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계속 쓰겠다고 마음먹은 이유
학기 말이 되면 교사들은 바빠진다. 그동안의 수행평가 입력, 출석부와 결석 자료 정리, 학생부 기록, 창의적체험학습과 봉사 진로 등등의 누가기록, 그중 가장 공들이는 것은 행동발달 및 종합의견(이후 ‘행발’)이라는 성적표의 맨 아래 나가는 글귀이다.
그 글귀가 형식적이 된 것은 꽤 오래되었다. 위에서 그 칸에 부정적인 내용을 적지 말라는 지침이 내려온 후부터 그 칸은 누구에게도 의미 없는 칸이 되었다.
교실에서 수업을 방해하고 돌아다니는 아이는……. ‘발랄하고 사교적임’.
다른 친구들의 말을 무시하면서 자기 생각만 고집하고 마음대로 하는 아이는……
‘창의적이고 주도적임’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번 학기 행발을 쓰는 시기에 누군가가 링크 하나를 알려주었다. 아이의 특징을 적으면 그것을 깔끔한 ‘행발용 문장’으로 다듬어주는 AI 행발정리 사이트였다. 예를 들어 ‘회장, 리더십’이라고 적으면 가장 적절한 문장을 5-6 문장으로 뽑아주는 것이다. 처음에는 화가 났다. 그나마 학교와 가정이 교류하는 것이 이 칸인데, 교사가 단어를 골라 쓰지 않았다는 것을 가정에서 알게 되면 기분이 어떨까? 반대로 나는 글을 철저히 스스로 쓰는데 가정에서 AI가 썼겠지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는 AI 가 우리들 사이에 들어와 있는 것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아마 많은 선생님들이 놀라움과 걱정과 그 어디쯤의 생각들을 할 것이다.
그 사이트를 쓰지 않고 한 명 한 명 생각하며 문장을 다듬어갔다. 그리고 1차 제출기간에 제출을 했다.
그런데 학기말이 되니, 진도도 슬슬 마무리가 되고 걱정스러운 부분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아졌다. 언행이 점점 거칠어지는 아이도 있고, 학기 내내 과제를 거의 안 해온 아이도 있고, 모둠활동마다 마찰을 불러오는 아이도 있었다. 유일하게 가정과 소통하는 글이라면, 이런 것을 이야기해서 협조를 구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문장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긍정적으로 하라는 그 지침 때문에…. 결국 만족스러운 문장을 만들어내지 못하고는 혹시나 하고 그 AI사이트에 입력을 해 보았다.
‘모둠활동, 갈등’
‘창의적이고 진취적으로 자신의 과제를 수행하나 협력활동 시 다른 구성원의 이야기를 듣지 않아 팀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함’을 포함한 대여섯 문장이 나왔다.
맞아. 그래. 딱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나는 결국 1차 제출본에 세 명의 친구들에게 세 문장을 적어주었다.
그리고 2차 제출을 할 때 그 문장들을 다시 지웠다.
아이들이 늘 그랬던 것은 아니야.
학교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면 이런 형식적인 글이어야 할까. 이걸로 행동을 고친다면 무엇을 위해 고친 걸까.
한편으로 내가 통지표에 쓴 글과 AI의 글에 차이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창의적, 자기 주도적, 조화, 협력…. 그게 그거 같은 말들을 만들라는 지시 때문에 이미 형식적이 되어버린 행발을 뭘 얼마나 덜 형식적으로 해보자고 고민하는 것일까.
단지 행발이 아니라 전반적 교육 내 문서 소통이 그렇다. 공교육, 절차와 행정, 민원, 공식적, 효율적.
이건 그냥 그런 거다. 어쩔 수 없는 거다.
그리고 이런 글은 AI가 사람보다 잘 쓸 수밖에 없는 거다.
피구를 할 때 유난히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는 남자아이가 있다. 잽싸고 마른 몸으로 공을 요리조리 피할 때마다 머리카락에 빛이 들어왔다가 사라진다.
한 아이는 피구 할 때마다 안경이 떨어진다. 그 아이가 공을 피하는 모습은 거의 묘기에 가깝다. 아무리 낮게 던져도 바닥에 찰싹 엎드려 피한다.
친구들과 소통하고 싶어서 눈빛을 보내지만 부끄러워서 말을 잘 못하는 아이도 있다. 그 아이는 자기 할 일을 완벽하게 한다. 내가 실수를 하면 나에게 아주 조용히 다가와서 묻는다.
누가 떠들건 말건 해리포터 같은 눈빛으로 허리를 세우고 내 목소리에 집중해 주는 아이가 있다.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아서 그 허리가 아주 조금씩은 내려오고 있다.
두 시간 만에 끝내는 미술 수업을 며칠간 쉬는 시간마다 총력을 다해 그리는 아이가 있다. 그 아이의 작품이 놀라워서 친구들이 그 책상에 쉬는 시간마다 붙어있다.
글쓰기는 아무것도 안 하지만 수학과 과학을 좋아해서 진도가 나가기 전에 다 풀어버리고 큐브를 손에 종일 들고 있는 아이가 있다. 티셔츠에도 큐브 그림이 있다. 따뜻하게 큐브에 관심이 없는 짝꿍에게 스킬을 전수하며 관심까지 전수한다.
내가 AI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이런 것들을 기록하는 것일 것이다.
AI는 과거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조합하여 글을 만든다. 과거의 기록은 이미 죽어있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람은 본인이 과거에 어떤 글을 썼다 해도 그 글을 딛고 끊임없이 생각을 바꾼다. 과거의 기록이 영원하지 않고 의미없이 죽어 있지 않다.
그래서 그게 뭐든 일상에 대한 글을 계속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2학기 말에 통지표를 줄 때는 마음을 담아 개인시를 하나씩 써서 주어야겠다. 아이들은 계속 살아있고 살아갈 존재들이니…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순간들에 나도 함께 살아가는 것 같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