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존댓말을 하고 있지만 대화는 허물없지
나의 나이와 학번은 잘 모르고 나를 대충 후배 정도로 생각하던 몇몇 선배들은 나중에 나의 학번을 묻고선 깜짝 놀라곤 했다. 내가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건 입학 후 1~2년도 안된 시점이었고, 나는 꽤나 어린 축에 속했다. 반면 내가 어울렸던 선배들은 아직도 졸업하지 않은 일명 '화석' 학번이었으니 나이차이가 꽤 많이 났다.
21학번인 나는 1학년 때 3학년인 16학번 W선배를 만났다. 우리의 나이 차이는 다섯 살. 내가 1학년 때 만났지만, 우린 내가 2학년을 마칠 무렵이 되어서야 제법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나는 선배랑 나눴던 이 대화를 기억한다.
W: 너 왜 L한테 언니라고 해? 너 몇 살인데?
나: 네? 저 21학번 02년생인데요?
W: 뭐라고? 너가 그렇게 어렸어? 난 너가 L하고 동갑인 줄 알았는데!
나: 아니 대체 저를 뭘로 보고.. L언니는 19학번인데요..
W: 근데 내가 왜 이렇게 널 편하게 대했지? 나 원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후배들 어려워하는데?
우린 분명 내가 1학년, 새내기 시절에 만난 인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인지 그는 나를 대하기 어려운 새파랗게 어린 ‘새내기’로 느끼진 않았던 모양이다. 흥미로운 일이었다. 이후에 다른 선배와도 비슷한 대화를 했기 때문이다. 내 나이를 더 높게 쳤던 일화 말이다.
K: 난 Y가 너보다 어린 줄 알았어.
나: 네? 저 Y랑 동갑인데요? 21학번!
K: 그러니까. 그렇다며?
나: 그럼 대체 저를 몇 살로 보신 거예요? 저번에 W 선배도 저보고 L언니랑 동갑인 줄 알았다는데!
K: 아니야. L이랑 동갑까진 아니고.. L보다 아래인데 Y보단 위? 그 사이?
나: 그럼 20학번인데요..
K: 어, 한 그쯤?
나: 진짜 어이가 없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 대하기가 어렵다는, 후배와 굳이 어울리고 싶진 않다는 선배들과 친해지는 것을, 내가 해낸 모양이다.
내 나이를 한 살에서 두 살 더 많게 보았다는 점에 대해 틱틱대긴 했지만, 싫진 않았다. 오히려 '편하게 대할 수 있는 후배‘ 포지션은 꽤나, 아니 상당히 마음에 든다.
선배 둘이나 내 나이를 고학번으로 착각했으니,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나는 혹시 내가 너무 새내기 답지 않은 복장으로 다녔나 싶어 물었다.
나: 제가 그렇게 추레하게 다녔나요? 너무 후줄근하게 안 꾸미고 다녔나?
K: 아니야, 외적으로 꾸미고 다니는 거랑 상관없어. 그냥 느낌이. 학교에 이미 적응 다 해서 편하게 다니는 느낌? 이미 휴학도 해본 복학생 바이브.
나: 참 나...
K: 나는 원래 새내기들 어려워한단 말이야. 근데 너는 나한테 엄청 편하게 대했잖아. 그래서 우리가 친해진 거야. 좋게 생각해.
선배는 내가 저학년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는 옷차림이나 꾸미고 다니는 정도와는 무관하다고 했다. 그저 ‘학교에 완전히 적응해서 편하게 다니는 복학생 후배 같은 느낌’이었다는 게 전부라니. 아무래도 내게서 어떤 ‘짬’이 느껴졌던 모양이다.
한 술 더 떠서, 우린 알게 된 지 한 학기밖에 안 됐는데 마치 오래된 인연 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가까워졌기에. 마치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서로가 너무 편했기에.
W선배와 나는 내가 1학년 때 처음 만났다면, K선배와 나는 내가 2학년 때 처음 만났다. W선배와 같은 학번, 같은 나이, 군휴학 2년을 제외하고도 똑같이 1년을 더 쉰 K선배는 그때 4학년이었다.
K: 근데 우리 언제 만났냐? 작년 아니야? 한 일 년 되지 않았어?
나: 어, 그러게 언제 만났죠? 근데 작년이면 저 1학년 땐데?
K: 에엥? 아니야. 그럴 리가.
나: 아니다, 우리 올해 3월에 만났어요. 지금 9월이니까 아직 일 년도 안 됐는데?
K: 뭔 소리야. 그건 진짜 아니다.
나: 아, 선배가 저번에 4학년이라고 곧 졸업하는데 동아리 들어온 거라고 그랬잖아요.
K: 와, 진짜네. 근데 나 너 왜 이렇게 오래 본 것 같냐?
나: 근데 그건 저도요 ㅋㅋㅋ
알게 된 지 족히 1년은 넘은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사실 1년도 채 안되었더라. 그리고 그걸 양쪽 모두가 느꼈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내 나이도 잘 모르고 나와 친하게 지냈다니. 저학번의 입장에서는 섭섭할 만한 일이다. 하지만 고학번의 입장에서는 후배들의 나이를 기억한다는 것이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학교에 있는 사람들? 거의 다 나보다 어린 ‘후배'일뿐이므로, 고만고만하게 느껴진다고 하더라.
그들은 학교에 드물게 남아있는 자신들의 또래이자 같은 처지의 ‘화석’을 찾아 유대감을 가지고 어울리길 원하지, 자신들보다 훨씬 어리고, 뭣도 모르고, 놀기 바쁘고, 에너지만 넘치는 '후배'는 이들의 관심사 밖이었다.
어딜 가든 나이가 동갑이라고 하면 반가움, 안도감과 함께 신기한 유대감이 피어난다. 같은 나이에서만 느낄 수 있는 친밀감이 있고, 유독 끈끈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과에서도, 동아리에서도, 동기끼리는 어디서든 뭉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동갑과 유독 가까운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은, 곧 동갑이 아닌 다른 모든 이들과는 먼 거리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나이가 다르면, 불편하다. 어딘가 모르게 참 불편하다.
유교 문화에서 비롯된 장유유서와 존댓말 문화는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어 행동할 수 있게 하지만, 나와 나이가 다른 이들에게 쉽사리 편하게 대하지 못하게 하는 제약을 만들기도 한다. 선배와 후배에겐 친구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대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내 주변에는 내가 느끼기에 어렵고 불편한 선배들이 없지 않다. 그들이 나보다 단지 나이가 몇 살 더 많다는 사실에 짜증 났던 경험도 있다. 친구였으면 내 성깔대로 처리하겠는데, 장유유서 문화가 내 발목을 잡아 수그리기도 하고, 동등하게 대하지 못했던 적도 많아서 분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불편한 선배들보단, 편한 선배들이 훨씬 많다. 선배랑도 편할 수 있는 거였다. 언니오빠랑도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였다. 말만 존댓말을 쓸 뿐이지 말하는 내용은 사실상 반말하는 사이에서나 하는 격식 없는 말들을 하고 있다. 역시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고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다.
실제로는 나이 차이를 두려워하며 다가가길 꺼려했던 적은 없던 것 같다. 쭈뼛쭈뼛 다가가는 느낌이 아니라 편하게 다가가서 그런가. 아니면 두 선배 모두 낯을 조금 가리는 편이라 그랬을까. 비교적 낯을 가리지 않는 내가 먼저 친근하고 털털하게 다가갔던 것이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다.
선배들은 선배가 후배에게 먼저 다가가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을 부담스러워했다. 그런 와중에 누군가 먼저 다가와서 고마움을 느꼈을까? 후배가 당돌하게 먼저 다가가서 친해져버리기까지 하는 건 그들의 계획엔 전혀 없었던 일이었을지도.
선배들은 나랑은 대화가 제법 잘 통한다고 말해줬다. 다른 후배들과 다르게 말이다. 그건 왜 그랬을까? 아마 나의 관심사와 호기심이 늘 한 단계 앞서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배우고 싶은 게 많고 늘 더 배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선배들이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물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내가 자신들이 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호기심을 가지고 질문하자 신이 나서 대답해주곤 했다. 연신 멋지다는 말을 뱉는 나를 환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만나면 나이부터 묻는 문화가 아니었다면, 초면에 나이 소개 하는 것을 생략한다면, 우린 훨씬 더 편한 마음으로 여러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어울리는 이들의 대부분이 나보다 선배들이 되었지만, 결국 중요한 건 나이를 뛰어넘는 무언가이다.
나이가 같은 친구들과는 가장 격식 없을 수 있고, 그래서 가장 나답게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는 그리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투닥투닥 대는 우리가
이미 ‘친구’라고, 생각한다.
2023-02-21-21:31-2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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