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저 기억하시나요?”
“응, 그 때 레스토랑 데리고 갔던 그 진만이? 알지, 알지 그럼!”
20년 전의 그 기억이 갑자기 소환되었다. 1999년 첫 발령을 받은 그 때는 남자고등학교에 여자 선생님이 담임을, 그것도 신참에게 맡기지 않았다. 나는 2년차에 첫 담임의 기회가 주어졌고 3월 새로운 아이들을 담임으로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이 폭발하고 있었다. 3월 첫날 우당탕당 반에서 주먹 좀 쓴다는 두 녀석이 싸움이 붙었다. 마침 교무실 바로 옆이었던 교실로 나는 스프링처럼 뛰어갔다. 엉겨붙은 두 녀석을 떼어내고 복도에 “손들엇” 해놓고 붉으락푸르락 몽둥이를 들고 정의를 부르짖었다. 그렇게 시작된 나의 담임 첫 날, 그 뒤로 학급을 다잡기 위해 말썽쟁이들을 눈여겨 쏘아보기 시작했다.
진만이는 눈이 반짝반짝 빛이 났다. 수업시간 과제를 주면 곧잘 하고, 글씨도 워낙 잘써서 나는 이 녀석이 아까웠다. 학교에 정을 못 붙이고 야간 자율학습은커녕 일과 수업 참여도 안하려고 하고 자꾸 도망다닐 생각을 하며 조퇴와 지각이 잦았다. 진만이에게 제안을 했다. “부산으로 나가면 정말 멋진 레스토랑이 있어. 이쁜 가수가 나와서 홀에서 노래도 부르고 그 노래 들으면서 맛난 음식을 먹으면 되는데 막 멋지게 생긴 사람이 서빙도 해주고 완전 그렇다. 너 거기 나랑 가볼래? 대신 조건이 있어. 음식값이 진짜 비싸니까 너 용돈을 아껴서 매주 2천원씩 나에게 적립해. 그럼 음식값이 다 모이면 내가 데리고 가줄게. 어때?” 이 제안이 제대로 먹혔는지 진만이는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매주 2천원씩을 적어도 술값이나 게임비로 낭비하지는 않을테고, 고급 레스토랑 체험이라는 목표가 생겼으며, 그래서 담임이 자신의 돈을 삥(횡령)하지는 않는지 체크해야할테고, 그래서 결국 진만이는 학교에 꼬박꼬박 나와야 했다. 그리고 나와 진만이와의 대화를 옆에서 듯고 있던 한 녀석도 같이 동참하기로 했다. 마침내 두어달이 지났고, 나의 돈을 조금 보태서 우리는 부산의 그 고급레스토랑으로 향했다. 토요일 수업을 마치고(그 때는 주5일제 시행 전이었다) 부산으로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나는 시골 녀석들에게 레스토랑을 보여줄 마음에 조금 설렜고 녀석들은 담임의 말이 진실인지를 확인할 마음에 더 설레는 것 같았다. 고급이 아니라면 아주 그냥 담임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그 진만이가 20년이 지나 전화가 왔다. 인터넷에서 나를 검색해서 찾았다고 했다. 나는 정말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 때는 나의 젊은 날이기도 하였다. 진만이에게는 열일곱의 어린 날이었다. 어느 대학의 행정 사무를 돕고 있다고 했다. 아이도 둘이나 낳아서 가족이 생겼으며 그 사이 석사학위도 땄다고 했다. 이런... 고마울 데가..! 지금 잣대라면 진만이는 기초학력지원대상 학생이었다. 나는 그런 기준이나 잣대를 진만이에게 들이대지 않았다. 공부도 시키려고 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진만이의 생활을 이것저것 귀찮게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냥 나와 함께 진만이의 열일곱살의 이 아름답고 찬란한 날이 학교라는 틀안에서 이어가기만을 바랬다. 그리고 신록의 5월에 맛있는 밥 한끼를 같이 먹는 것으로도 좋았다. 왜냐고? 그냥 난 애들이 좋았으니까. 적어도 나와 함께하는 이 시간이 녀석에게도 나에게도 아름답게 남으리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해도 말이다.
아, 그래서 그 레스토랑에서 어떻게 됐냐고? 그 녀석들은 한껏 쫄아서 나에게 메뉴를 알아서 시켜달라고 부탁(?)했으며, 서투른 칼질로 식사를 대략 마친 후 선생님 덕분에 좋은 경험을 했다고 고마워했다. 진만이를 만나면 이제와서 솔직하게 말해줄 게 있다. 사실 그날 내 밥값도 너희들이 냈다. 밥값이 아직 다 안모였다고 거짓말도 했었고, 그 때 너희들과 먹은 레스토랑 음식보다 더 맛있는 건 아직 못찾았다고. 그리고 5월이 이토록 푸른 건 너희들과의 찬란한 시간이 숨어 반짝거리고 있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