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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보 Mar 11. 2018

노키즈존(Nokidszone)에 대한 단상

혐오와 관용,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작년 여름에 친구의 초대로 미국 텍사스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20여 일간의 여행 중에 십일 정도는 뉴욕을 비롯한 미국의 동부를 여행하려고 오스틴에서 뉴욕으로 가는 왕복 비행기를 끊었다.
뉴욕, 워싱턴, 나이아가라를 거쳐 캐나다를 잠시 거치는 재미있는 일정을 마치고 오는 비행기는 새벽 5시쯤 출발하는 비행기였다. 혹시 몰라(또 하루 숙박비를 아끼고자 하는 마음에) 아예 밤 12시쯤 공항으로 출발했다. 공항을 헷갈려서 라구아디아 공항을 가야 할 것을 존 F 케네디 공항으로 가는 바람에 택시를 한차례 더 타는 소동을 겪고 새벽 2시쯤 공항에 도착했다. 한 밤 중이라 공항 시스템이 오픈할 때까지 다른 승객들을 따라 바닥에 쪼그려 기다리다가 새벽 3시부터야 겨우 탑승수속을 밟고 눈 한숨 못 붙인 상태로 이륙을 준비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런 상황이니 내가 얼마나 비행기 안에서 푹 자고 싶었겠는가. 가뜩이나 여행의 피로가 한껏 올라와있었을 때이기에 했고. 비행기를 꽉 채운 다른 승객들도 비슷해 보였다. 나는 그래도 여행 중인 방랑객이라 피곤해도 마음만은 여유로웠지만 새벽 국내선 비행기를 타는 대다수의 손님들은 일상의 피로를 짊어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비행기에 앉자마자 자고 싶은 마음에 뒷좌석에 머리를 기대는데, 내 자리에서 통로 맞은편의 뒷 뒷자리에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한 4-5살 되어 보이는 작은 꼬마 소년과 그 동생이 바로 주인공이었다. 3시간 남짓한 비행시간 동안 (말을 아직 잘 못하는 것 같은) 동생은 그나마 나았는데, 막 말을 배워 입이 트인 그 소년은 주구장창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었다. 그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성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이에게 주의를 주며 책이나 장난감 등을 아이에게 주었지만, 아이는 책을 읽으면서도 큰 소리로 "이게 뭐지? 이건 공룡이구나! 와! 이렇게 큰 공룡이라니!! 파란색이야~!!!"와 같은 이야기들을 마구 쏟아내었다(물론 영어다). 모두 눈을 붙인 조용한 비행기 속에서 오직 그 아이의 목소리가 볼륨을 최대치로 킨 TV처럼 쏟아져 내렸다. 목청은 얼마나 또 좋은지.
잠자리에 무척 예민한 편이기에, 귀에서 울리며 잠을 방해하는 그 소음에 나도 모르게 째려보는 눈빛으로 뒷좌석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갓난쟁이 아기도 아니고, 말귀를 알아듣을만한 나이의 그 소년을 제어하지 않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너무너무 자고 싶었는데, 도저히 잘 수 없는 그 상황에 짜증이 머리 끝까지 나는 그 상황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피로에 찌들어 잠들었거나, 잠들려고 노력하는 나와 비슷한 처지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인상적인 것은 그 누구도, 그 아이 때문에 짜증이 난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통로 쪽 좌석에 앉아있었기에 맞은편의 꽤 많은 사람들이 보였는데, 눈썹 하나 찌푸리는 사람이 없었다.(아마 인상 찌푸리는 것은 내가 제일 심했을 것이다. 나보다 심각해 보이는 사람은 그 아이의 어머니와 할머니 둘 뿐이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은 두리번거리다 그 아이와 눈을 마주치면 싱긋 웃으며 인사를 나누어주기까지 했다. 아이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면서도 개인의 영역이 분명하다는  개인주의의 나라 미국에서의 그 상황은 나에게 참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결국 한숨도 자지 못하고 친구 집에 도착해, 나 너무 이상했다고 반쯤은 고자질하듯, 반쯤은 신기하다는 듯이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니 친구의 말이 뜻밖이었다.
"미국이 개인주의가 심하고 서로 피해 주지 않으려고 하는 건 맞는데, 여기 사람들은 아이들에게는 되게 관대해. 아이들은 사회적으로 함께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되게 강해서, 그런 상황이 있어도 절대로 화내거나 하지 않더라." 덧붙여 친구는 직업상 비행기를 자주 타는 자기 남편도 그런 상황을 많이 목격했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생각해보니 아이에게 제대로 주의를 주지 않아서 원망스러웠던 그 아이의 어머니랑 할머니의 심각한 표정으로 미루어 짐작해보았을 때 그들이 아이에게 주의를 주지 못한 것은 그곳이 오히려 공공장소였기에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동학대에 민감한 미국이기에 오히려 부모들이 공공장소에서 아이들을 못 혼낸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 이후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공공장소에서 남에게 피해 주는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주의를 주어야 한다 안 한다의 논쟁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미국과 같은 서양에서는 아이에게 수치심이 들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아이를 혼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아이도 혼날 일 했을 때는 어떤 상황에서도 혼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만 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아이나 부모의 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러한 상황에서 한 명도 짜증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비행기 속의 '다수의 사람들'이었다.  



최근에 꽤 멀지만 분위기가 좋아서 가끔 가던 한 카페가 노 키즈존이 된다는 안내를 받았다.
나는 애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아직 계획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카페가 노 키즈존이 된다는 소식에 오히려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온전히 그 카페를 좋아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랄까?
우리 주변에 노 키즈존은 점점 늘어나는 것 같다. 원래 아이들'에게' 유해하거나 무익해서 19세 미만 미성년자가 출입금지인 곳이 아니라 주인이 임의로 아이들'이' 자신들의 사업장에 유해하다고 혹은 불편을 끼친다고 여겨 출입을 금지하는 '노키즈존' 말이다.  
처음에 생기기 시작했을 때에는 꽤 논란이 되었던 것 같은데, 결국 개인 사업장들은 주인 마음대로 아니냐-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이제는 모두들 그것이 그래도 아무 문제없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다.
하지만 의문이다. 노키즈존이 당연시되는 사회가 정말 괜찮은 것인가?

비행기에서 있었던 바와 같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아직 다 성숙하지 못하고 어린아이들은 눈치도 없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기 쉽다. 그들은 까불거리려는 본능이 몸속에서 움틀거리는 존재들이다.
나는 아이를 키워보진 않았지만,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깨달았다. 아이들은 어쩜 그렇게 에너지가 넘치는지. 그들은 정말 사소한 이야깃거리를 가지고도 자신의 온 에너지를 다 담아낸다. 한 주제로 시작하여 3시간 넘게 떠들 수 있다.(물론 그 주제가 처음의 주제에 머무는 것은 1분도 안된다.) 복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갈 때에도 100가지가 넘는 방법으로 다양하게 갈 수 있다. 아무리 교실에서 얌전한 아이들도 운동장에서는 그들의 손끝 발끝까지 웅축되어 숨겨져 있던 에너지들이 표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건 아이들이 훈육을 덜 받았거나, 특별히 더 부주의해서가 아니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원래 그런 존재이다. 초등학교 4학년 말쯤 되어서야 (늦은 아이들은 6학년이 되어도 못하지만) 선생님에게 안 들키게 소곤소곤 떠드는 게 무엇인지 터득하는 게 보통의 아이들이다.
그나마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유치원에 다니더라도 말귀를 알아듣는 아이들은 괜찮지만, 갓난쟁이 아이들은 더하다. 이들은 하는 일이 울고 똥 싸는 거다. 이 나잇대의 아이들을 데리고 외출하는 부모들은 일명 기저귀 가방이라고 부르는 마법 보따리 같은 곳에다 젖병부터 시작해, 이유식, 기저귀, 손수건, 장난감 등등을 몽땅 쟁여가지고 다니는데, 그럼에도 아이는 백-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귀여워서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 외에 이 아이들은 사실 할 수 있는 대다수의 것들이 남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들이다. 좁은 비행기 안에서 끊임없이 울거나, 아무데서나 똥을 싸서 똥냄새를 풍긴다. 걸핏하면 토하기도 한다.

맞다. 아이들은 피해를 잘 준다.
하지만, 그것-이들이 피해를 잘 준다는 사실-이 이들을 당당하게 배제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반 아이들과 이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이미 초등학교 6학년인 이 친구들은 'kids'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지만, 몇몇 사례들을 보여주고 아이들과 생각을 나누었다. 서로 갑론을박 이야기를 나누던 아이들은 노키즈존은 아이들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의 편견이고, 이 편견에 의해서 차별당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개인 사업장인 카페나 식당이라지만 그런 곳이 있으면 사회 전반에서 은근히 배제당하는 것 같아서 기분 나쁘다고도 했다. 담배연기를 흩뿌리거나 술냄새를 풍기고 큰 소리로 떠드는 등 남에게 피해를 주는 어른들도 굉장히 많은데, 그것을 아이들에게만 그들이 그럴 것이다라고 미리 결론 지어 버리는 것은 편견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노키즈존'이란 단어에서 주는 어감이 굉장히 기분 나쁘다고도 했다. 특정한 이유로 아이들에게 정말 이 장소가 좋지 않다고 여겼을 때, 혹은 아이들이 오지 않길 바란다면 노 키즈 존 보다는 '온리 성인 존 (Only for adults)'과 같은 말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Only kids zone 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날카로운 아이들은 주로 돈을 내는 대상이 어른들이다 보니 아이들은 더 쉽게 배제하는 것 아니냐는 문제제기를 하기도 했다.
결국 아이들 입장에서 이는 아이들에 대한 '차별'로 다가온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나는 이 문제가 '혐오'의 문제 혹은 '관용'의 문제로 느껴진다.
최근에 여성혐오, 남성혐오, 노인혐오, 장애인혐오 등 혐오 관련된 이슈가 굉장히 많다. 특정한 개인이 아닌 한 집단에 일반적으로 가지는 '혐오'의 감정이 문제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동의한다고 가정하면, '노키즈존'은 과연 혐오의 일종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종종 나는 애들이 싫어-라고 말하던 한 친구는 노키즈존이 혐오이지 않을까 하는 말에, 하지만 아이들은 실제로 피해를 주잖아?라고 되물었다. 실제로 피해를 주니까 그건 혐오가 아니라 그냥 피해 예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혐오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여성을 혐오하든, 장애인을 혐오하든 혐오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에 대한 그럴듯한 경험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문제는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집단에 투영하여 집단 자체에 대한 특정한 감정을 만드는 것이다. 나 또한 특정 집단에 대한 편견이 있고 좋거나 싫은 감정을 가지곤 한다. 아마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옳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혹은 이런 얘기를 하다 보면 나도 아이였던 적이 있어, 그래도 싫은 거 어떡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우리 모두 아이였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아이가 될 일이 없다는 사실에 다른 종류의 혐오보다 이 혐오에 더 쉬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다 가지고 있던 속성이기에 잘 안다고 생각하고 또 동시에 다시 그렇게 될 일이 없기 때문에 더 배제가 쉽다는 것이다.

맞다. 나도 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아이들은 피해를 주기 쉬운 존재이다.
그건 바뀌지 않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래 그런 존재들인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것- 그것을 우리는 관용(tolerance)라고 한다.

피해라는 것도 결국 우리의 인식이 결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주는 시끄러움, 약간의 지저분함, 정신없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 그러면서도 함께 그 아이들을 잘 교육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더 높은 수준의 인식이 아닐까?
아이들의 행동을 따지기 전에, 그들의 부모를 탓하며 특정 장소에서 그들의 존재를 지워버리기 전에 내가 그만큼 '관용'있지 않은걸, 먼저 부끄러워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제안하고 싶다.
그냥 받아주자고-
그들이 원래 그런 존재라는 것, 그리고 우리도 모두 그랬었다는 것을 말이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내 주변에는 막 육아를 시작한 친구들이 많다. 주변에 딱히 도와줄 이가 없는 친구들은 순전히 혼자서 (그 피해를 많이 주는) 아이 한 명을 감당한다. 배우자는 생계를 위해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퇴근 후 많이 도와주고 싶어도 한계가 있으며, 결국 친구는 밤에도 한~두 시간에 한 번씩 깨서 우는 아이를 감당하며 잠도 못 자고 살은 점점 빠진다. 지치고 우울해하는 친구는 따뜻한 봄날에도 바로 앞 슈퍼에 나가기조차 꺼린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까 봐란다. 좋은 이웃도 많은데, 요즘 같은 세상에 어딜 가서 '맘충'소리 들을까 봐 벌벌 떠는 스스로가 웃기다고 또 자신을 탓하며.
내가 보기에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을 하고 있는, 그러면서도 자칫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이 피해를 줄까 봐 자신과 아이를 더 힘들게 가두는 내 친구들을 생각해 본다.

관용을 경험한 이들이 결국 관용을 더 잘 베풀 수 있다고 믿는다.
관용(tolerance) 있는 사회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것, 그것은 결국 우리의 선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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