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저는 AI 영어 교육 앱 '스픽'으로 공부하는 걸 좋아해요. 스픽 덕분에 출근할 때 지하철에서 수업 하나, 퇴근하고 침대에 누워 수업 하나를 듣는 습관을 만들었고, 확실히 그 어느 때보다 영어를 자주 입밖으로 꺼낼 수 있게 되었어요.
어제는 퇴근 후, 일반 수업이 아닌 AI 선생님과 자유 주제로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런데 수업을 마친 뒤 대화를 떠올려보니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는 거예요. 그도 그럴것이 저는 AI가 제안해주는 문장을 따라 읽기만 했거든요. 너무 피곤하니 오늘은 영어로 말하는 데 의의를 두자고 생각하긴 했지만, AI가 제안해주는 문장을 따라 읽기만 하는 것은 대화가 아님을 느꼈습니다.
최근 '챗GPT'가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AI 열풍이 더 거세졌죠. 사람이 썼는지, AI가 썼는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완벽한 문장을 사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완성해낸다는 점에서 챗GPT의 영향력은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챗GPT의 카피라이팅 수준은 아직까지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을 만한 뻔한 수준에서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은데요. 제가 최근에 읽은 한 책의 부제를 활용해 '경제의 큰 흐름에서 기회를 잡는 매크로 투자 관련 책 제목을 10개 지어줘'라고 명령을 해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어땠을까요?
어떤가요? 저는 10개의 제목 모두 최근 베스트셀러 제목들을 이리저리 섞어놓은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실제 제가 읽은 책 제목은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인데요. 성공적인 투자를 하기 위해서는 거시적인 경제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책입니다. 세계 최대 커피콩 생산국인 브라질에 비가 내려 심각했던 가뭄이 해소되면, 브라질의 커피콩 생산량이 늘어남에 따라 커피콩 가격이 떨어지고, 그러면 스타벅스의 이윤 폭이 늘어나 주가도 오르는 점을 착안해 누구도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제목을 지은 겁니다.
제가 챗GPT에게 명령을 더 잘했다면 위 10개 제목보다는 좀 더 창의적인 제목이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브라질에 비가 내리면 스타벅스 주식을 사라>와 같은 제목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거예요. AI는 요리사가 요리 과정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기초 재료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창의적인 일보다는 효율적인 일에 더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AI가 더 발달해 창의성 측면에서도 인간을 능가할 수 있게 될지 모르겠지만, AI에게 모든 것을 다 맡겨버리고 의존한다면 과연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정보에 맥락이 더해질 때 지식이 된다. 그리고 지식에 소신이 더해지면 지혜가 된다. 역사적으로 볼 때 소신이 생기려면 홀로 성찰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지만 인터넷은 이용자에게 수천·수만·수억 명의 의견을 쏟아부으며 혼자 있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홀로 생각할 시간이 줄어들면 용기가 위축된다. 용기는 소신을 기르고 지키기 위해 꼭 필요하며 특히 새로운 길, 그래서 대체로 외로운 길을 걸을 때 중요하다. 인간은 소신과 지혜를 갖출 때만 새로운 지평을 탐색할 수 있다.
- 책 <AI 이후의 세계> 중에서
오늘은 스픽으로 영어공부를 할 때 'AI 답변 숨기기' 기능을 활성화 해보려고 합니다. 실제로 외국인과 대화를 나눌 때마다 AI가 제안해주는 문장만 따라 읽을 순 없으니까요. 처음엔 무척 답답하고 힘들겠지만, 성장하고자 하는 인간에게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 혼자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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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