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는 객관식 문제보다는 주관식 문제에 더 가깝다. 또한 '쓰는 것'과 '쓰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라 누군가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면 난감할 수밖에 없다. 종종 소셜 모임이나 평생 학습관 같은 곳에서 글쓰기 강의 요청이 오면 나는 고민에 빠진다. 공식적인 방법을 이야기할 것인가, 비공식적인 방법을 이야기할 것인가.
학창 시절, 인터넷 강의를 듣다 보면 공식적인 방법 외에 비공식적인 방법을 알려주는 선생님들이 있었다. ‘태정태세문단세'처럼 암기하기 어려운 것들은 앞글자를 따서 암기하기 쉬운 단어들로 만들어 외우도록 하거나 정 공부할 시간이 없으면 자신이 만든 요약 페이지만 보고서라도 시험을 치루라는 등 꼭 정석대로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런 방법이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정석적인 방법은 다른 곳에서도 얻을 수 있지만 비공식적인 방법은 그 선생님에게서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게 공부하면 내가 진짜로 그것을 배웠다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당장의 시험 점수에는 효과를 얻기도 했고, 장기적으로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방법이 되기도 했다.
글쓰기의 대가이자 전문가 분들이 공통적으로 알려주시는 글을 잘 쓰는 방법들이 있다. 비문으로 쓰지 않고, 눈에 보이듯 묘사하고, 구체적인 경험을 쓰고, 오탈자를 확인하는 등의 공식적인 방법들이다. 이것을 1차적으로 지키고 터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만, 오늘 내가 친한 친구에게 1시간 동안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주고 당장 조금이라도 글쓰기에 효과를 보도록 해야 한다면, 나는 나만의 비공식적인 방법을 알려줄 것이다. 공식적인 방법은 나보다 훨씬 훌륭한 전문가 분들을 통해서도 접할 수 있을 테지만, 약 4년 동안 꾸준히 에세이를 쓰며 터득한 나만의 비공식적인 방법은 공식적으로 접하기 어려운 이야기일 테니까 말이다. 친구에게 보여준다고 생각하고 나의 비공식적인 글쓰기 방법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비공식적인 방법인 만큼 글쓰기에 적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친구의 몫이고.
나는 기고를 위한 원고를 쓸 때에도, 회사에서 마케팅 문구를 쓸 때에도 브런치를 연다. 아직 브런치만큼 예쁘고 전문적인 느낌이 나는 스케치북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떤 그릇에 놓느냐에 따라 맛과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지듯이 글도 어디에 놓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글처럼 보인다. 같은 시 한 편이라 하더라도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적혀 있는 것과 시집에 인쇄되어 있는 것은 다른 느낌을 선사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글을 쓸 때에도 어디에 글을 쓰느냐에 따라 쓰는 이가 느끼는 느낌이 천차만별이다. 나의 경우 워드에 글을 쓰면 글의 전체적인 무게가 무거워지고 끝까지 쓰기가 어렵다. 왜일까? 워드를 켜면 상단에 복잡하고 어지러운 기능들이 먼저 눈에 띈다. 보통 회사에서 쓰는 툴이다 보니 형식적인 느낌도 강하게 든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회사에서 쓰는 말투나 사무적인 느낌이 글에 반영되는 것이다. 또한 워드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공간이 아니다 보니 마지막 문장까지 쓸 동력이 떨어진다.
반면 브런치에 글을 쓰면 워드에 쓸 때보다 훨씬 글의 분위기가 말랑말랑해지고 전문 작가 느낌이 든다. 불필요한 기능이 눈에 띄지 않고 오직 내가 쓰고자 하는 글에만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말랑말랑한 느낌을 극대화하기 위해 항상 제목 부분에 글과 어울리는 배경 이미지를 넣고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규격에 맞게 들어가니 깔끔하고 보기도 좋은 출발이다. 또한 브런치는 '발행' 버튼을 누르면 다른 이에게 내 글이 보이는 공간이다 보니 얼른 글을 완성해 발행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3시간이든 4시간이든 한 자리에 앉아 마지막 문장까지 글을 쓰게 하는 힘이 된다.
꼭 브런치가 아니어도 좋다. 사실 브런치는 아직 글쓰기에 불편한 지점들이 존재한다. 글을 쓰다가 틈틈이 저장을 해두지 않으면 방금 전에 실수로 삭제된 문장을 되살릴 방법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브런치에 글을 쓰는 이유는, 그러한 불편한 지점을 뛰어넘을 만큼 글쓰기에 최적화된 공간이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글쓰기 관련 앱도 다양해졌으니 각자의 스타일에 어울리는 스케치북을 찾아보시길.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나는 제목 부분에 넣을 수 있는 글의 배경 이미지이자 글이 노출되었을 때 보이는 썸네일 이미지를 먼저 배치한 다음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렇게 할 때 좋은 점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로 그냥 기분이 좋다. 나는 언스플래쉬 라는 무료 이미지 사이트에서 주로 이미지를 다운로드 하는데, 사진의 품질이 굉장히 좋다. 고급스러운 사진을 글에 배치했을 뿐인데 내 글이 마치 유명 잡지 속 콘텐츠가 된 것 같다.
두 번째로 좋은 점은 텍스트를 이미지화한다는 점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글의 골격이나 전체적인 분위기를 정하고 글을 쓰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나의 경우 아주 큰 틀(=제목)만 정하고 글을 쓴다. 따라서 글을 쓰는 나로서도 첫 문장을 쓸 때까지만 해도 내가 쓰게 될 글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어떤 분위기일지 예상할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쓸 글과 어울리는 이미지 하나를 찾아놓는 것만으로도 글의 방향과 콘셉트를 잡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수없이 많은 이미지들 중 한 장을 고를 때, 내가 쓰고자 하는 글과 어울리는 그림을 무의식적으로 찾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찾을 때 한 가지 팁은 가로 방향의 이미지, 그리고 밝은 톤을 고르면 더 좋다. 글이 바깥에 노출되었을 때 가로 방향의 이미지가 더 보기 좋으며, 어두운 톤보다는 밝은 톤이 확실히 눈에 더 잘 띈다. 개인적으로 밝은 톤의 이미지를 넣어두고 글을 쓰면 글도 더 밝은 글이 되는 것 같다.
수미상관이란 운문 문학에서 첫 번째 연이나 행을 마지막 연이나 행에 다시 반복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글쓰기 방법 중 하나의 방법일 뿐이지, 항상 이렇게 쓴다고 해서 좋은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미상관으로 글을 쓰면 '잘 써 보이는 효과'가 있을뿐더러, 좋은 글을 쓰는 좋은 연습 방법이 된다.
최근 사람들의 기억력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고 한다. 숏폼 콘텐츠 소비량이 늘어나면서 접하게 되는 정보의 수는 많지만 정보를 받아들일 시간과 깊이는 짧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비교적 긴 호흡의 에세이를 읽을 때에도, 몇 문단을 읽다 보면 앞의 문단에서 나온 내용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다고 단순히 첫 문단에서 썼던 내용을 마지막 문단에서 반복적으로 씀으로써 무조건 강조를 하기보다는, 나는 첫 문단에서 썼던 내용이 마지막 문단에서 이어지며 여운을 남기게 하려고 노력한다.
내가 쓴 글 중 '완벽한 타인이 되는 방법'이라는 글이 있다. 영화 <완벽한 타인>을 보고 느낀 점을 쓴 글인데, 이 글의 첫 문단은 나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처음 - 나의 개인적인 에피소드]
휴대폰이 없던 15년 전, 친구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다. 편지 봉투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뜯어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경고 글귀가 적혀 있었다. 혹여 나보다 먼저 우편함을 확인한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자신이 쓴 편지를 확인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던 모양이다. 누군가 장난으로 편지를 뜯어볼 생각을 했다가도 경고 글귀를 보았다면 잠시나마 망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소 허술해 보여도 당시 발신자가 설정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잠금 설정이었으니까. - 유수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중에서
그다음, 영화 <완벽한 타인>에 대한 간략한 줄거리와 나의 생각과 의견을 넣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한 커플 모임에서 서로의 문자나 전화 내역을 공유하는 게임을 하다가 상상치 못한 개인의 사생활이 드러나면서 관계가 파국에 치닫는 내용인데, 줄거리와 함께 나의 생각을 아래와 같이 글의 중간 부분에 적었다.
[중간 - 영화 줄거리 및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
영화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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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연인, 직장 동료 등 모든 관계에서 우리는 서로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을 때 더 진실되고 깊이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굳이 휴대폰을 들춰보지 않아도 상대방의 입에서 듣는 정보를 신뢰할 수 있을 때, 서로에게 더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있다. 또 상대방이 내 정보를 물었을 때 듣기 좋게 꾸며 말하지 않아도 될 때, 서로에게 더 ‘완벽한 타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글의 마무리는 어떻게 지었을까? 다시 나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로 돌아와 에피소드의 결말을 보여주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나의 '완벽한 타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결론을 내린다.
[끝 - 나의 개인적인 에피소드의 결말]
15년 전, 내가 식탁 위에서 편지를 발견했을 때, 편지는 친구가 꽁꽁 여민 그대로 놓여 있었다. 중학생의 편지를 뜯어봐서 뭐하겠냐만 나보다 먼저 편지를 뜯어보지 않은 나의 완벽한 타인들에게 감사한다.
에세이를 쓸 때, 영화나 책에서 본 내용과 개인적인 에피소드를 연결하는 경우가 많다. 두 가지 이야기를 어떻게 배치할지 고민이 될 때, 처음을 염두에 두고 마무리를 하는 습관을 들이면 방향을 잃지 않고 보다 완성도 높은 글을 쓰게 된다. 또한 독자로 하여금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이직한 회사에서 뉴스레터를 쓰는 업무를 맡게 되었고 고객 대상으로 뉴스레터를 발송했다. 그런데 전 직장 동료가 '이 뉴스레터 수진님이 보낸 거예요?'라며 연락이 왔다. 뉴스레터에 내 이름이 들어간 것도 아닌데 어떻게 알았냐고 물으니 나의 문체가 느껴졌다고 했다. 전 직장 동료는 회사에서 같이 일하면서 내 글을 자주 읽은 데다 내 브런치 글도 거의 다 읽었으니 내 문체가 익숙해진 것이다. 지금이야 이렇게 나만의 문체가 생겼지만 막 에세이를 시작했을 무렵에는 나만의 문체도 없었고 어떤 주제로 글을 써야 할지도 몰랐다. 그래서 무작정 눈에 보이는 책 한 권을 뽑아 들고 책을 읽었다. 딱 1page만 읽어도 그 작가만의 리듬이 느껴지는데, 그 리듬을 그대로 가져와 내 글에 적용하는 연습을 했다. 리듬이 느껴지지 않으면 최소한 눈에 띄는 단어나 표현 방식 하나라도 가져와서 내 글에 적절히 버무리는 연습을 했다.
뭉클. 눈물이 솟자 햇빛이 번져나갔다. 글썽거리던 풍경들이 선명해졌을 때, 그곳에는 장미가 피어 있었다. 그리고 로즈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어른이 되었다. -고수리,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 중에서
술은 원수지만 인생에 시트콤이라는 하나의 장르를 만들곤 한다. 다큐멘터리에선 찾아볼 수 없는 미친 상황, 미친 행동이 시트콤에선 가능하지 않던가. 그것에 후회하고 또 후회하면서도 오늘 밤 우리가 술을 찾는 이유겠지. -유수진,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중에서
고수리 작가님과 내 글을 비교해보면, 이름을 지우더라도 확실히 다른 사람이 썼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작가의 책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작가마다 살아온 경험, 자주 쓰는 말투, 단어, 표현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여러 작가의 책을 읽다가 유독 '이런 것은 한번 따라 해보고 싶다'는 것이 보이면, 그 느낌을 모방해 글을 써보자. 써보다가 영 안 맞다 싶으면 또 다른 작가의 느낌을 모방한다. 그렇게 여러 차례 모방을 하다 보면 어떤 것과 어떤 것이 섞였는지도 모르게 내게 꼭 맞는 나만의 문체가 만들어진다. 한 사람의 것을 똑같이 따라 베껴 쓰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글쓰기를 인풋과 아웃풋이 정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글을 쓰려면 그만큼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접해야 한다는 뜻이다. 다양한 레퍼런스를 찾고 반복적으로 연습해야 내가 어떤 문체에 맞는 사람인지 알게 된다. 나의 문체는 아마도 내가 읽은 약 700권의 책을 쓴 작가님들의 문체가 얽히고설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글을 잘 쓰는 방법은 기술적인 문제로도 접근할 수 있지만, 태도적인 문제로도 접근할 수 있다. 보통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말에는 '태도'보다는 '기술'을 터득하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에세이에 있어서는 태도가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솔직하게 쓰고, 꾸준히 쓰고,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남들에게 많이 보여주고, 주변을 유심히 관찰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항상 기록해두는 등의 태도 같은 것 말이다.
좋은 글쓰기 태도에 집중해서 글을 쓰다 보면 자연스럽게 기술적으로도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글쓰기 태도는 어떻게 갖는가. 역시 글쓰기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