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無用)의 날
일 년의 30%은 일을 하지 않는 것 같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교에 남았다. 적은 월급에 넘쳐나는 일, 그래도 4년간 다녔던 학교에서 하는 일이라 즐거웠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렇게 몇 년을 보내고 학교 밖 사회로 나오게 됐다. 박봉이었던 학교 월급보다 조금 더 적은 돈을 버는 생활이 이어졌다. 일의 양은 줄어들었고 나만의 시간은 늘어났고 그만큼 수입은 줄었다. 그리고 일이 일정하지 않았다. 어릴 나이라서 그런지 들쑥날쑥하는 일에 불안해하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더 힘겨웠다. 나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비생산적인(無用) 일이 더 끌리기 시작했다. 먹는 것, 입는 것 등을 줄이고 무용한 일에 매진했다.
그런 시간을 지나 30대가 되어 흔히 말하는 직장생활을 했다. 사람들은 고용조건이 아주 좋은 곳이라는 착각으로 날 힘들게 했다. 무엇인가를 하는데 까지 긴 시간이 필요한 나이다. 예열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을 하는 당위성을 공감해야 일을 시작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을 하다 보면 깊게 일에 빠져 열심히 하기만 하는 유형이기도 하다. 그렇게 몇 년을 보냈다. 초과 근무시간은 늘 넘쳐났다. 그 와중에도 나이가 비슷한 직장동료들과 여행도 가고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 먹는 것이 즐거웠다. 그렇게 7년. 40대를 앞두고 그만 그만두고 말았다.
퇴사 후에 무엇을 할지 계획하거나 노력한 것 없이 하루아침에 그만두었다. '이쯤이면 됐어, 그만하자' 그런 마음이 강렬했다. 퇴사 후 1년은 아프기만 한 것 같다. 퇴사 전부터 많이 아팠는데 긴장이 풀려서인지 병이 파도처럼 나를 휩쓸었다. 한 3년이 지나서일까? 그때부터 조금이 일이 있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5년, 6년... 어떻게 하지? 불안한 마음이 늘 엄습했고 풍족한 경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한 두려움 속에서도 무용한 시간을 놓을 수 없었다.
지금은 일이 없는 기간이다. 생산적인 일이 없는 시간인 것이다. 곧 50대를 맞이할 수 있다는 생각에 때론 이렇게 시간을 보내도 될까?라는 불안함이 다가오지만 편안한 지금의 시간이 좋다. 적게 벌지만 마음이 편안한 일을 한다. 일이 적지만 있을 때 최선을 다한다. 마음이 편안한 일이라는 건, 노동의 강도가 낮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노동의 강도가 세고 노력을 많이 하고 시간을 계속 투자해야 하는 경우가 잦다. 그런데도 이런 적은 일을 만족해하며 무용의 시간을 감내하는 것은 이 일이 나의 정체성을 단련할 수 있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초조하지 않고 강렬하기보단 냉철한 무용의 시간이 삶에 있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일 년의 30% 정도는 무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기에 이렇게 불완전한 사회-경제-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계속 이런 시간이 길어지길 기대한다. 충분히 나를 느끼고 천천히 하루를 보낼 수 있는 무용의 시간이 인간 행복의 출발점임을 알기에 이런 기도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