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 제주를 걸었다. 급하게 여행을 준비하던 중 렌터카가 예상보다 너무 비싸 차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제주의 바람을 만날 수 있었다. 하루 종일 걷던 우리와 함께한 바람의 흔적은 머리카락에 고스란히 묻어 밤에는 손가락 하나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뻣뻣해진 머리카락이 되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바람이었다. 하루 종일 바람이 내 몸을 스치고 일부는 뚫고 지나갔다. 칼바람이 아닌 게 정말 다행이었다. 옷깃을 여미는 것으로 가까스로 몸은 막아냈지만 얼굴은 무방비였다. 바람이 하루 종일 한쪽 귀로 들어갔다가 다른 쪽 귀로 나왔다. 머릿속이 공기로 가득 차 어지러웠다.
우리는 함덕리에서 시작해 북촌리를 지나 동복리까지 걸었다. 너른 모래사장에서 피어오르는 모래바람을 지나고 야자수 가로수로 둘러싸인 이국적인 호텔을 지나니 팽나무가 반겨주는 오래된 마을이 있었다. 눈높이로 쌓인 현무암 돌담을 따라 마을을 걸었다.
보도블록 조차 시커먼 현무암인 동네에서 붉은 자갈이 깔린 공원은 눈에 띄었다. 자연스럽게 들어간 그곳에는 직사각형의 돌이 이리저리 널려있었다. 그리고 돌마다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하늘은 낮은 구름에 덮여 음울해 보였고 한라산 정상은 구름 떼가 잔뜩 몰려 있었다. 낯익은 제주도 특유의 겨울 날씨였다. 그건 어린 시절의 겨울 하늘을 낮게 덮고 벗겨질 줄 모르던 바로 그 음울한 구름이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돌담은 더 검고 딱딱해 보이고 한라산 기슭의 질펀한 목장에 덮인 눈빛은 침침했다. 하늬바람이 불어와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바람소리, 쉴 새 없이 고시랑거리는 앞머리칼. 나는 불현듯 가슴이 답답해왔다. (순이 삼촌 중에서)
70여 년 전 그날의 날씨가 이랬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4월 제주의 바람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