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화. 적과 이웃 사이
4화에서 한인들의 방어 거점(라디오코리아)에 도착했지만, 흑인인 말릭의 존재로 인해 발생하는 내부의 갈등과 이해를 다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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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안은 흡사 야전 병원 같았다. 아니, 전방의 지휘 통제실에 더 가까웠다.
곳곳에 쌓인 라면 박스와 생수통, 쉴 새 없이 울려대는 무전기 소리. 한쪽에서는 부상당한 사람들의 상처를 소독하고 있었고, 다른 쪽에서는 예비군복을 입은 남자들이 지도를 펴놓고 방어 구역을 논의하고 있었다.
“어이, 거기! 라이트 꺼! 저격당하고 싶어?”
누군가의 고함에 준호는 황급히 밴의 전조등을 껐다. 차에서 내리자 매캐한 화약 냄새와 인스턴트 커피 냄새가 섞인 기묘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안도감도 잠시, 준호는 등 뒤로 꽂히는 따가운 시선들을 느꼈다.
사람들의 시선은 준호가 아니라, 그 뒤에서 주춤거리는 흑인 청년 말릭에게 꽂혀 있었다.
“...저 녀석은 뭐야?”
야구 배트를 든 청년 하나가 다가오며 물었다. 적개심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주변에 있던 다른 남자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몰려들었다. 순식간에 험악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깜둥이가 여길 왜 들어와? 스파이 아니야?”
“지금 밖에서 우리 가게 털고 불 지르는 게 다 저런 놈들이라고!”
누군가 거칠게 말릭의 어깨를 밀쳤다. 말릭이 비틀거렸다. 그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 뿐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명백한 ‘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보내! 재수 없게 어디다 발을 들여!”
“맞아! 당장 끌어내!”
남자들이 말릭을 에워쌌다. 공포에 질린 말릭의 눈이 준호를 향했다.
“그만들 하십시오!”
준호가 말릭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생각보다 큰 목소리에 주변이 순간 조용해졌다. 준호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이 친구는... 우리를 도와줬습니다.”
“도와줘? 흑인이?”
“네. 폭도들이 온다고 미리 알려줬고, 불길 속에서 탈출할 때도 길을 봐줬습니다. 이 친구가 아니었으면 저랑 제 아내는 지금쯤 잿더미 속에 묻혀 있었을 겁니다.”
준호의 말에 남자들은 서로를 쳐다보며 웅성거렸다. 의심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사장님, 사람 너무 믿지 마쇼. 낮엔 도와주는 척하다가 밤에 뒤통수치는 게 저놈들입니다.”
예비군 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혀를 차며 말했다. 그때, 준호의 뒤에 있던 지현이 나섰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생수병 하나를 말릭에게 건넸다.
“...마셔, 말릭.”
지현의 손은 여전히 조금 떨리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다.
“저희 가게 단골이에요. 나쁜 애 아니라는 거, 제가 보증해요.”
가게 물건을 훔쳐 간다고 의심했던 지현이었다. 그런 그녀가 말릭을 변호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반전되었다. 중년 남자는 찝찝한 표정으로 엽총을 고쳐 멨다.
“...거, 아주머니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알겠수다. 대신 허튼수작 부리면 바로 쫓겨날 줄 알아. 구석에 조용히 박혀 있어.”
사람들이 하나둘 흩어졌다. 말릭은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Thanks...”
말릭이 지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지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돌렸지만, 그녀의 눈가도 붉어져 있었다.
새벽 4시.
소란이 잦아든 광장 구석, 준호와 말릭은 건물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라디오코리아 방송이 자장가처럼 작게 들려왔다.
[...지금 8가와 웨스턴 코너에 도움이 필요합니다. 무장한 폭도들이 접근 중이라고 합니다...]
말릭이 종이컵에 든 믹스커피를 후후 불며 입을 열었다.
“아까 그 사람들... 군인들 같아요.”
“한국 남자들은 다 군대에 가니까. 훈련받은 사람들이야.”
준호의 대답에 말릭이 피식 웃었다.
“웃기네요. 경찰들은 도망갔는데, 식료품점 아저씨들이 군인처럼 싸우고 있다니.”
“...그러게 말이다.”
준호는 쓴웃음을 지었다. 씁쓸한 농담이었지만 뼈가 있었다.
“아저씨.”
“응?”
“왜 흑인들이 한국 사람들 가게를 공격하는지 알아요?”
말릭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준호는 말문이 막혔다. 평소라면 “너희가 나쁜 놈들이니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옆에 앉은 이 소년은 나쁜 놈이 아니었다.
“...글쎄다. 우리가 만만해서인가?”
“비슷해요.”
말릭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도시의 불빛을 응시했다.
“백인들 동네는 너무 멀고 경찰이 지키고 있어요. 우리 동네엔 털 것도 없죠. 그런데 한인타운은... 바로 우리 옆에 있어요. 우리랑 비슷하게 가난한 것 같은데, 사장님들은 우리를 도둑 취급하죠.”
말릭의 시선이 준호에게 닿았다.
“서로 미워하는 게 제일 쉬우니까요. 진짜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미워하는 것보다.”
준호는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건물주 데니스의 말이 떠올랐다. ‘보험 처리는 알아서 해.’
경찰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베벌리힐스로 향하던 그 뒷모습.
시스템은 위에서 팔짱을 끼고 내려다보고, 바닥에 있는 우리끼리 서로의 멱살을 잡고 있었다. 준호의 가게를 태운 것은 말릭의 친구들이었지만, 그 불씨를 던진 것은 누구였을까.
“...미안하다.”
준호가 나직이 말했다.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말릭을 의심했던 것에 대해서인지, 아니면 그동안 그를 그저 ‘후드 쓴 흑인 아이’로만 봤던 것에 대해서인지.
말릭은 대답 없이 커피를 들이켰다.
그때, 옥상 감시조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3시 방향! 트럭 3대 접근 중! 총원 위치로!!”
평온했던 휴식은 끝났다.
준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말릭도 긴장한 듯 주먹을 쥐었다.
다시 밤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다음 화에 계속)
[작가 노트]
혐오의 시대입니다.
LA 폭동 당시 언론은 '흑인 대 한인'의 대결 구도를 집중적으로 부각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자극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소외된 계층 간의 비극적인 충돌을 방조한 주류 사회의 책임이 있었습니다.
5화에서는 준호와 말릭의 대화를 통해, 이 싸움의 본질이 단순한 인종 전쟁이 아님을 깨닫는 과정을 담았습니다. *'서로 미워하는 게 제일 쉽다'*는 말릭의 대사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 의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