기 시작했다. 식당 아주머니께 카드 대리 결제를 부탁 드렸고, 걸어서 오 분도 채 안 될 거리를 택시 기사님께 양해를 구하며 얻어 탔고, 거진 기어가다시피 3층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집 문을 열자 마자 모든 힘을 다했다는 듯 나는 신발장 앞에 고꾸라졌다. 몇 통의 전화가 울렸고, 받지 못하다가 그 중 아버지의 전화를 용캐 받았고 나는 구급차를 불러 달라는 말과 함께 다시 혼절하다시피 기운을 잃어갔다. 소방대원들의 여러 통의 전화에 다시 정신을 차렸고 저 멀리 제주도에 있는 엄마가 구름 위에 눈물을 흩뿌리며 내게로 날아오는 동안 나는 방 한 칸, 거실 조금, 낡고 병든 화장실 각각에 똥물과 핏물들을 흩뿌려 놓고 응급실로 실려가 엄마를 기다렸다. 


 다행스럽게도 그렇게 난 5cm 암덩이와 인사한지 딱 15시간 만에 바로 이별을 고할 수 있었다. 


 이곳 저곳에 똥이 터져 넘친 위장 청소에 몇 시간의 대수술이 필요했고, 다행히도 휴가를 반납한 의사 선생님 덕분에 목숨을 부지해 수술실을 나올 수 있었다. 그 후로도 강한 진통제를 달고 며칠 밤낮 꼬박 잠에 빠졌다. 


잠에서 깨어나면 엄마가 있었고, 잠이 들 때도 엄마가 있었다. 


 엄마 곁을 떠나온 지 10년 만에 가장 오래 함께 딱 붙어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엄마의 푸근한 몸이 작은 간이침대에 겨우 몸을 뉘이고 있었음에도 염치도 없이 나는 세상 누구보다 행복했다.


 내 동료들도 빼놓을 수 없다. 이미 퇴사한 동료들까지 내 생각보다 많은 동료들이 나를 걱정해주었고, 고맙게도 내가 병원에서 심심하지 않도록 책이며, 먹을 것이며, 응원하는 마음이며 아끼지 않고 가져다주었다. 생각보다 멀쩡한 나를 보면서 농담도 건네며 유쾌하게 오간 동료들 덕분에 그 시간이 더 행복했던 것 같다. 


암이랬어도, 그 날 수술을 못 받았으면 죽을 수도 있었대도, 나는 담배를 폈다. 


 독한 진통제를 달고 살던 와중에도 나는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딸내미 카드를 손에 쥐고 큰 병원의 미용실이며, 식당이며, 여기저기 신이 난 척 붐비게 다니는 엄마는 딸내미 카드 쓰는 재미가 얼마나 좋은지 시시콜콜 결제할 때마다 보고를 했다. 내가 만약 '엄카'를 쓰게 된다면 그 재미와 같을까. 참 담대한 엄마를 보면서 저 속에 들어있을 연탄재 같은 착잡함이 느껴지면 담배를 폈고, 그간 나의 친구와 같았던 담배와 바로 작별하지 않아도 되는 것에 감사했다. 

어쩌면 엄마가 그런 나를 이해해주어서 더 행복했는지도 모르겠다. 보통의 엄마들이 암에 걸려 담배피는 딸을 이해하고 기다려줄 수 있는 인내를 가질 수 있을까.


넌 아직 진짜 죽음을 느끼지 못한 거야
 

담배를 피우는 나를 보며 어떤 분이 말씀하셨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내가 죽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수술 전 시간을 회상하는 것은 오히려 신이 났다. 살아남았기 때문에. 또 한 켠으로는 내 서른 두엇의 생은 내겐 너무 벅차고 괴로워서, 대장암이라도 걸려야 쉴 수 있었던 그 시간이 소중했었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조차 할 수 없는 빙판길 위의 나날이었고, 돌아보니 그 뒤에는 더한 고통과 이별이 찾아왔던 시간들이었지만, 대장암은 그런 내 생에게 잠깐의 쉼터를 마련해주었다. 


목숨을 담보로 보험사에서 몇 푼의 돈도 내 손에 쥐어 줬고, 쉬고 싶었던 회사 일을 잠시 멈출 수 있었으며, 오롯이 엄마와 아빠, 친구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행운도 있었다. 

사랑하는 소중한 이들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찬란한 일인지 

얼마나 가슴 미어지도록 따뜻한 일인지 사무친 날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암 소식에 단 한번도 울지 않았다. 








각자의 고됨과 굴곡이 저마다 다르겠지만, 

내게 찾아온 불행은 내가 재단한 만큼 딱 그만큼만 내게 고통을 준다. 

난 나의 대장암에 큰 재단을 하지 않았다. 


엎친데 덮쳤다거나, 악재가 겹쳤다거나, 뭐가 꼈다거나 등의 표현을 나는 내 서른셋에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심심한 위로들이 내 주변을 감쌌고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고마웠다. 몸의 좌절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좌절이었다. 침잠하는 내 생을 그대로 바라보면서도 다시 일으킬 의지가 없을 때, 희망이 바스러질 때 난 그 마음들이 더 필요 했었던 것 같다. 그 마음을 받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한다는 것, 이처럼 나의 불행을 내보이고 나누며 그들에게 청해야 한다는 것도 대장암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난,


내가 누군가의 그런 시기를 알아챌 수 있는 현안을 갖고 있다면 하고 바랬다. 그리고 그 시기에 알맞게 그를 찾아갈 수 있기를 하고 바랬다.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가 그런 이가 될 수 있기를 바랐다. 


보너스처럼 주어진 이 남은 생에 작은 바람이 하나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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