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화. 붉은 밤의 탈출
3화의 엔딩(말릭의 경고) 직후, 삶의 터전을 버리고 탈출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과 첫 번째 상실을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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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솔린이에요.”
말릭이 헐떡이며 말했다. 그 단어 하나가 주는 공포는 총보다 더 컸다. 총알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불은 모든 것을 지워버린다.
“놈들이 트럭에서 기름통을 내리고 있었어요. 이 블록 전체를 태울 생각이에요.”
준호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이민 온 지 10년, 닥치는 대로 일해서 겨우 마련한 내 가게. 선반의 먼지 하나, 바닥의 타일 한 조각까지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을 두고 나가라고?
“안 돼... 어떻게 지킨 가게인데.”
준호가 몽유병 환자처럼 중얼거렸다. 지현이 그의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여보! 정신 차려! 보험이고 나발이고 우리가 죽게 생겼어!”
“하지만...”
“데니스 말 들었잖아! 아무도 우릴 안 도와줘. 살아서 나가야 다시 시작이라도 할 거 아니야!”
지현의 외침에 준호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건물이 타면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이 타버리면 끝이다.
준호는 계산대의 현금 상자를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벽에 걸려 있던 가족사진 액자를 떼어 품에 안았다.
“가자. 뒷문으로.”
가게 뒤편 골목은 아수라장이었다.
매캐한 연기 때문에 시야는 5미터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준호는 낡은 밴(Van)의 시동을 걸었다.
키릭, 키릭, 부르릉-
오래된 엔진이 힘겹게 깨어났다.
지현과 말릭이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준호는 헤드라이트를 켜지 않았다. 불빛은 곧 표적이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차는 거북이처럼 골목을 빠져나갔다. 큰길로 나서자마자 그들은 지옥을 보았다.
도로 양옆의 야자수 나무들이 횃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여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녔고, 뒤집힌 경찰차 위에서는 십 대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고개 숙여! 창밖 보지 마!”
준호가 소리쳤다.
그때, 룸미러 속으로 익숙한 건물이 보였다. 방금 그들이 빠져나온 ‘준호네 식료품점’이었다.
화르륵-
어둠 속에서 붉은 꽃이 피어나듯, 가게 지붕 위로 불길이 솟구쳤다.
말릭의 말이 맞았다. 그들은 정말로 불을 질렀다.
준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가 멈췄다. 그는 멍하니 룸미러를 응시했다.
간판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JUNHO’S MARKET’*이라는 글자 중 ‘J’와 ‘U’가 검게 그을려 떨어져 나갔다.
“아...”
뒷좌석의 지현이 입을 막고 흐느꼈다.
10년의 세월이, 땀과 눈물이, 단 10분 만에 잿더미로 변하고 있었다.
준호는 핸들을 꽉 쥐었다.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분노인지 슬픔인지 모를 뜨거운 것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가세요, 아저씨. 멈추면 우리도 타요.”
말릭의 건조한 목소리가 준호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준호는 입술을 깨물며 엑셀을 밟았다. 차는 불타는 가게를 뒤로하고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이제 돌아갈 곳은 사라졌다.
“어디로 갈 거예요?”
말릭이 물었다. 준호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집으로 가봤자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폭동은 주거지 경계선까지 번지고 있었다.
“라디오코리아.”
준호가 말했다.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고 들었어. 상황실을 차렸다고.”
준호는 윌셔(Wilshire) 가를 향해 핸들을 꺾었다.
대로변으로 나오자 풍경이 조금 달라졌다. 약탈당한 가게들 사이로, 불이 켜진 건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그리고 그 건물 옥상마다 기이한 실루엣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래주머니를 쌓고, 총을 든 채 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군인도, 경찰도 아니었다.
그들은 앞치마를 두른 정육점 주인, 양복을 입은 세탁소 사장, 그리고 야구 모자를 쓴 청년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버지고, 누군가의 아들이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무장하고 옥상으로 올라간 것이다.
준호의 밴이 코리아타운의 중심가인 플라자 근처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 손전등으로 차를 멈춰 세웠다.
“정지! 한국 분입니까?”
군복 바지에 예비군 모자를 쓴 중년 남성이 엽총을 들고 다가왔다. 그의 눈은 며칠 밤을 새운 듯 붉게 충혈되어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
준호는 창문을 내렸다. 한국말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네... 식료품점 하던 사람입니다. 가게가... 불탔습니다.”
남자는 차 뒷좌석의 지현과 흑인 청년 말릭을 번갈아 보더니, 경계를 풀고 총구를 내렸다.
“고생 많으셨소.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오. 여기는 우리가 지키고 있으니.”
바리케이드가 열렸다.
준호는 밴을 몰고 광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수십 대의 차량과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물을 나누고, 탄약을 점검하는 사람들.
그곳은 난민촌이자, 동시에 요새였다.
차에서 내린 준호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있었지만, 이곳만큼은 사람들이 만든 ‘연대의 벽’이 불길을 막아서고 있었다.
“여보, 우리... 살았어.”
지현이 준호의 팔에 매달리며 안도했다.
하지만 준호의 시선은 옥상 위, 총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손이 주머니 속의 38구경 권총을 만지작거렸다.
도망치는 건 여기까지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다음 화에 계속)
[작가 노트]
자신의 전 재산인 가게가 불타는 것을 지켜봐야 했던 심정은 감히 상상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4.29 폭동 당시 한인들은 좌절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공권력이 부재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뭉쳤던 이른바 ‘루프 코리안(Roof Koreans)’의 등장은, 비극 속에서도 빛났던 공동체의 생존 본능을 보여줍니다.
이제 준호 일행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원으로 합류했습니다. 이야기는 ‘생존’에서 ‘항전’으로 전환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