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충분히 애도하고 있나요?
우리는 그 슬픔을 마음껏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애도와 우울, 첫 번째 이야기
지금 와서야 담담하게 밝힐 수 있는 사실,
나는 왕따였다.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그것은 사고처럼 갑작스럽게 내게 드리워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부반장을 할 정도로 사교성이 좋은 아이였지만, 무엇이 잘못된 건지(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그렇게 된 건지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반 아이들이 나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심각한 신체적 폭력은 없었으나, 매일같이 가해지는 언어폭력과 경멸, 비웃음, 그리고 무시와 그로 비롯한 소외감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견디기 힘들었던 건, 어제까지만 해도 옆자리에서 함께 웃고 떠들었던 친구와, 또래 아이들 속 '당연히' 있는 것으로, 있어야 하는 것으로 여겼던 내 자리의 상실로 비롯된 '상실감'이었다. 도저히 보이지 않는 출구에 울고 싶었지만 울 수조차 없었다. 나는 분명 집단적이고 일방적인 괴롭힘의 피해자였으나, '친구가 없다'는 사실이 어쩐지 너무나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울 수 없었다. '울면, 내가 왕따라는 걸 부모님에게 들킬 거야.' 그런 마음이 너무나 커서 엉엉 울면서 괴롭다고 소리치기 보다는, 그냥 점차 내 안으로,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렇게 1년 반이라는 죽음과 같은 시간을 견뎌내고, 마침내 부모님의 직장 문제로 멀리 이사를 간 후 그곳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면서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나의 악몽은 종결되었다. 종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내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존감과 자신감이 낮고, 새로운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으며, 인간관계를 귀찮아한다. 그 당시의 경험을, 쉽게 입 밖으로 내지 못하며, 겨우 입술을 달싹이며 이야기를 끄집어내면 가슴이 불에 덴 것처럼 화끈거리고 말을 더듬는다. 나는 여전히, 왕따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제야 눈치챘다. 나는 아직도 그 당시의 악몽에서 완전히 발을 빼지 못했고, 그렇게 눈물이 많은 내가, 정작 나를 애도하기 위해서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저 마치 없던 일처럼, 속에 깊숙이 묻어 자물쇠를 이중, 삼중으로 걸어 잠가 은폐해 버렸던 그때의 어둠은, 도대체 어느 틈새에선가 흘러나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물들여 버린 것이다.
그렇게 슬픔과 우울이 응어리져 형성된
열두 살의 작은 '내'가,
스물넷, 여전히 내 안에 있다.
우리는 상실의 시대를 살고 있다. 상실은 어느 때나 있어 왔다. 생각조차 닿지 않는 그 아득한 옛날, 인간이 존재하기 시작한 때부터 상실은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그를 애도하고, 슬픔을 극복하는 시간을 가진다. 역사적으로 다양한 방식과 형태의 제사의식이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상실은 비단 죽음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인생은 이별로 가득 차 있다. 사랑했던 이, 아끼던 물건, 가족이나 다름없었던 반려동물 혹은 간절히 이루고 싶었던 꿈이나 젊은 날의 패기, 심지어는 신년이 되어 떠나보낸 작년의 나까지, 많은 것들이 내 의지 하에 혹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언젠가는 나를 떠나간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상실[喪失] :
1. 어떤 사람과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지게 됨.
2. 어떤 것이 아주 없어지거나 사라짐.
상실이 일상이 된 시대다. 인스턴트 만남과, 온갖 테러와 범죄 등으로 상실은 우리에게 더 자주 찾아온다. OECD 국가 중 행복지수 최하위, 자살률 1위, 이혼증가율 1위라는 영광 아닌 영광을 얻은 한국 사회에서 상실은 더욱 가까이 있다. 그러나 자주 찾아온다고 해서, 이전 세대에 비해 상실의 아픔이 덜한 것은 아니다. 그래, 통계치로 그것을 표현하기엔 우리의 상실은 너무나 깊고 아프다.
상실은 슬픔, 분노, 고통, 죄책감 같은 감정을 동반하며, 때때로 세계에 대한 이해를 교란시킨다. 다음은 성시경의 <거리에서>라는 노래 가사의 일부이다.
♪
니가 없는 거리에는 내가 할 일이 없어서
마냥 걷다 걷다 보면 추억을 가끔 마주치지
떠오르는 너의 모습 내 살아나는 그리움 한 번에
참 잊기 힘든 사람이란 걸 또 한 번 느껴지는 하루
막다른 길 다다라서 낯익은 벽 기대 보면
가로등 속 환히 비춰지는 고백하는 니가 보여
떠오르는 그때 모습 내 살아나는 설레임 한 번에
참 잊기 힘든 순간이란 걸 또 한번 느껴지는 하루
널 그리는 널 부르는 내 하루는
애태워도 마주친 추억이 반가워
날 부르는 목소리에 돌아보면
텅 빈 거리 어느새 수많은 네 모습만 가득해
이 유행가의 화자는 상실을 겪은 사람들이 세계에 대한 이해가 교란될 때 보이는 전형적인 행동들을 보여준다. 이전에 연인과 함께 걸었던, 익숙하고 친근했던 거리가 이제는 그에게 고통일 뿐이다. 이별과 상실의 그림자가 외부의 사물에, 거리, 가로등, 막다른 골목에, 심지어는 그의 하루 전체에, 완벽히 드리워진 것처럼 보인다. 과거에 두 사람은 매우 긴밀하게 공동의 세계를 형성했으나, 이제 그 세계에는 연인의 기억만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문제는, 상실의 때는 이전보다 잦아졌는데 우리는 그것을 극복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슬픔을 빨리 극복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일곱 번 넘어져도 일어나는, 그래, 우리 사회는 우리가 캔디나 개구리 왕눈이가 되기를 요구하는 듯하다. 그런 사람을 사회는 독립적이고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라며 자랑스러워하고, 이런 사회의 풍조 속에서 사람들은 감정의 표출을 거부하고 눈물을 유약함으로 치부하게 된다. 결국 상실을 애도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진 이 사회, 아픈 마음을 다독이기에는 너무 바쁜 이 시대에 우리는 상실을 극복하지 못한 채 그대로 안고 가게 된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그의 저서 「애도와 우울증」에서 말한 바로는, 애도는 상실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이별 혹은 사별로 인한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이나 어떤 추상적인 것,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꿈이나, 젊음이나 자유, 이상(理想) 등 무언가를 상실했을 때의 정서적 반응을 '애도'라고 한다. 상실을 경험한 사람은 깊은 상심, 외부 세계에 대한 관심의 중단,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의 상실 등 삶에 대한 정상적 태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상실 탓에 아무리 괴롭다 해도, 우리는 병원으로 가서 치료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이 아픔이 극복되리라는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대상이 더 이상 내 곁에 존재하지 않게 되면, 이제 그 대상에 쏟아부었던 모든 애정(프로이트가 사용한 개념으로는, '리비도 libido'라고 한다.)을 거두어들여야 한다. 이런 요구는 당연히 반발을 일으킨다. "네가 사랑한 그 사람은 떠났어. 포기해!"라고 말한다고 한들, 그리 쉽게, 가벼이 잊히는 것이 사랑이겠는가. 현실의 요구와 명령은 서서히, 많은 시간이 경과되고 많은 에너지의 소비가 있고 난 후에야 받아들여지게 된다. 사랑했던 그이와 함께 한 기억이 되살아날 때면 미처 떠나보내지 못한 사랑 때문에 매우 슬프고 고통스럽지만, 그 고통도 차차 흐릿해진다. 그렇게 애정의 철회가 전부 이루어지고, 애도의 작용이 완결되었을 때 우리는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충분히 슬퍼하고 나면, 그로 인한 고통은 어느 정도 치유가 된다.
이 리비도라는 놈은, 굉장히 문란해서 오로지 한 대상에게만 애착을 집중시키지는 않는다. 거두어들여진 리비도는 유유히, 사랑할 만한 다음번 대상을 찾아 나선다. 즉, '사랑은 사랑으로 잊는 것'이라는 말이 전혀 신빙성 없지는 않다는 거다. 상처가 아물면서 우리는 또 다른 사랑에 눈뜨게 된다. 사랑은 움직이고, 상실감은 치유된다.
애도가 상실에 대한 정상적 반응이라면, 우울증은 심인성 질병이다. 그래, 우울증은, 병이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든, 꿈·건강·이상 같은 추상적 대상을 상실했든, 혹은 상실했으나 그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이든, 우울증 역시 애도처럼 '상실'로 인해 생긴다. 낙심, 슬픔, 고통스러움, 외부에 대한 관심의 중단 같은 증상이 동반되는 우울증은 상당 부분 애도와 흡사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예외가 있다. 그 예외란, 바로 애도 과정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자애심(自愛心)의 추락'이다. 우울증은 자존감의 급격한 저하를 초래한다.
그래서 애도의 경우 세계가 빈곤하고 공허해진다면, 우울증의 경우에는 자아가 빈곤해진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은 자기 자신을 거세게 비난하고, 욕설을 퍼붓는 등,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처벌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데서 비롯된 열등감은 심한 피로감, 불면 혹은 과수면과 단식 등의 식이장애로 이어지고, 심할 경우에는 자살 충동에 시달리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두고 '모든 살아 있는 것을 생명에 귀속시키려는 본능적 욕구마저도 억누르려는, 심리학적으로 아주 특이한 심리 상태'라고 일컫는다.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하고 나면 그 대상에 대한 애정을 철회하여 일정 기간 애도의 시간을 가진 후 사랑의 대상을 옮겨야 한다. 그런데 우울증자의 리비도는 새로운 대상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자아 속으로 들어가고 만다. 자아 속으로 들어간 리비도는, 자아의 일부를 상실 대상과 '동일시(합체)'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나'는 사랑하는 '너'가 된다. 자아의 일부를 상실 대상과 동일시한다는 말이 조금 어렵게 느껴진다면, 파리의 연인에서 이동건이 자신의 가슴을 가리키며 했던 대사를 떠올려 보자.
내 안에, 너 있다.
프로이트는 내가 어떻게 '당신'이 되는지, 그 심리적인 메커니즘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지만, 결국 이러한 대상의 내면화는 '나는 사랑하는 너의 상실을 거부한다'는, 사랑을 지키기 위한 자아의 자구책이자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애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상실을 극복하지 못하면 상처는 아물지 못하고, 새로운 대상을 찾지 못한 사랑이 방황하게 되면서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반면 애도 과정이 지나치게 길어지더라도 우울증에 빠지게 된다. 우울증은 우울감, 의욕상실, 무기력감, 피로감, 수면 장애, 성기능 장애, 집중력 저하, 식욕 장애, 심하면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아주 위험하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분한 애도가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상실을 경험한다. 따라서 애도는 더 이상 '약함'이 아니라 한 사람의 건강에 가장 중요한 심리적 과정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애도는 상실로 생긴 깊은 상처와 생채기들을 아물게 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힘을 준다.『애도』(베레나 카스트 저) 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들이 언제 슬퍼해야 하고, 언제 슬퍼해서는 안 되는지, 애도가 어느 정도 지속되는 것이 적당한지에 대해서 일정한 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애도를 크게 방해한다. 누구를 위해, 얼마 동안 애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원칙도 정해져 있지 않다.
상실한 것이 다른 이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사소한 것, 예를 들면 흔한 모나미 볼펜이라든가, 싸구려 티셔츠나, 흉측하게 생긴 벌레일지라도, 우리는 슬퍼할 수 있다. 타인은 그것과 나 사이에 성립하는, 어떤 특별한 관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 우리가 어느 대상과 감정적으로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우리는 바로 그만큼,
슬퍼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문헌:
프로이트 , 지그문트, "프로이트 전집", 1997., 열린책들
Kast, Verena, "애도", 2007.,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