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0년 동안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어왔다. 문득 그 권수가 궁금해 도서관 홈페이지에서 대출 이력을 찾아보니 670건(권)이라고 했다. 이 숫자를 10년으로 나누고, 12개월로 나누니 한 달에 약 5~6권을 읽었다는 계산이 나왔다. 직접 사서 읽은 책과 누군가 사줘서 읽은 책까지 합하면 더 많을 것이다.
솔직히 670권을 다 읽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반 정도 읽다 재미없어서 그만둔 책도 많고, 대충 느낌만 훑어보고 반납한 책도 많다. 하지만 10년 동안 670권의 책을 읽거나 보면서 나는 확실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도 있고, 눈에 보이진 않지만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변화도 있다.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앉은 자리에서 얇은 책 한 권 정도는 가볍게 독파하는 모습이랄까. 670권의 책을 읽기 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모습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변화라면 셀 수도,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나의 인생 형태를 180도 바꿀 만큼 큰 변화를 위주로 정리해보고자 한다.
돈은 없고 시간은 넘치던 백수 시절, 시간을 때우려고 만든 것이 도서 대여 카드였다. 처음엔 내가 무슨 책을 좋아하는지도 몰라서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한 작가의 소설부터 빌려 보았지만, 소설은 오래 읽기가 힘들었다. 대신 내가 가장 흠뻑 빠진 분야는 이름 모를 작가들의 '여행 에세이'였다. 나는 혼자 국내 여행도 못 가는데, 사람들은 어떻게 혼자 척척 해외에 여행을 가는 건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행지에서 만난 도둑에게 전재산을 털린 이야기나 사고를 당할 뻔했지만 위기를 대처해낸 이야기를 보면서 세상에는 참 강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여행을 통해 삶의 방향을 잡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가슴이 뛰었다.
20대 중반, 책 한 권을 들고 혼자 템플스테이를 떠났던 것도 책에서 얻은 용기 덕분이었다. 책을 읽자마자 여행을 떠날 용기를 얻은 것은 아니고, 내 소심한 성격에 몇 개월 가까이 끙끙 앓았을 것이다. 그러다 '도대체 왜 나는 못하는 건데!'하는 짜증이 밀려와 스스로를 떠밀듯이 여행을 떠났다.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러 가던 그 길을 나는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한다. 백수에게는 낯설게만 느껴졌던 시원한 아침 새벽 공기.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내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일상을 보게 되었고, 그들을 보며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비장한 마음이 생겼다.
그렇게나 겁 먹었던 혼자 떠나는 여행은 생각보다 식은 죽 먹기였다. 템플스테이가 지금처럼 유명할 때도 아니었고, 추운 겨울이었던지라 산사에는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는데, 나는 그것이 엄청난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오롯이 혼자만의 여행을 즐길 수 있었고, 나도 에세이의 주인공들처럼 멋진 여행 에피소드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었으니까 말이다.
책은 자기만의 한 가지를 가진 사람들이 쓴다. 나는 그들이 가진 한 가지를 단순히 남의 것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따라해보고 싶은 것은 따라해보면서 새로운 경험을 해보는 사람이 되었다. 670권 중 10%만 따라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생겨나지 않았을까. 그 중 최고의 변화는 나도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고.
책을 대여해서 읽는 것의 장점은 '가장 읽고 싶은 책'이 아닌 책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백수 혹은 사회 초년생이었던 내가 1만 원에서 2만 원 사이의 책을 구입해서 읽는 것은 경제적으로 엄청난 부담이었고, 지금은 집에 더 이상 책을 놔둘 공간이 없어 책을 구입하기가 부담스럽다. 그런데 만약 반드시 책을 구입해서 읽어야 한다면, 나는 아마도 '꼭 읽고 싶은 책'만 읽어야 했을 것이다. 그럴 경우, 읽던 분야의 책만 읽거나 유명한 작가의 베스트셀러만 읽지 않았을까.
책을 빌려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가장 읽고 싶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관심이 가는 책도 읽었다. 오히려 그렇게 별 기대 없이 읽은 책이 인생 책이 되는 경우도 많았고, 편견이 깨지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할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싫어하는 작가나 싫어하는 부류의 책을 읽기도 했다. 어떻게 이렇게 성의없게 헛소리를 썼는지 의아한 책도 있었지만 안 좋은 부분은 왜 안 좋은지를 분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이 누군가에게 팔리는 이유를 분석하면 해당 지점에서도 배울 점이 있었다.
나는 원래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은 피하고 싶은 청개구리 심보가 있는 사람이다. 영화도 천만 관객이 봤다고 하면 괜히 보기가 싫어지는 그런 사람. 대신, 많은 사람들이 알지는 못하지만 의외로 보석 같은 책이나 영화를 찾았을 때 희열을 느낀다. 영화 <레인 오버 미>는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 작품이 아니다. 최소한 내 주변에서 이 영화를 봤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나 역시 이 영화를 무료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면 알지도, 보지 못했을 영화지만, 내 인생 영화로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편식하지 않고 다양한 책을 읽다보니 숨겨진 보석을 발견하는 눈이 밝아졌고, 이러한 눈은 어디에서든 의외로 좋은 정보를 찾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내가 빌려 읽은 670권 중 통계적으로 가장 많은 분야는 자기계발서 및 경제경영서가 아닐까 싶다. 회사에 다니면서부터는 출퇴근 시간을 이용해 책을 읽었고, 이 시간에는 보통 업무적으로나 회사 생활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책을 즐겨 읽었기 때문이다. 그런 책을 읽으면 책을 읽기 전보다 어딘가 성장했다는 기분이 들어 좋았다. 회사에 가서 일을 하거나 처음 만난 사람들과 미팅을 할 때에도 관련 책을 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겨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반대로 말하면, 독서를 멈추면 성장도 멈추는 기분이 든다. 독서도 운동과 같아서, 계속 하지 않으면 근육이 떨어진다. 가수 송창식 씨는 50년 동안 단 한 번도 기타 연습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50년 동안 기타를 친 사람도 연습을 멈추면 실력이 녹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독서, 글쓰기, 운동은 매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정기적으로 리듬을 살려주려고 노력한다. 약발이 떨어지면 다시 책을 펼쳐서 성장하는 느낌을 채운다. 책을 읽는 습관은 성장하는 습관으로 이어졌고, 비타민 약을 챙겨먹듯이 독서를 통해 그날의 기분을 관찰하고 요즘 내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들을 채워넣는다.
SBS<생활의 달인>에는 한 분야에서만 수십 년 동안 종사해 달인의 경지에 오른 이들이 출연한다. 그들이 일반인들은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한 분야를 오랫동안 꾸준히 파왔기 때문이다. 달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나는 약 1년 정도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이때 하도 긴장하며 오탈자를 찾아낸 덕분인지 어디에서든 남들보다 오탈자를 빠르게 찾아낸다. 회사에서 쓰이는 자료에 누구도 찾지 못한 오탈자를 발견하면, 사람들은 도대체 그걸 어떻게 찾았냐고 묻는다. 오탈자만 뚫어져라 쳐다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무엇이든 한 가지를 꾸준히 파면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미세한 부분도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데, 670권의 책을 읽으면서 책에 대한 나름의 미세한 감각이 생겼다.
예전에는 책을 구입할 때 이 책이 나에게 잘 맞을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면, 지금은 책의 몇 페이지만 짧게 훑어봐도 나에게 맞는 책인지 아닌지를 금방 알 수 있다. 표지, 작가 프로필, 작가의 말투나 자주 쓰이는 단어, 첫 에피소드 등을 통해 나의 종합적인 느낌을 결론내린다. 이러한 책에 대한 감각이 단순히 책을 고르는 데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도 결국 사람이 쓰고,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겠는가. 670권의 책을 읽으며 만들어진 미세한 감각은 나의 모든 일에 활용되고 있다.
670권의 책을 읽기 전에는 한 권의 책을 읽는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혔다. 한 권을 읽는 일이 너무 거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읽는 속도가 느리다보니 뒷부분을 읽으면서 앞 부분이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렸고, 내용이 머릿속에서 산발적으로 돌아다녔다. 그런데 670권의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고, 빨라진 속도 만큼 한 권의 책을 요약하고 정리하는 힘도 생겼다.
어떤 일이든 끝마쳐보아야 일의 전체가 보이는 것 같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일을 처리하느라 급급한 나머지 배경화면에 정리되지 않은 파일이 가득찬 적이 있다. 많은 일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도대체 내가 1분기에 무슨 일을 했고, 어떤 성과를 만들어냈는지 머릿속에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하루 날을 잡고 파일을 폴더에 차곡차곡 정리를 했다. 그제야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가 보였다. 파일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폴더 정리까지가 일의 끝이었던 것이다. 처음엔 폴더 정리를 하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매분기마다 파일 정리를 하다보니 스스로 기준을 설정하고 정리를 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고, 파일을 만들면서도 '이것은 OO폴더에 넣으면 되겠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요즘 여러 매체에 책 리뷰 기고를 하고 있는데, 아마 많은 책을 읽지 않았더라면 기고를 하는 일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일단 책 한 권을 읽는 데에 너무 많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고, 사람들에게 이 책을 어떻게 요약해서 소개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한 두 시간 정도 책을 읽다 보면 머릿속으로 핵심 키워드가 떠오르고, 그 키워드를 기반으로 글을 써내려간다. 키워드를 떠올리는 일, 즉 요약이 원고를 완성하는 데 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 글은 670권의 책을 읽기 전의 나와 670권을 읽은 후의 나를 비교하면서 적었다. 많다면 많은 숫자고 적다면 적은 숫자이겠지만,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숫자다. 지구력이 부족한 내가 10년 동안 꾸준히 한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누군가 돈은 없는데 시간이 넘친다거나, 지금의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도서 대여 카드를 만들라고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고르라고 말하고 싶다.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된다. 돈은 없는데 시간이 넘치는 다른 사람들은 어떤 방법으로 시간을 채웠는지, 자기혐오에 빠졌던 사람들이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갔는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무엇을 배우면 좋을지,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무슨 일을 하며 밥벌이를 하게 되었는지. 인생의 질문은 대부분 책 속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쭉 책을 읽을 것이고, 읽어야만 한다.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마케터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 일글레 구독 신청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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