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꼬치를 좋아하던 어린아이
나는 어릴 적에 닭꼬치를 매우 좋아했다. 떡꼬치 한 개에 300원하던 시절에 닭꼬치는 2,000원이었기 때문 쉽게 사 먹을 수 있는 간식이 아니었다. 닭꼬치 한 개를 사 먹기 위해서는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양 많고 저렴한 간식들을 포기해야만 했다. 심지어 닭꼬치는 가격 대비 양도 적었지만, 그래도 늘 사 먹고 싶은 만큼 맛있었다. 오죽했으면 원 없이 닭꼬치를 먹어보는 것이 어릴 적의 큰 소원이었다.
훌쩍 커버린 나는 이제 핸드폰으로 주문만 해도 다양한 종류의 닭꼬치를 실컷 먹어볼 수 있다. 그러나 어릴 적의 소원을 이루고도 남은 지금의 나는 그때보다 행복한가?
어릴 적에는 그저 닭꼬치를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지만, 지금은 소원으로 삼을만한 것들이 더 많아졌다. 어쩌면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 닭꼬치가 아니라 남들보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차, 더 좋은 땅, 더 많은 재산 등을 소원으로 삼으며 불행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풍요로움 속에 비교
윗세대에 비해 엄청나게 풍요로워진 지금 우리 세대는 낭비를 문화로 삼고 있다. '플렉스'라는 단어로 포장해 남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어떤 것을 구매한다거나, 많은 양의 음식을 한꺼번에 먹는 영상이 유행이 되어 결국 '먹뱉'이라는 단어까지 생겨버렸다. 음식을 많이 먹는 것을 영상으로 담고 싶으나 다 먹을 수 없기에 음식을 씹고 뱉은 후 영상을 편집해서 먹는 것처럼 속이는 행위를 나타내는 단어다.
또, 케이크 한 조각 사 먹기에도 힘든 시절이 언제 있었냐는 듯 지금의 우리는 짓궂은 장난이라며 케이크를 통째로 사람의 얼굴에 던지기도 한다. 이렇듯, 지금의 우리는 과거에 비해 가득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각종 미디어 매체로 인해 부의 기준, 외적 조건의 기준들이 점점 더 높아지며 남과 비교하기 더 쉬운 환경에 노출되고있다.
이 '비교'라는 것은 자신이 가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보다 더 가진 사람을 보며 시기와 욕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이 비교를 없애고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열쇠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감사'다.
내가 받은 가장 귀한 선물, 감사
내게 감사를 몸소 가르쳐 주신 분은 바로 나의 아버지다. 어릴 적 기억에 나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반찬 투정을 한 적이 없으며,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할 때면 늘 음식 앞에서 거의 5분을 대표해서 기도하셨다. 음식 다 식겠다는 가족들의 핀잔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던 아버지의 기도는 대략 이랬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주시고 온 가족이 건강하게 이 자리에 모일 수 있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이 음식을 가족에게 먹이기 위해 수고한 아내에게 복 주시고, 이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고한 모든 손길에 감사하며 그들에게도 복 주시옵소서'
기도에 매번 공통적으로 나왔던 내용만 기억해 적어보았다. 당시 식사기도 시간엔 몰래 눈 뜨고 형 누나들과 장난치며 기도가 언제 끝나나 기다리기만 했는데, 지금 기도 내용을 돌아보니 당연한 듯 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기도였다. 하루아침에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세상 속에,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에서 우리 가족 모두가 건강하게 모여 밥을 먹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또 음식이 이 자리에 오기까지 수고한 사람들은 누구며, 왜 알지도 못하는 그들에게까지 감사하며 축복하는 기도를 하는지 물어보자 아버지는 농사짓는 분들의 수고부터 시작해 가공하시는 분들, 운송하시는 분들, 판매하시는 분들 등 우리가 다 알지 못하는 여러 손길을 거쳤기 때문에 엄마가 요리를 할 수 있고 비로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다.
우리는 스스로 돈을 벌어 내 돈 주고 이것저것 다 하는 것 같지만, 사실 이 세상 모두는 서로의 수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식당에서 음식을 계산할 때, 마트에서 작은 거 하나를 계산할 때도 계산하는 사람 구매하는 사람 모두가 습관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지 않을까?
감사맨
나는 조금 독특하다 싶을 만큼 사소한 일들에 감사하며 살고 있다. 나는 혼자 밥을 먹기 전에 아버지와는 다르게 식사기도를 아주 짧게 한다. 그렇지만 음식을 씹을 때마다 기도를 한다. '하나님 오늘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음식을 먹지만, 이 음식이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겠습니까. 이 음식을 사 먹을 수 있는 돈을 벌게 하심에 감사하며 제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허락하심에도 감사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제가 이렇게 먹는 음식조차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 있습니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어 주시고 그들에게도 동일한 은혜를 베풀어주옵소서.'라는 식의 기도를 한다. 감성이 풍부한 어떤 날에는 식사 중에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울컥 차오르기도 했다.
나는 샤워할 때도 감사 기도를 한다. 깨끗한 수돗물을 마음껏 쓰며 내 몸을 씻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해 상수도에서 고생하시는 수많은 분들의 수고를 생각하며 감사한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볼일을 보고 변기를 내릴 때도, 내 몸에서 나오는 이 더러운 것들을 한 손에 처리할 수 있도록 하수도에서 고생해 주시는 수많은 분들께도 감사한다. 그 외에도 내가 지금의 안락하고 편안한 일상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수고해 주시는 수많은 분들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하며 감사한다. 이래서 모든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말이 있는 것이고, 우리는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존중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다
비록 나는 어릴 적과는 달리 닭꼬치를 넘어서는 수많은 소원들이 생겼지만, 그럼에도 불행하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것은 늘 '감사'하기 때문이다. 감사하기 때문에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으며, 언젠가 소원이 이루어졌을 땐 더 많이 감사하며 행복할 거란 기대가 있다.
나는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외적인 삶을 살고 있진 않지만, '플렉스', '먹뱉'과 같은 것을 하는 사람들보다 행복하다고 자신할 수 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린다 하더라도 감사가 없고 비교에 사로잡힌 사람에 비해,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감사할 수 있는 내 삶이 감사하다.
나는 감사하기 때문에 더욱 감사하고, 감사하기에 행복한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행복하기 때문에 감사하는 게 아니라, 감사하기 때문에 행복한 존재이지 않을까 싶다.
감사하자. 그러면 행복은 따라온다.
P. S. 오늘 난 글로써 감사를 플렉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