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화. 지워진 지도
2화의 절체절명의 순간(셔터 개방 직전)에서 이어지며, 폭력 앞에서의 무력감과 시스템의 냉혹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회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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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이익-!
쇠가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셔터 하단이 완전히 뜯겨 나갔다.
어두웠던 가게 안으로 거리의 붉은 불빛과 매캐한 연기가 훅 끼쳐 들어왔다. 그 틈새로 세 명의 남자가 몸을 구겨 넣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얼굴은 두건으로 가렸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오, 이것 봐. 주인이 숨어 있었네?"
선두에 선 남자가 쇠파이프를 손바닥에 탁탁 치며 비릿하게 웃었다.
지현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준호는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렸다. 총구는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나... 나가! 가까이 오지 마!"
준호가 소리쳤다. 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준호의 떨리는 손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봐, 아저씨. 그거 진짜 총이야? 쏠 줄은 알아?"
남자가 한 발짝 더 다가왔다. 거리는 불과 3미터.
준호의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쏴야 한다. 쏘지 않으면 우리가 죽는다. 하지만 방아쇠에 걸린 검지가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평생을 성실한 가장으로 살아온 그에게, 사람을 향해 총을 쏘는 감각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타앙-!
귀를 찢는 파열음이 좁은 가게 안을 뒤흔들었다.
천장 텍스가 뚫리며 하얀 가루가 눈처럼 쏟아져 내렸다. 준호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발 된 총알이었다.
정적이 흘렀다.
침입자들은 멈칫했다. 그들도 목숨을 걸고 온 전사들이 아니었다. 그저 기회를 틈타 한몫 챙기려는 약탈자들일 뿐이었다. 진짜 총성이 울리자 그들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젠장, 진짜잖아! 미친 코리안이 총을 쏜다!"
선두의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뒷걸음질 쳤다.
"가자! 옆 가게는 비었어!"
그들은 썰물처럼 빠르게 셔터 틈으로 빠져나갔다.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준호는 총을 쥔 채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신이 사람을 쏠 뻔했다는 공포, 그리고 지켜냈다는 안도감이 뒤섞여 구역질이 올라왔다.
폭도들이 물러간 뒤에도 공포는 가시지 않았다.
그때, 카운터 뒤편의 전화벨이 울렸다.
따르릉-. 따르릉-.
이 상황에 전화라니. 준호는 멍한 눈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경찰일까? 아니면 방송국?
"여보세요?"
[아, 미스터 박? 나야, 데니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도 평온해서 이질적이었다. 건물주 데니스였다.
"지금 뉴스 보고 있는데, 거기 상황이 꽤 심각해 보이더군."
"...데니스 씨. 가게 문이 부서졌어요. 경찰은 오지도 않고..."
[저런, 안됐군. 다친 데는 없고?]
데니스는 건조하게 물었다. 준호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의 말이 이어졌다.
[참, 그래서 말인데. 이번 달 렌트비는 예정대로 입금되는 거지?]
준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니, 폭동은 폭동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니까. 그리고 혹시 가게가 전소되더라도 보험 처리는 알아서 해야 해. 내 건물 보험에는 '시민 소요 사태' 조항이 빠져 있거든. 알지?]
준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밖에서는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듯이 덤벼들고, 거리는 불타고 있는데. 전화선 너머의 남자는 렌트비와 보험 약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신... 지금 이 상황이 안 보여?"
[미스터 박, 흥분하지 마. LA는 원래 이런 곳이야. 각자 알아서 살아남는 거라고.]
툭.
전화가 끊어졌다.
준호는 뚜- 뚜- 소리가 나는 수화기를 쥔 채 허탈하게 웃었다.
우리는 이중으로 포위되어 있었다.
밖으로는 분노한 폭도들에게, 안으로는 냉혹한 자본의 논리에.
이 도시에서 우리의 이름은 지도 위에 없었다. 지워진 존재들이었다.
다시 밤이 찾아왔다.
부서진 셔터 틈을 임시로 막아두었지만, 언제 다시 뚫릴지 알 수 없었다.
준호와 지현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똑, 똑.
가게 뒷문 쪽에서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앞문이 아닌 뒷문이었다. 준호는 다시 총을 움켜쥐었다. 지현이 숨을 죽였다.
"누구냐!"
준호가 소리쳤다.
"...저예요. 말릭."
낮고 쉰 목소리. 말릭이었다.
지현이 준호의 팔을 잡으며 속삭였다.
"열지 마요. 그놈들도 한패일지 몰라."
"아니야... 목소리가 달라."
준호는 홀린 듯 뒷문으로 다가갔다. 잠금장치를 풀고 문을 살짝 열자, 어둠 속에 웅크린 말릭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헐렁한 후드티는 찢겨 있었고, 입술은 터져 피가 맺혀 있었다.
"너... 꼴이 왜 이래?"
준호의 물음에 말릭은 고통스러운 듯 배를 감싸 쥐며 말했다.
"그 녀석들이... 아저씨 가게로 다시 오고 있어요."
"뭐?"
"이번엔 그냥 몽둥이가 아니에요. 불을 지르려고 해요. 여기서 나가야 돼요. 당장."
말릭의 눈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약탈자의 눈이 아니라, 같은 공포를 공유하는 생존자의 눈이었다.
"왜... 왜 우리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는 거지?"
지현이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릭은 피 섞인 침을 바닥에 뱉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엄마가 아줌마네 김치를 좋아하거든요."
그 엉뚱하고도 담담한 대답에, 준호는 처음으로 총을 쥔 손에서 힘을 뺐다.
도시가 불타오르는 밤, 가장 낯선 조합의 연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작가 노트]
재난 상황에서 가장 잔인한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대하는 시스템의 태도입니다. 건물주 데니스의 전화는 물리적 폭력보다 더 차가운 자본주의의 민낯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 차가움 속에서, 흑인 청년 말릭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뜨거운 '인간애'를 들고 찾아옵니다. 이제 이야기는 단순한 생존을 넘어 '연대'로 나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