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스크립트를 꼭꼭 씹고 싶은 당신에게
바야흐로 동영상의 시대다. 요즘 세대는 Naver나 Google보다 YouTube로 검색을 더 많이 한다는 뉴스를 이야기 하면서, 매체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이 완전 바뀔거라고 이야기했었는데, 굳이 더 긴 전환의 시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더 젊은 세대까지 가야 할 일도 아니었다. 이제는 YouTube가 우리 부모님 세대까지 아우르는 검색 엔진이 되어 버렸다.
이미지가 아닌 영상만이 줄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글로 표현하면서 담길 수 있는 Context가 담뿍 담긴다. 맛집을 찾아가는 브이로그는 맛집을 찾아가는 풍경에서부터 음식이 서빙되서 나올 때의 직원의 친절한 미소와 식당의 왁자지껄한 분위기까지 담긴다. 크리에이터가 임의로 생략할 수 있는 것이 글보다 적고, 본인의 실력과 무관하게 풍성한 정보가 담뿍 담긴다.
회사에서 운영하는 블로그를 새로 개편하기로 했다. Wordpress로 사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여러가지 플러그인으로도 편리하지 못하게 사용하고 있어서 여러 가지 개편 방안을 알아보다가 새로운 노코딩 도구를 활용해서 아애 새롭게 블로그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냐는 판단에 이르렀다. 흠, 새로운 도구라. 누구랑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개편한 후에는 어떻게 관리해야 하지? Webflow라는 노코딩 도구로 블로그를 만든 사례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Webflow 공식 사이트에 접속해서 블로그 글을 몇 편 읽어본다. 음, 이런 특색이 있군. 몇 개의 서비스 소개 블로그와 best example들을 살펴보는데, 당연하게 자세한 설명은 YouTube 영상으로 업로드 되어 있다. 자, 이제 YouTube로 새로운 것을 배워보는거야.
도구도 낯선데, 영어까지, 화려한 시각적 효과와 후루룩 지나가니 몇 번을 영상을 pause 시켰다가 다시 보기를 반복한다.
물론 요즘 동영상 플레이어는 왠만하면 다 배수 조정이 가능하다. 1.5배, 2배, 0.5배. 빠르게 재생할 수도 있고 더 느리게 재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속도 조절이 학습자 맞춤의 '진정한 속도 조정'은 아닐 수 있다. 학습자의 인지적 속도는 모든 단어와 모든 장면에서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읽다가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좀 더 천천히, 단어를 몇 번 곱씹기도 하고, 화려한 시각적 자료와 함께 제공되는 경우는 그 자료와 함께 살펴볼 시간이 필요한데, 흘러가는 영상속에서는 아무리 배속 조정을 한들, 장면마다 다른 인지적 속도로 조정할 순 없다.
나는 아직도 종이를 한 장씩 넘기는 것을 좋아하는 종이책 성애자다. 넘쳐나는 종이책을 줄여보겠다고 아이패드도 구매했거늘, 여전히 책장은 터져 나가고 있는 중이다. 온갖 신박하고 저렴한 디지털 매체들이 넘쳐나는 와중에도 종이책을 여전히 사랑하는 이유는 종이책을 볼 때는 내 마음대로 원하는 것들을 꼭꼭 씹어 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멋진 구절을 찾았을 때, 그 구절에 멈춰 문장이 주는 느낌과 그 문장이 내 마음에 내려 앉아 그 이후에 떠오르는 장면들까지 흠뻑 즐기고 다음장으로 넘어갈 수 있고, 볼펜이나 연필 하나를 손에 들고 있다가 꼭꼭 씹고 싶은 문장이 나오면 밑줄을 죽죽 긋고 광란의 동그라미를 치기도 한다.
그래, 동영상에는 이 맛이 없다.
학습 영역, 특히 전통적인 이러닝 영역에서 학습시 일어나는 상호작용을 다음과 같이 큰 틀로 구분한다.
1) 교수자 - 학습자 상호작용
2) 학습자 - 콘텐츠 상호작용
3) 학습자 - 학습자 상호작용
위의 구분이 전통적인 이러닝 교수 설계에서 가장 골자가 되는 학습적인 상호작용의 구분이며, 위와 같은 metric을 기본으로 상호작용 정도를 높이기 위한 여러 수단들을 강구해 왔다. 여기에서 살펴볼 것은 학습자가 콘텐츠와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것이냐? 라는 부분인데... 과거에는 학습자가 무언가를 직접 조작할 수 있고, 온라인 학습 과정에 관여(engage)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이 부분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사람이 어떻게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지 연구한 기존의 이론들을 바탕으로 학습자가 학습 과정에는 일어나는 인지활동에 맞는 적극적인 행동을 하도록 장려했다. 사전질문을 던지고 해당 질문에 답을 생각해보게 하거나 직접 타이핑으로 답을 적어 내도록 하기도 했고, 중간에 멈추고 퀴즈를 풀기를 강요(?)하기도 했다.
어떤 활동을 하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온라인에서 학습하는 사람들이 학습 자료를 직접 '꼭꼭' 씹어 학습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흘러가는 것을 그냥 흘러가게 두면 안되고, 인지적인 개입을 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이다.
영상은 이런 점에서는 아주 취약하다. 아무리 재미있는 영상이라도 틀어놓고 넋놓고 있으면 멍때리기가 가능한데, 학습용 영상은 더더군다나 이 콘텐츠를 열심히 소화해 내고야 말겠다는 인간의 적극적인 의지와 개입이 많이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이러닝 scene을 어느정도 아는 사람이면 공감할 만한 것 중 하나가 '이러닝 품질 관리 규정'이라는... 것인데, 한 때 여기에서 100% 동영상은 품질이 떨어지는 학습 콘텐츠로 간주하기도 했다. 쉬운 말로 멍 때릴 수 있기 때문이고, 어려운 말로는 학습자-콘텐츠 상호작용 정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했다. 어디에서든 볼 수 있고, 어떤 기계에서도 재생될 수 있는 동영상의 시대가 왔고, 사람들은 동영상을 소비하는데 비교적 익숙해져서, 이제는 추억속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영상을 책처럼 만들어 보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사실 CapTube는 작년에 우연히 내가 조인하게 된 사이드 프로젝트이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대기업에 종사하는 개발자 친구들이 거의 다 만든 것에 살짝 발을 담궈서, 어떻게 이 기능을 더 의미있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중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CapTube는, YouTube 동영상에서 image frame들을 추출하는 기술인데, 자막 파일이 여기서 기준이 된다. 처음에는 유머 커뮤니티에서 사람들이 동영상에서 짤을 떠서 소통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면 쉽게 짤을 만들까?라는 고민에서 시작되었지만, 막상 개발을 하고 있는 우리들이 각자 공부할 것들이 있을때 이 기능을 많이 사용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서는 어떻게 하면 학습에 더 잘 활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중이다.
사용법은 간단하다. Captube.net 에서 YouTube 영상 링크를 입력하면, 어떤 자막을 선택할지 나오고, 자막 언어를 선택하면 해당 자막을 기준으로 사진을 캡쳐한다.
Webflow로 CMS를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까? 라는 비교적 심오한 주제를 꼭꼭 씹어먹기 위해, 친구들과 만든 CapTube를 이용했다. 이미지를 로컬로 저장하지 않고, output이 나온 화면에서 여러번 위 아래로 돌려 읽었고, 다시 YouTube로 돌아가 영상을 한번 후루룩 훑음으로써 '영상을 정독'하는데 성공했다.
현재 이 세상의 모든 선생님은 동영상 속에 살고 있다. 20살 시절의 나는 5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강의실에서 교양 강의를 들은 적도 있지만, 당분간 그런 대규모 강의는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다. 코로나 시대에 맞춰, 우리의 사이드 프로젝트도 처음의 '짤 생성기' 보다는 좀 더 교육적으로 의미있는 곳에 씌였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
모든 강의가 동영상이 되어 버린 코로나 시대에, 동영상을 책으로 볼 수 있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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